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요리사 ‘엘불리’ 페란 아드리아
“모방 않겠다” “반복 않겠다” 세계 최고 셰프의 평생 철칙
“모방 않겠다” “반복 않겠다” 세계 최고 셰프의 평생 철칙

페란 아드리아는 “엘불리는 분자 요리 레스토랑이 아니다”라며 “분자 요리는 엘불리에서 활용한 기술일 뿐”이라고 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페란 아드리아(Adria)는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요리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인근 한적한 바닷가에 있던 그의 레스토랑 ‘엘불리(El Bulli)’는 지난 2011년 식당으로서 영업을 종료할 때까지 미쉐린 최고 등급인 3스타를 14년 동안 유지했다. 세계에서 가장 예약하기 어려운 식당이었다. 매년 200만명 넘게 예약을 시도해 8000명만이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경쟁률 250대1. 요리사·음식기자·외식업자 등 전 세계 음식·외식 전문가 1000여 명이 투표로 매년 순위를 정하는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W50B)’에서 다섯 차례(2002년·2006~2009년) 1위에 올랐다.
미쉐린 3스타를 그보다 더 많이 받은 셰프는 수두룩하다. W50B 1위에 그만큼 많이 오른 셰프도 있다. 하지만 아드리아처럼 세계 미식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고 인정받는 요리사는 없다. ‘수프는 액체여야만 하나’ ‘아이스크림은 뜨거울 수 없을까’ ‘단 음식은 식사 끝에만 나와야 할까’…. 그는 레스토랑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통념을 의심하고 뒤엎었다. 그가 누구보다 앞서 활용한 분자 요리 테크닉은 미식계를 휩쓸었다.
2007년 아드리아는 독일 카셀에서 열리는 세계적 현대미술 축제 ‘도큐멘타(Documenta)’에 예술가로 초청받았다. 이는 요리를 현대 예술의 범주로 끌어올린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주아리는 ‘엘불리의 철학자’에서 “아드리아가 만든 요리는 웃음을 자아내고 지적 만족을 주는 형이상학적 체험이었다”고 예찬했다. 2011년에는 미국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스’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셰프’로 등장하는 등 대중적으로도 미식의 아이콘이 됐다.
그가 미식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창의력은 “모방하지 않는다(do not copy)”는 그의 철학에서 나왔다. 베끼지 않겠다는 대상은 다른 요리사뿐 아니라 자신의 요리도 포함됐다. 그리하여 그의 또 다른 철칙 “되풀이하지 않는다(do not repeat)”가 나왔다. 엘불리에서 아드리아는 오로지 자신이 창조한 요리만을 내놓았다. 아드리아가 25년간 창조한 요리는 1846개. 한 시즌 선보인 요리는 다시는 되풀이해 내놓지 않았다.
그는 매년 6개월만 식당을 운영했다. 6개월 치 이익을 포기한 대신 얻은 시간에 아시아·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를 누비며 새로운 식재료와 조리법, 영감을 찾았다. 혹시라도 과거 자신이 창조한 요리를 복제·반복하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그와 그의 조리팀이 연구·실험·개발한 모든 요리는 문서·사진·영상·그림으로 집요하게 기록하고 데이터베이스화했다.
지난 10월 아드리아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한식진흥원이 한식의 지속 가능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한 콘퍼런스에 참석한 아드리아는 “한식을 세계화하고 싶다면 먼저 한식을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며 “한국인은 한식을 얼마나 아느냐”는 화두를 던졌다.

엘불리의 기념비적 요리들. ‘멜론 캐비아’(2003년·위)는 분자 요리 주요 테크닉인 구체화가 적용된 대표 요리로 꼽힌다. ‘흰강낭콩 거품을 얹은 성게알’(1994년·가운데)은 세계 최초로 에스푸마(거품)를 사용한 요리. ‘다양한 식감의 채소 파나셰’(1994년)는 채소를 크림·거품·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식감으로 표현함으로써 기존 채소 요리와 전혀 다른 식감과 형태로 맛보게 했다. /월드50베스트
◇세계 최고 셰프가 된 접시닦이
아드리아는 1962년 바르셀로나 외곽에서 태어났다. 요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외식 업계에는 열여덟 살 때 접시닦이로 우연히 입문했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몰리는 ‘파티와 클럽의 섬’ 이비자에서 여름휴가를 보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접시를 닦다가 요리에 관심 갖게 됐나요.
“옆에서 지켜보니 흥미롭더라고요. 주방장이 기특해하며 ‘엘 프락티코’를 건네줬어요. 스페인에서 고전으로 여겨지는 요리책입니다. ‘매일 한 장씩 암기하라’고 명령했어요.”
-이비자에 갈 만큼 돈은 모았나요.
“필요 없었어요. 이비자에 있는 ‘클럽 칼라 레나’에 취직했어요. 4개월간 주방 보조로 일했죠.”
-해군 기지에서 취사병으로 복무했죠.
“당시 스페인 남성은 군 복무가 의무였어요. 참모부 식당에서 일했죠.”
-거기서 엘불리에서 일하던 페르미 푸이그를 만났습니다.
“푸이그는 ‘일머리가 있다’며 저를 마음에 들어 했어요. 여름휴가 나갈 때 엘불리에서 연수받도록 해줬어요. 1984년 제대 후 정식 취직했습니다.”
엘불리는 독일 출신 대체의학자 한스 쉴링이 차린 미니 골프장으로 시작했다. 쉴링이 은퇴하면서 매년 여름 가족 휴가를 보내던 스페인 카탈루냐 해안 마을 로세스(Roses)에 1961년 열었다. 1963년 바가 더해졌고, 1964년 식당으로 바뀌었다. 엘불리라는 상호는 쉴링이 기르던 프렌치 불독에서 따왔다.
아드리아가 입사했을 때 엘불리는 당시 유행하던 ‘누벨 퀴진(Nouvelle Cuisine)’으로 이미 꽤 이름난 레스토랑이었다. 누벨 퀴진은 ‘새로운 요리’라는 뜻으로 197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돼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복잡한 요리법을 정리해 재료가 지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새로운 프랑스식 요리법을 말한다. 그는 프랑스 누벨 퀴진 요리사들이 쓴 책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고, 유명한 요리들을 모방했다.

미국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스'에 등장한 페란 아드리아. /인터넷
◇“창조는 모방하지 않는 것”
아드리아가 자신만의 요리를 창조한 건 1987년부터다. 식당 총지배인 줄리 솔레르(Soler)가 “프랑스 최고 식당들을 순례하자”고 제안했다. 엘불리를 어떤 방향으로 성장시킬지 함께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프랑스 니스에 있는 호텔 네그레스코 ‘샹트클레르’ 레스토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요.
“자크 막시맹(Maximin)은 매우 창조적인 셰프였어요. ‘창의력이 뭐냐’고 묻자, 그가 ‘모방하지 않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은 제 요리 인생을 지배하는 화두가 됐습니다.”
아드리아는 모방과 복제 방식과 단절하기로 결심한다. 독창성은 엘불리의 기준이 됐다. 완전히 새로운 자신만의 요리 철학과 기법을 구축하겠다고 결심했다.
-분자 요리(Molecular Gastronomy)는 어떻게 활용하게 됐나요.
“독창적인 요리를 창조하려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과학은 지식입니다. 과학적 방법이 있기 때문에 지식이 있는 것입니다. 분자 요리는 요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물리·화학적 변화를 과학적 관점에서 탐구하고 이해하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조리 기법과 형태를 창조하는 과학이자 학문이자 현대 요리 스타일입니다.”
분자 요리는 1980년대 후반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자 니컬러스 커티(Kurti)와 프랑스 화학자 에르베 티스(This)가 처음 용어로 사용하면서 학문으로 정립됐다. 아드리아를 비롯한 혁신적인 요리사들이 에스푸마(espuma), 구체화(spherification·球體化), 젤화(gellification), 수비드(sous-vide) 등 분자 요리에서 개발된 테크닉을 요리에 적극 적용하면서 주목받았다.
아드리아는 분자 요리 기법을 활용해 1994년 ‘흰강낭콩 거품을 얹은 성게알’ 요리를 창조했다. 현대 미식에서 스푸마를 처음 사용한 기념비적인 요리다. 에스푸마는 거품을 뜻하는 스페인어. 흰강낭콩을 곱게 갈아서 레시틴·잔탄검 같은 안정제를 섞은 뒤 휘핑기에 넣어 뽑으면 거품처럼 나온다. 이걸 성게 껍데기 안에 담은 성게알 위에 얹었다.
구체화는 액체를 알긴산나트륨과 섞어 염화칼슘 용액에 떨어뜨리면 작은 공(sphere)이 되는 기술로, 이를 이용해 엘불리 대표 메뉴 중 하나인 ‘멜론 캐비아’(2003년)가 탄생했다.
아가(agar)나 젤라틴 같은 젤화제를 사용하면 액체를 고체로 굳힐 수 있다. 엘불리에서는 이 기술을 활용해 이탈리아 파르미자노 치즈로 스파게티 면을 만들었다. 액체 질소를 사용해 고기·채소 등의 재료를 순식간에 얼려서 아이스크림으로 조리해 냈다. 손님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식감의 음식을 차가운 아이스크림 형태로 맛보면서 자신의 기대와 고정관념이 깨지는 쾌감을 얻었다. 수비드는 고기나 생선을 양념과 함께 비닐에 진공 포장한 뒤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기계에서 천천히 저온 조리하는 기술. 육즙이 빠지지 않고 육질이 질겨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분자 요리를 활용해 개발한 대표 요리가 많지만, 엘불리가 곧 분자 요리는 아니라고.
“분자 요리는 엘불리에서 활용하는 기술 내지는 도구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엘불리 그 자체 혹은 전부가 절대 아닙니다.”
-알라카르트(단품 메뉴)를 없애고 30코스가 넘는 장대한 테이스팅 메뉴를 선보였습니다.
“모든 요소를 한데 모아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 같은 메뉴를 구성하고 싶었습니다.”
-요리를 접시가 아닌 스푼에 담아 낸 것도 엘불리가 처음이죠.
“주방에서 손님 입까지 향하는 여정 속에서 온도와 텍스처(식감)를 보조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었습니다.”
-어디서도 경험 못 할 창조적 메뉴와 서비스에도 오랫동안 손님이 뜸했고, 존폐를 걱정할 만큼 재정 상태가 심각했죠.
“손님들이 좋아하는 건 둘째고, 창의력이 우선이었으니까요. 우리는 요리 맛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고객의 머리털을 곤두서게 하는가, 마술처럼 매력적인가만이 궁금했습니다.”
-그럼에도 1년 6개월을 문 닫고, 점심 영업마저 없앴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려면 창조적 작업에 몰두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힘든 시절을 어떻게 버텼나요.
“외부 기업 컨설팅, 강연, 요리책 발간 등으로 견뎠습니다.”
미쉐린 가이드가 1997년 마침내 별 셋을 선사했다. 전 세계 미식가와 요리사가 몰려들었다. W50B에서 세계 최고의 식당으로 2002년 처음 선정됐고,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스페인 카탈루냐 바닷가 마을 로세스에 있는 엘불리 레스토랑 건물. 2023년 엘불리의 역사와 성과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엘불리재단
◇“한식 세계화? 먼저 깊이 알아라”
전성기를 누리던 2010년, 아드리아는 돌연 “레스토랑으로서 엘불리 영업을 종료할 것”이라는 충격 발표를 했다. 폐업 선언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뉴욕타임스·파이낸셜타임스 등 세계 주요 언론은 1면 주요 기사로 다뤘다.
엘불리는 2011년 7월 30일 영업을 정식 종료했다. 이후 아드리아는 25년간 엘불리에서 이룬 성과와 역사를 정리해 데이터화하는 ‘엘불리 재단’을 설립하고, 레스토랑 건물은 ‘엘불리1846’ 박물관으로 바꿔 2023년 개관했다. 그는 “엘불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변화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상에 있을 때 폐업한 이유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창조적 레벨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상에 있는 요리사들은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느낀다. 미쉐린 스타를 잃는단 불안감에 자살한 요리사도 많다. 엘불리가 매년 50만유로(약 9억원)에 달하는 적자로 심각한 재정적 위험에 빠져 있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엘불리와 같은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은 값비싼 식사비만큼 재료와 인력 등 운영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높은 수익을 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상당한 규모의 적자를 감수하며 운영하기도 한다.
-지난 14년 동안 무엇을 했나요.
“요리를 창조하는 대신 창조하는 사람들을 창조했습니다. ‘마드리드 컬리너리 캠퍼스(Madrid Culinary Campus·MACC)’라는 요리 교육 기관 설립과 운영에 참여해 요리사들을 길러내고 있습니다. 재단을 설립해 레스토랑 엘불리에서 우리가 뭘 했는지 정리하고 있어요. 재단은 미식 발전을 위한 창조 센터이자 싱크탱크이기도 합니다. 인류 요리 역사를 총망라하는 백과사전 ‘불리피디아(Bullipedia)’도 편찬하고 있어요. 총 50권이 목표인데 현재까지 23권을 펴냈습니다.”
-MACC는 기존 요리학교와 어떻게 다른가요.
“스페인 식당은 대부분 5년 이상 버티지 못합니다. 요리사들에게 비즈니스 개념은 조리 기술만큼 중요합니다. 하지만 요리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지요. MACC는 경영을 필수 교육 과정으로 포함시켰습니다. 한식의 미래와 세계화도 글로벌 인재 양성과 이를 위한 교육이 핵심일 겁니다.”
-한식을 더 세계화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제가 되묻겠습니다. 김치가 무엇입니까? 전채인가요, 소스인가요?”
-밥과 함께 먹는 반찬입니다.
“한국에 와서 ‘김치는 왜 빨간 고춧가루만 사용하느냐’고 여러 사람에게 질문했어요. ‘항상 그렇게 해왔다’고 하더군요. 그거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고추가 언제 한국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시작은 아메리카 대륙이었습니다. 그러니 고추의 역사와 전래를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고추가 도입되기 전 김치는 빨갛지 않았겠죠? 그렇다면 맵지도 않았나요? 매웠다면 다른 무엇이 들어갔나요? 스페인에는 ‘뭔가를 이해하려면 그 기원부터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식에 대해 한국인인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날카로운 질문이 송곳처럼 가슴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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