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일 인천 양복점 ‘김주현바이각’에서 김주현(오른쪽에서 둘째) 대표가 가봉된 옷을 입은 이주은(왼쪽에서 둘째) 해병대 예비역 대위의 양복 핏을 살펴보고 있다. 이 대위는 군 복무 중이던 2019년 8월, 경기 김포 한강 하구에서 갈대 제거 작업을 하다 지뢰가 폭발해 왼발을 잃었다. 맨 오른쪽은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당시 포탄 파편을 맞고 전상군경 7급 판정을 받은 이한 해병대 예비역 병장.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이는 가슴과 등 근육이 크니까 이 부분을 좀 더 늘려야겠다.”
지난 10일 오후 1시 30분쯤 인천 미추홀구의 양복점 ‘김주현바이각’. 이 양복점 김주현(36) 대표가 가봉(假縫)을 마친 양복 상의를 이한(35) 해병대 예비역 병장에게 입히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병장은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당시 얼굴 좌우, 왼 무릎, 왼쪽 사타구니 등 4곳에 포탄 파편을 맞아 전상군경 7급 판정을 받은 국가 유공자다. 그의 왼쪽 허벅지에는 아직 빼내지 못한 파편 4조각이 남아 있다. 왼쪽 사타구니에 박힌 파편이 쪼개지면서 퍼진 것인데, 수술할 경우 1년간 걸을 수 없어 남겨둔 것이라고 한다. 이 병장의 양복 점검이 끝나자 김 대표는 이주은(33) 해병대 예비역 대위의 양복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대위 역시 국가 유공자다. ROTC로 복무하던 2019년 8월, 경기 김포 한강 하구에서 갈대 제거 작업을 하던 중 지뢰가 폭발해 왼발을 잃었다.
김 대표는 2022년 6월부터 이런 국가 유공자들을 위해 무료로 맞춤 양복을 지어 선물하고 있다. 2015년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로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 천안함 피격 사건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 예비역 해군 대령 등 지금까지 30여명에게 양복을 증정했다. 이 병장은 이날 피팅을 마치고는 “이렇게 마음을 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라며 “개인적으로 양복을 맞춰본 게 처음이라 더욱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 2022년 7월 김주현(가운데) 대표와 이철호(왼쪽) 재단사가 가봉된 양복을 입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의 핏을 보고 있다. 하 중사는 2015년 DMZ 수색 작전 중 북한 목함지뢰에 다리를 잃었다. /김주현바이각
김 대표도 해병대 출신이다. 2010년 1월 해병대 2사단에 입대한 그는 군 복무 첫해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전이 잇달아 터지는 것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병장이 됐을 때는 친하게 지내던 후임이 훈련 도중 포탄이 터져 사망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젊은 시절을 바쳐야 하는 국방의 의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기회가 되면 꼭 국가 유공자를 위한 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전역 후 양복점을 열겠다는 꿈을 키운 김 대표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 일대 양복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2년 넘게 도제식 교육을 받았고 2014년 10월 자신의 매장을 차렸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그는 가슴속에 품어온 약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한번은 아흔이 넘은 6·25 전쟁 참전 유공자 어르신께 양복을 전달해 드린 적이 있는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느냐’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며 “그런 분들을 보면 ‘이건 무료가 아니라 값을 예전에 이미 치르신 것’이란 말씀을 드리는데 그럴 때마다 이 일을 계속해 나가야겠다는 책임감이 커진다”고 했다. 그는 2024년 10월 인천보훈지청과 업무 협약을 맺어 매달 국가 유공자를 소개받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행사 취지에 공감한 지인 조헌주(36)씨도 완성된 양복을 입은 국가 유공자 사진을 찍어주는 식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그가 국가 유공자들에게 만들어주는 양복은 기성복과 무엇이 다를까. 김 대표는 “고령자가 대부분인 6·25 참전 유공자들은 등이 굽은 경우가 많아 체형을 감안해 제작하고, 다리가 불편한 이들은 입기 편하게 바지 옆에 지퍼를 달기도 한다”고 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더 발달한 반대쪽 다리 근육을 고려해 바지를 만들기도 한다. 양복 상의 목 부분엔 국가 유공자의 군번과 이름을 실로 새겨 넣는 것도 특징이다. 이처럼 작은 부분 하나까지 세심하게 공을 들이다 보니 국가 유공자의 맞춤 양복 한 벌을 완성하는 데 최소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김 대표의 목표는 얼마 남지 않은 6·25 참전 유공자들에게 최대한 양복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는 “6·25전쟁 참전 용사님들 덕분에 이런 삶을 누리고 있지만, 과연 내가 그때 태어났으면 그분들과 똑같이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며 “그분들의 위대한 헌신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보훈에 빠진 2030 “한국이 선진국 된 건 유공자 덕”
이처럼 국가 유공자나 상이군인을 정성껏 예우하는 청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시간을 내 보훈 활동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나온 어르신들의 희생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15일 오후 5시 서울 용산구의 ‘레거시 키친’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린다. 20~30대 청년층이 주축인 봉사 단체 ‘코리아 레거시(Korea Legacy)’가 81주년 광복절을 맞아 광복회 소속 독립운동가 후손 등 20명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다. 화덕 샌드위치 전문점 ‘파작’의 윤민섭(32) 셰프를 비롯한 봉사자 10여 명이 레거시 키친에 모여 소고기 미역국, 무궁화 화전(花煎) 등 10여 가지 메뉴를 준비한다. 메뉴에는 나라의 재탄생(미역국), 전국 8도의 화합(구절판), 광복(태극 문양 백설기, 무궁화 화전) 등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윤 셰프는 전(前) 대한민국 조리 부문 국가대표로, 지난해 12월부터 서울 도봉구 북카페에서 지역 취약 계층 아동·청소년 60~70명에게 매달 한 번씩 식사를 대접하는 ‘윤민섭 셰프의 월요식탁’을 진행하고 있다. 윤 셰프는 “주변을 보면 광복절이 정확히 며칠인지도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적지 않다”며 “이런 식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잊히는 게 개인적으로 많이 안타까웠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요리로 그분들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봉사에 참여하는 직장인 임정연(26)씨는 “중학교 시절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서 도슨트 봉사를 하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아픔을 겪은 분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며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되니 그런 분들에게 감사를 전할 계기가 마땅치 않았는데 ‘세대 간 연대’를 표방하는 코리아 레거시가 이런 뜻깊은 활동을 한다고 해 참가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단체는 노인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재미교포 출신 마이크 김(42·한국 이름 김진)씨가 2015년 만들었다. 빈곤 노인을 위해 직접 도시락을 만들거나 무료 급식소에서 배식 봉사를 하는 게 주요 활동으로, 2022년 6월 자체 주방인 레거시 키친을 연 뒤 지난달까지 6만6000개가 넘는 도시락을 전달했다. 무료 급식소에서 제공한 식사까지 합치면 약 30만명분에 이른다.
설립 10주년을 맞은 지난해에는 단체 이름에 담긴 의미를 돌아보며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단체 이름에 들어간 ‘레거시(유산)’에는 ‘우리 청년 세대가 물려받은 유산에 대해 감사히 생각하고 이 사회에 또 어떤 유산을 남길 수 있을지 고민해보자’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사도 이런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행사를 기획한 코리아 레거시 관계자는 “지금의 한국이 물려받은 유산 중 하나가 독립운동에서 비롯된 광복이라고 생각했다”며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 후손들께 식사를 대접함으로써 물려받은 유산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행사에 초청받은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2년째 식사에 초대받았다는 임민성(72) 광복회 용산구지회장은 “작년에도 초청받았는데 올해도 식사를 대접해준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라며 “젊은 직장인들이 바쁠 텐데도 주말에 시간을 내 이런 봉사를 해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임 지회장은 일제강점기 시절인 1943년 한국어와 한국사 연구·보급을 위한 석류회(石榴會)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고(故) 임재혁의 아들이다. 정부는 고인에게 202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2030은 국가 자부심 커”
장기 불황과 경제 침체가 이어지는 한국 사회에서 20~30대 청년층은 취업과 내집 마련, 결혼과 출산 등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왜 보훈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른 상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2030세대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고, 그 연장선에서 보훈 의식도 높아졌다고 분석한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지금의 청년 세대는 K팝으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크고,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위축되지 않는 당당하고 긍정적인 국가관을 가지고 있다”며 “여기에 북핵 도발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세대라는 점까지 더해져 보훈 의식도 높게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보수화된 경향을 보이는 청년 세대의 성향이 보훈 의식 향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에 대한 거부감이 크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진 2030 세대가 보훈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며 “젊은 남성의 경우 군 복무를 통해 국가 안보와 국방의 중요성을 직접 체감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보훈 의식이 더 커질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연령대보다 보훈 의식 높은 청년층
실제로 2030 청년층의 보훈 의식은 다른 연령대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튼, 주말’이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20대 이상 1937명을 대상으로 지난 3일부터 9일까지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가 유공자와 독립운동가, 군인 등이 사회적으로 존경과 예우를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 20~30대의 비율은 37.4%로, 전 연령대 평균(36.3%)보다 높았다.
국가 유공자 대상 봉사를 5년째 꾸준히 해오고 있는 청년 봉사 단체도 있다. 봉사 단체 ‘연봉인상’은 봉사자 80명과 함께 지난 6월 27일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과 월남전 참전 유공자 등이 사는 40가구를 찾아 직접 작성한 손편지와 생활용품을 전달했다. 이한준(32) 연봉인상 대표는 “그동안 식료품 배달 봉사를 다닐 때 국가 유공자분들이 집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웠다”며 “이분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2022년부터 매년 6월 호국보훈 봉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호국보훈 봉사에는 매년 수십 명이 참가하는데, 1분 만에 모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매년 봉사 활동을 늘린다’는 뜻의 연봉인상은 2021년 결성 이후 식료품 및 연탄 배달, 플로깅(plogging·걷거나 달리며 쓰레기 줍기), 산불 피해 복구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함께 여행을 떠나 해변에서 플로깅 봉사를 진행하는 등 평소에도 재밌는 봉사를 지향하다 보니 청년층 참가자가 다수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호국보훈 봉사는 참여 열기가 뜨겁기로 손꼽히는 활동이다.
연봉인상은 작년까지는 유공자들에게 ‘영웅인상(‘영웅’과 ‘연봉인상’을 합친 것)’ 문구가 적힌 모자나 ‘대한민국의 영웅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벽걸이 시계 등을 선물했다. 하지만 올해는 여름이 유독 무더울 것으로 예보돼 손 선풍기, 쿨토시, 쿨스카프, 선크림 같은 여름철 생활용품을 주로 전달했다고 한다. 이번 호국보훈 봉사에 참가한 직장인 김현선(31)씨는 “한 어르신께서 손 선풍기를 보시고는 ‘평소에 갖고 싶었던 건데 어디서 사는 건지 몰라 구하지 못했다’고 하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며 “우리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클릭 몇 번이면 되는 일도 어르신들에게는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이런 봉사를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매년 호국 보훈 봉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4년 새 53% 줄어든 6·25 참전 유공자
연봉인상 측은 고령의 국가 유공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늘어 봉사 대상이 갈수록 줄어든다고도 했다. 이한나(30) 연봉인상 부대표는 “작년까지는 6·25 참전 유공자들 대상으로만 봉사를 진행했는데, 그분들 수가 계속 줄어서 올해부터는 월남전 참전 용사 등으로 범위를 확대했다”며 “할 수 있을 때 한 분이라도 더 찾아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고 말했다. 국가보훈부가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지난 5월 기준 생존해 있는 6·25 참전 유공자는 2만5040명으로, 2022년(5만3222명)보다 절반 이상 감소했다. 생존자의 94%(2만3650명)가 90세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틸리언 프로’ 조사에서 국가 유공자 지원을 위해 확대해야 할 정책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의료비 지원 확대’라는 응답이 55.5%(복수응답)로 가장 많았다. 이어 보상금 확대(54.9%), 보훈 대상자 발굴 및 범위 확대(39.2%), 취업 기회 확대(25.3%), 돌봄 서비스(25.1%) 등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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