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난 이재는 "일정이 많아져 요새는 거의 비행기에서 살다시피 한다"면서도 "어디에 있든 악상이 떠오르면 곧장 핸드폰을 꺼내 목소리로 멜로디를 녹음한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곡 '골든'도 그렇게 탄생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거론하면 누군가는 “이제 지겹다”는 말을 꺼낼지 모른다. 유행의 변화 주기가 가장 빠른 대중문화, 그러나 현재 진행형인 세계적 열기를 접하면 놀랄 것이다. 지난해 6월 개봉한 이 애니메이션의 대표 주제곡 ‘골든’(Golden)은 현재 미국 빌보드 차트 ‘핫100’에서 13위에 올라 있다.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도 41위를 기록 중이다. 세계 양대 가요 차트 정상을 석권한 뒤에도 47주 연속 100위권 진입이라는 전무후무할 K팝의 역사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 흥행의 이유가 뭘까요?
“평소에도 인기 차트를 자주 봐요. 제가 느낀 건 희망적인 노래가 별로 없다는 거예요. 내가 최고라고 으스대거나 연인들끼리 하는 사랑 얘기는 많지만요. 지금 세상이 워낙 혼란스럽잖아요. 상처를 다독이고 미래를 긍정하는 곡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가수 겸 작곡가 이재(본명 김은재·35)가 말했다. ‘골든’의 작사·작곡·가창을 포함한 ‘케데헌’ 열풍의 주역.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재생된 K팝 가수로 조사됐다. 음악 데이터 집계 매체 루미네이트에 따르면, 그의 음원이 세상에 울려 퍼진 횟수는 21억번. 목소리는 쌓일수록 단단해졌다. 이재는 지난 20일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 기조 연설자로도 무대에 섰다. “우리는 너무 서두릅니다. 속도는 압박을 낳고 압박은 패닉이 되죠. 적응에도 성장에도, 스스로의 발견에도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 위대한 노래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성실하니까, 넌 뭐가 돼도 될 거야”
올해 1월 미국 골든글러브 최우수 주제가상, 2월 K팝 최초의 그래미 트로피에 이어, 3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골든’은 찬란했다. 이재는 대한제국 황실 대례복을 본떠 지은 옷을 입고 국악과 사물놀이 등 한국적 요소를 총동원해 아카데미 수상 무대를 꾸몄다. “판소리가 들리는 순간 리허설을 했는데도 울컥해 눈물이 났다”고 했다. 객석에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 할리우드 스타들이 ‘골든’에 맞춰 응원봉을 흔드는 장면은 ‘K’의 현재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시상식 직후 이재는 LA 한인타운에 있는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왜 설렁탕을 드셨어요?
“몇 달 동안 쉴 새 없이 달렸잖아요. 긴 쇼의 대미를 뜨끈한 한국 음식으로 마무리하고 싶었어요. 제 소울푸드예요.”
오래 끓어야 참맛을 낸다면, 인생도 그러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생후 6개월 뒤 부모를 따라 미국 뉴저지로 건너갔다.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썼지만, 사실 주(主)언어는 음악이었다. “엄마가 늘 차에서 한국 노래를 틀어주셨어요. 김건모·쿨·클론…. 특히 H.O.T.를 좋아했어요. 네 살 무렵 피아노 배우러 가는 길이었는데, 제가 ‘캔디’를 또박또박 부르니까 삼촌이 ‘얘 가수 시켜도 되겠다’고 하셨어요.”
–꿈이 시작된 순간이군요.
“엄마랑 거의 매일 노래방 가서 연습했어요. 당시에는 미국에 아시안 여자 가수가 없었어요. 이상하네? 그때 한국 가수 보아를 알게 됐어요.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는데 너무 멋있었어요. 열한 살 때 그분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 연습생으로 지원했죠.”
–연습생 생활은 어땠나요?
“아이돌은 노래, 춤, 외모 모두 출중해야 하잖아요. 하나도 놓치면 안 돼요. 연습생 중에 심리적으로 불안한 애들이 많아요. 사춘기에다 살 많이 찔 시기인데, 압박감이 너무 컸어요. 제가 완벽주의가 좀 있어요. 아, 왜 안 되지?”
12년 동안 제일 먼저 출근해 제일 늦게 연습실을 나섰다. 당시 함께 연습했던 ‘소녀시대’ 멤버 유리가 “너는 뭐가 되든 될 것 같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돌은 될 수 없었다. 체격이 크고 목소리가 낮고 허스키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이재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한 SM 윤희준 신인개발센터장은 “성실함을 의인화하면 이재”라며 “너는 뭘 해도 성공할 거라고 얘기해 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날 비가 내렸다. “너무 멍해서 눈물도 안 났다”고 했다. 한 달간 방 안에만 있었다. 2015년, 스물네 살이었다.
–상심이 컸겠습니다.
“제 목소리를 원망하고, 아이돌을 원망했어요. 그 좋아하던 K팝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어요.”
◇연습에는 실패가 없다
찬란한 K, 그러나 아이돌이 되는 과정은 혹독하다. 이재는 “연습생들에게 상담이나 정서적인 지원이 조금 더 잘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리고 10년 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K팝 스타가 됐다. 이 인생의 아이러니를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로 이재는 담담히 정리했다. “영어에 ‘Rejection is Redirection’이라는 말이 있어요. 거절당해도 방향만 바꾸면 계속 갈 수 있다는 거예요. 두 살 터울 친오빠가 옆에서 큰 힘이 돼줬어요. 가수는 못 돼도, 노래는 만들 수 있잖아.” 한국은 좌절에 취약한 나라다. 이탈은 실패로 규정된다. 실패가 도전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 찬란한 K, 그러나 아이돌이 되는 과정은 혹독하다. 이재는 "연습생들에게 상담이나 정서적인 지원이 조금 더 잘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힘들어하는 청년이 많습니다.
“한국은 문화적으로 남의 시선에 굉장히 민감한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크게 좌절하는 것 같아요. 남은 남이에요. 남이 내 인생 대신 살아주나요? 성공과 실패는 자매예요. 한 핏줄이죠. 그걸 인정하고, 그저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래야 미련이 없어요.”
음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무대 위가 아니라 뒤를 택했다. 유튜브로 독학하며 작곡을 시작했다. “매일 낮 12시부터 밤 11시까지 집 근처 카페에서 비트를 만들었어요.” 드라마 주제곡 위주로 작업하다 1년 뒤 우연히 작곡가 신사동호랭이를 만나게 됐다. “제가 만든 비트를 들어보시더니 본인 스튜디오에 초대해주셨죠.” 그렇게 얼떨결에 걸그룹 EXID 앨범 제작에 참여하며 작곡가로 깜짝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그의 노래를 듣게 된 한국계 미국인 작곡가 앤드류 최의 주선으로 SM엔터테인먼트 작곡 캠프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재는 훗날 SM 걸그룹 레드벨벳이 불러 큰 인기를 끈 ‘사이코’를 만들어냈다.
–귀인이 많았네요.
“마음 굳게 먹고 일부러 사람들 많은 데를 찾아다녔어요. 제가 좀 소심하거든요. 노래 들려주고, 교회 모임도 나가고, 앤드류 최도 그렇게 만나게 된 거예요. 뭘 이루려면 적극적이어야 하는 건 확실해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나는 왜 안 되지?’ 고민하는 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성공 철학인가요?
“열심히 해라. 성실해라. 고생해야 얻는 게 있다. 할아버지의 일관된 가르침이에요. 100% 몰입해라. 부르는 사람이 빠져들어야 듣는 사람도 그 감정을 믿잖아요. 연기랑 똑같은 것 같아요.”
◇“말이 씨가 된다, 좋은 말 뿌려야”
이재는 원로 영화배우 신영균(98)씨의 외손녀다. 당대를 주름잡은 은막의 스타이자 500억원 상당의 사재를 기부한 연예계 대표 재력가.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해서 그 자리에 오르셨는지 잘 알고 있다”며 “지금의 저를 있게 한 영감(靈感)이 됐다”고 했다. 그러나 수저론(論)을 들이대며 이재의 성공을 평가절하하는 삐딱한 시선도 존재한다. 집안이 풍족하니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

▲ 지난 20일 열린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개막식에서 기조 연설 중인 이재. "속도가 빠르다고 올바른 방향으로 아니다"라며 "진정한 성장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장경식 기자
–‘금수저’라고들 합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독립했어요. 스스로 책임져야 했죠. 엄마랑 할아버지가 그런 부분에서 철저하세요. 뉴욕에 있는 일식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했어요. 2~3년 정도 하다가 코로나 사태가 터져서 일자리를 잃었죠. 다행히 정부 재난지원금 덕에 작곡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돌 연습생과 학업(뉴욕대)을 병행한 이유도 아이돌 생활이 오래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실적인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밝은 노래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레드벨벳 ‘사이코’라든지 에스파 ‘아마겟돈’처럼 그가 만든 노래는 대개 비애와 격정으로 가득했다. 그의 모친은 그런 딸에게 늘 “말이 씨가 된다”고 말해줬다. “계속 된다 된다 해야 진짜로 되는 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말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일이 안 풀릴 때마다 ‘할 수 있다’면서 스스로를 설득했거든요. 어느 정도 운명이라는 걸 믿어요. 하지만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골든’ 부르고 나서 정말 노래처럼 잘됐잖아요.”
–‘골든’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치과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갑자기 번쩍 떠올랐어요. ‘Up, up, up with our voices~ 영원히 깨질 수 없는~ Gonna be gonna be golden~’ 이 부분요. 근데 최종 완성에는 4개월이 걸렸어요. 고치고 또 고치고, 뭐든 좋은 건 다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 결과가 늦어진다고 해도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곡은 주로 어떻게 쓰세요?
“영감을 찾아다니는 편이에요. 저한테는 ‘틱톡’이 큰 도움이 돼요. 거기서 사람들이 자기 개인적인 얘기를 되게 많이 풀어놓거든요. 에스파 노래 ‘드라마’도 거기서 밈(meme) 영상 보고 착안한 거예요. 웬 여장 남자가 독특한 포즈와 톤으로 “Am I the drama?”(내가 문제라고?)라고 말하는 영상이요. 해로운 소셜미디어라고 하지만, 저는 아이디어 얻으려고 봅니다.”
◇골든 이후의 골든
다음 달 ‘케데헌’은 탄생 1주년을 맞는다. 단순 만화영화를 넘어 프랜차이즈형 문화 상품으로 확장하면서 영화 속 장면을 실제 라이브 무대로 구현해 전 세계를 도는 ‘월드 투어 공연’도 지난 14일 공식화됐다. 여전히 강력한 케데헌노믹스, 이로 인해 이재에게 쏟아지는 세속적 관심이 있다. 곧 정산될 천문학적 규모의 저작권료. 미국의 경우 음원 발표 이후 대략 1년 뒤부터 금액이 지급되므로, 곧 초대형 돈방석에 앉게 된다는 예측 때문이다.

▲ 첫 솔로곡 'In Another World'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이재의 어릴적 사진. 돌고 돌아 결국 가수의 꿈을 이뤘다.

▲ 첫 솔로곡 'In Another World'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이재의 어릴적 사진. 돌고 돌아 결국 가수의 꿈을 이뤘다.
–돈 많이 벌면 뭘 하실 건가요?
“할아버지 스텝(발걸음)을 따라가야죠. 기부가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어린이를 위해서든 음악 산업을 위해서든요. 너무 많은 돈은 불필요한 문제를 낳는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케데헌’ 시즌2 제작이 확정됐다. 노래를 기반으로 한 뮤지컬 영화로, 한국적 스타일을 최대한 살리는 기본 콘셉트는 원작과 동일하다. ‘K’로 뜨고 나면 범용화 전략을 구사해 미국식 색채로 희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오히려 ‘K’를 강조하는 것이다. 제작진은 “한국다움(Koreanness)은 우리 영화의 영혼”이라며 “스토리에 어울리기만 하면 트로트를 삽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다움’은 뭘까요?
“섬세함, 그리고 효율성이라고 생각해요. 그 강점과 자부심을 계속 밀고 나가면 좋겠어요. K팝에서 K를 빼면 그냥 팝이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저는 한국어가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게는 분명 우리만의 색이 있잖아요. 그걸 지켜가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캐스팅되면 트로트도 부를 건가요?
“물론이죠. 이미 트로트 곡 만들어서 매기 강 감독님한테 들려준 적도 있는걸요.” 이재는 곧장 장윤정의 ‘어머나’와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흥얼거렸다. 산전수전 겪어본 목소리, 그는 꺾기에 능숙했다.
올라가면 내려가야 한다. “영원히 깨질 수 없는”을 아무리 외친들, 어떤 것도 영원할 수는 없다. 그는 ‘케데헌 이후’라는 숙제 앞에 섰다. 지난해 10월 첫 솔로곡 ‘In Another World’를 발표했고, 지난 2월에는 후속곡 ‘Time after time’을 내놨다. “짧은 기간에 많은 주목을 받게 되니 솔직히 무섭기도 했어요. 이건 열한 살 이재가 꿈꾸던 모든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저는 무대 뒤가 익숙해졌고 제가 아티스트가 될 운명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여정은 아직 진행 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만의 노래에 생명을 불어넣어 함께 웃고 춤추고 눈물 흘릴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부담은 없으세요?
“나이를 먹으니까 조금은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마음가짐이 건강해졌어요. 저는 아직도 제가 K팝 아티스트라는 생각을 안 해요.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제가 아니라 ‘케데헌’ 주인공 캐릭터 루미거든요. 앞으로 더 노력해야죠. 이재의 노래는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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