[아무튼, 주말]
[정시행 기자의 드라이브]
신화 쓰고 은퇴한 박태종 기수
[정시행 기자의 드라이브]
신화 쓰고 은퇴한 박태종 기수
질주하는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발굽에 허리가 짓밟히고, 갈비뼈가 동강 나고, 다리가 부러졌다. 관중의 욕설과 신발이 예사로 날아왔다. 경주가 끝나도 며칠은 눈 속에서 고운 모래알이 지걱거렸다.
그렇게 39년간 말만 탔다. 좀 더 편한 인생, 그럴듯한 변신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게 내 천직(天職)이니까.” 한국 최고의 경마 기수(騎手), ‘경마 대통령’ 박태종(61)은 담담히 말했다.
박태종은 경마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친숙한 이름이다. 1987년 스물두 살에 데뷔해 2025년 환갑으로 정년을 맞기까지, 무려 1만6016번 출전했고 2249번 우승했다. 한국 근대 경마 104년 역사상 누구도 가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이로운 기록. 키 147㎝, 체중 46㎏인 그가 ‘경마의 거인’이자 ‘국민 기수’ ‘한국 경마의 대명사’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이유다.
박태종은 만 60세 생일 다음 날인 지난해 12월 21일 은퇴 경주를 치렀다. 서울 제6경주(1300m)에서 ‘미라클삭스’를 타고 전성기 때와 다름없는 집중력으로 경기를 끌어가던 그는 막판 후배에게 추월당해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환하게 웃으며 고별 인사하는 그에게 팬과 동료, 경마장 직원들이 몰려들어 꽃다발을 안기며 눈물을 훔쳤다. “박태종이 없는 경마를 상상하기 힘들다” “영웅의 퇴장으로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라고 했다.
말보다 일찍 일어난 사나이
말은 새벽형 동물이다. 말의 신체 리듬은 동트기 직전 가장 안정적이다. 경주용 말은 이때 훈련해야 기량을 제대로 키울 수 있다. 기수의 실력은 이 새벽 조교(調敎·말 길들이기)에 얼마나 성실히 임하며 말과 혼연일체가 되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아름답고 파워풀하지만 극도로 예민하고 단순한 이 초식 동물의 루틴에 인간의 일상을 갈아 넣는 것을 뜻한다. 박태종은 마치 수도승처럼 엄격한 ‘자기 관리의 교과서’로 통했다.
-39년간 새벽 조교에 한 번도 빠지거나 늦은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늘 새벽 4시에 일어나 출근했어요. 5시쯤부터 조교를 하니까. 밤 9시엔 잠자리에 들었고요. 9시 뉴스를 본 적이 없어요. 술·담배는 평생 안 했고, 저녁 모임이란 데 나가본 적도 없고요. 쉬는 날에도 컨디션이 무너지지 않도록 똑같이 생활했지요.”
-은퇴 후엔 좀 느슨해졌나요.
“요즘은 밤 10시쯤 자요. 알람은 오전 6시에 맞춰놓고요. 그래도 원래 깨던 시간에 깨요. 뒤척이며 6시까지 기다려요. 이젠 가족의 리듬에 맞춰야죠.”
-운동은 계속 합니까?
“운동은 그만둘 수 없어요. 제가 무릎 인대가 안 좋아서 주변 근육으로 다리를 지탱하거든요. 오전 8시부터 동네 체육관에서 재활 운동을 해요. 하루 이틀만 안 해도 근육이 빠져 걷기가 힘들어요.”
경마 기수에게 무릎은 생명과 같다. 말에 가해지는 중량 부담을 줄이려 기수들은 극한의 다이어트를 한다. 자기 체중의 10배, 450~500㎏에 달하는 말을 제어하려면 날씬한 몸에 붙은 근육에서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장에서 엉덩이를 뗀 채 바람의 저항을 피해 몸을 바짝 낮추는 ‘몽키 자세’를 유지하다 보면 모든 하중이 무릎에 쏠린다. 박태종의 무릎 인대는 세 번이나 파열됐다.
-말 다시 타고 싶진 않나요.
“어휴, 아직은요. 부상에 진절머리가 나서.”
-최고의 기수도 평생 부상의 두려움이 컸군요.
“입원·수술만 스무 번 넘게 했어요. 부상 자체보단 그때마다 기수 생활이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어 두려웠지요.”
-어디 어디 다쳤습니까?
“(목을 가로로 그어 보이며)이 아래로는 싹 다. 아, 기절한 적 있으니 머리도 다쳤겠네요.”
-시속 60~70㎞로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면 치명적일 텐데요.
“동료 4~5명이 죽는 걸 봤어요. 저도 여러 번 고비가 있었죠. 1999년 경기 중 낙마해 말발굽에 짓밟혔어요. 척추가 두 쪽 나는 느낌이더군요. 척추압박골절. 팬들은 제가 죽은 줄 알고 병원 장례식장에 몰려갔다가 제 영정이 없으니 그제야 입원실을 찾았다고 해요.”
작고 가벼워야 할 수 있는 일
박태종이 탄 경주마는 평생 기승 횟수와 비슷한 1만6000두에 육박한다. 어떤 말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모르지만 내려올 수는 없었다. 오직 말만이 그를 진정 살아 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직”이라고 했다. “천직인데 무슨 딴생각을 하느냐”고.
-천직. 요즘 듣기 어려운 말이네요.
“그거 말곤 다른 재주가 없다는 거죠 뭐. 전 1965년 충북 진천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유독 키가 작았어요. 아버지는 평균 이상인데 형제 중 나만 어머니를 닮았죠.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말주변도 없고, 내성적이고…. 내가 이거 아니면 뭘 했겠어요.”
-운동 신경은 타고난 듯한데요.
“달리기를 잘했어요. 학교 대회에서 1~2등 해서 공책 같은 거 받았어요. 중학교 때 육상부를 지망했는데 너무 작아서 안 된대요. 커서는 군 특수부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체중 미달로 병역도 면제됐어요. 그게 너무 서운했어요.”
-말을 타본 적 있습니까.
“아유, 어릴 땐 구경도 못 했죠. 말 타는 건 돈 많은 부자들이 하는 걸로 알았어요.”
-어떻게 경마 기수란 직업을 알게 됐나요.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이모부의 야채 가게에서 배달 일을 도왔어요. 포클레인 기사나 택시 기사가 꿈이었죠. 어느 날 이모부가 한국마사회 마포 지점에서 경마 기수 후보생 모집 공고를 보고 와서 ‘체격 조건이 키 163㎝ 이하란다’고 전해주더군요. 작아야 우대받는 직업이 있다니, 설렜죠. 그땐 경마장이 뚝섬에 있었어요. 거길 찾아가 말을 멀리서나마 처음 봤죠. 첫해엔 면접에서 떨어졌고, 재수해서 다음해 붙었어요.”
-1987년 4월 데뷔했지요.
“1년 반 훈련한 끝에 첫 경주에 나갔어요. 말에서 내리니 100m를 전속력으로 달린 듯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려요. 난간 붙잡고 계단을 간신히 내려왔어요.”
-천직이란 걸 언제 알았나요?
“데뷔하면 보통 한 달 안에 1승을 하는데, 동기 30명 중 제가 제일 늦었어요. 초조했죠. 기승 자세를 더 열심히 연구했어요. 집에서도 말 목상에 올라 종일 연습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천직으로 만들어간 것 같아요.”
“박태종은 소를 끌고도 이긴다”
신인 돌풍을 일으키던 그는 1992년 국내 최고 권위 무궁화배에서 첫 대상경주(큰 규모의 축제형 경마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가장 기뻤던 순간”이다.
그때부터 박태종 천하였다. 각종 대상경주 우승과 그랑프리, 코리안 더비를 휩쓸며 최다 기승, 다승왕, 상금왕 기록을 계속 스스로 갈아치웠다. 1996년엔 ‘최초 억대 연봉 기수’란 타이틀로 경마판을 확 키워놨다.
한국 경마는 1922년 일제가 세수 확대차 조선경마구락부를 출범시킨 이래 영세한 레저 도박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데 박태종의 전성기와 맞물려 본격적인 스포츠 반열에 올랐다.
2004년 경마 사상 그가 올린 첫 1000승 때 과천 경마장에 기념비가, 2009년 1500승 때 기념수가 섰다. 2016년 2000승 때는 한국조폐공사에서 순금 메달을 특별 제작했다. 조폐공사가 국민 요청에 따라 금메달을 만든 역대 스포츠 스타는 박찬호, 김연아, 손흥민과 프로게이머 페이커 정도다.
-경마는 ‘마칠기삼(馬七騎三·말이 칠할 기수가 삼할)’인데 박태종 때문에 ‘마삼기칠(馬三騎七)’이란 말이 나왔죠. ‘박태종은 소를 끌고도 이긴다’고도 했고요.
“에이, 그건 과장이고요. 경마는 말이 제일 중요해요.”
-좋은 말을 골라 탄 겁니까?
“꼭 그렇다기보다…. 사실 기수들 실력은 백지장 한 장 차이예요. 기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동물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니 워낙 변수가 많죠. 저는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어요.”
-어떤 말이 좋은 말인가요?
“말 잘 듣는 말이죠.”
-어떻게 알아봅니까.
“말은 혈통이 최우선이에요. 아무리 체격이 좋고 훈련을 잘 받아도, 혈통이 나쁘면 잘 뛸 확률이 떨어져요. 혈통이 안 받쳐주는데 크고 거친 말은 힘을 허투루 쓰기 십상입니다.”
-혈통이 안 좋아도 우수한 말이 나오나요?
“아주 가끔 있습니다. 돌연변이죠.”
레이스의 묘미는 ‘추입’
-말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동물이었지만, 이젠 사람들이 접하기 쉽지 않습니다. 말은 어떤 동물인가요.
“덩치는 커도 겁이 많아요. 참새만 봐도 놀라죠. 그리고 정직한 동물이에요. 대부분의 말은 훈련받는 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말 눈망울이 진짜 크고 예뻐요. 보고 있으면 마음이 녹죠.”
-말이 뜻대로 달려줘 우승도 하고, 꼴찌도 하지요. 어떻게 대합니까.
“그냥 똑같아요. 목덜미 툭툭, 두 번 두드려줘요.”
말마다 질주 습성이 다르다. 처음부터 치고 나오는 선행마(先行馬)가 있고, 뒤따라가다 막판에 짜릿한 역전극을 만드는 추입마(追入馬)가 있다. 예측불허 주법을 구사하는 자유마, 다크호스도 있다. 통상 선행마의 입상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마꾼들은 그쪽에 많이 베팅한다. 박태종의 취향은 ‘추입’이다.
-왜 추입마가 좋습니까.
“장거리에 유리해요. 처음부터 너무 처지지는 않되, 힘을 비축해 뒀다 결정적 순간에 발현시킬 수 있는 말에 애정이 가요. 추입마일수록 잘 이끌어줄 베테랑 기수가 필요합니다.”
-기억에 남는 말은요.
“저를 엄청 고생시킨 ‘무비동자’라고 있어요. 국산마인데, 망아지 때부터 악벽(惡癖·나쁜 버릇)이 심했어요. 사람이 타면 떨어뜨리려고 앞발 들고 날뛰었지요. 결국 그 무비동자 타고 2001년 농림부장관배 등 중요한 경기에 6번 나가 전부 우승했습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기다려준 보람이 있었죠.”
박태종은 결혼도 말과 관련된 사람과 했다. 기초 승마 교관 출신인 이은주씨. 팬의 소개로 만난 이씨는 나이는 일곱 살 어리고 키(163㎝)는 한 뼘 더 컸다. “말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고 한다. 1998년 결혼해 딸을 하나 뒀다.
경마 대통령의 아내도 ‘내조의 여왕’으로 유명했다. 남편이 부상으로 꼼짝 못 할 땐 대소변을 받아냈고, 성적이 좋든 안 좋든 늘 미소로 응원했다. 박태종은 “내가 워낙 단순하게 살다 보니 복잡한 일, 궂은일은 아내가 도맡았다”고 했다. 그의 휴대폰에 아내는 ‘매니저’라고 돼 있다.
유혹을 피하는 기술
경마판은 시끄러운 곳이다. 거짓말과 뜬소문, 협박과 허풍, 환호와 야유, 승부와 돈에 얽힌 날것의 욕망과 좌절이 난무하는 곳. 기수도 조용히 말과의 호흡에만 집중하기 어렵다. 박태종은 경주로 밖에선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살기로 손꼽혔다. 희귀한 자기 절제였다.
-욕 많이 들었죠?
“경기 전후 이런저런 소리 나오죠. ‘똑바로 타라 OO야’ ‘넌 왜 내가 사면 못 뛰냐’…. 스트레스받지만 꾹 참습니다. 돈을 걸면 그럴 수밖에요. 20년 전만 해도 경마판에서 택시 기사가 택시를 담보로 잡혔다가 날렸다, 집 몇 채 날리고 자살했다 그런 일이 흔했어요.”
-압박감에 경기를 망친 적은요.
“경기 중엔 아무 소리 안 들려요. 딴생각 않고 최선을 다해 말을 몰 뿐이죠.”
-기수도 승부 조작 등 부정에 휘말리기 쉽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제 동기 30명 중 20명 이상이 그런 일로 면허가 취소됐어요. 외부인 만나서 말 상태가 좋으니 나쁘니, 누가 우승할 거다 혹은 꼴찌 할 것 같다, 그런 말 한마디가 심각한 정보 유출에 해당돼요.”
-말을 조심해야 하는군요.
“술자리가 문제죠. 모여서 술 마시면 꼭 제삼자가 끼잖아요. 몇 번 보면 친해지고 이런저런 말 섞게 되고. 저는 체질상 술도 안 받지만 실수할까 봐 술자리를 피했어요. 동창회도, 친척 경조사도 거의 못 갔고요.”
-스타 기수라 유혹도 컸을 텐데요.
“저를 보기 힘드니까 주로 입원해 있을 때 찾아오더군요. 조폭 같은 사람이 돈 봉투 들고 오기도 했고, 팬이라며 ‘당신 때문에 많이 잃었으니 한 번만 도와달라’고 매달리기도 하고요. 그런 일엔 틈을 보이면 안 돼요. 단칼에 ‘시간 낭비 말고 가시라’ 했죠.”
천직을 이어간다는 것
일자리는 갈수록 불안하다. 우리나라 근로자가 법정 정년(停年)까지 일하는 비율은 10% 안팎에 그친다. 스포츠 선수의 평균 은퇴 연령은 23.6세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경마에서도 60세 정년을 채우고 은퇴한 기수는 박태종 이전엔 김귀배 기수 한 명뿐이었다.
-롱런한 비결이 뭔가요.
“운동선수는 체력과 기본기를 한결같이 닦는 거지요. 무슨 일을 하든 성실한 자기 관리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요.”
-직장인들은 일보다 인간관계에 지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글쎄요, 전 성실하고 책임감 강하면 좋은 인간관계는 따라온다고 생각해요. 내 일에 집중하면 사람 사이 문제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거든요.”
-2016년 2000승 달성 후 양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큰 부상을 입었죠. 은퇴할 거란 예상을 깨고 10개월간 재활 치료한 뒤 복귀했습니다. 그 후 9년에 걸쳐 249승을 추가했지요.
“사실 그때 고민 많이 했습니다. 3개월이면 좋아져야 하는데 나이가 있어서인지 잘 낫지 않았어요. 다시 기승을 못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더라고요. 말 골라 타던 전성기는 이미 지났고요. 그때부턴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꾸준하게만 하자’ 생각했어요.”
-후배들이 많이 따른다고 들었습니다. 늘 제일 먼저 나오고 뒷정리까지 다 하신다고.
“찾아와 고민 상담을 하면 조언은 하지만…. 오히려 제가 후배들한테 배울 게 많아요. 요즘 기수들은 자세부터 나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고 기술적으로 훨씬 뛰어납니다.”
-경마 대통령이란 별명, 어땠습니까.
“아유, 너무 부담스럽죠. 대통령은 항상 모범을 보이고 양보하는 자리잖아요. 저는 경주할 땐 후배 봐주고 그런 것 없었어요. 승부는 승부니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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