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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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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4-10 14:09

김해영/(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바이올렛 가의 그린 썸(Green Thumb), 안젤리카가 돌아왔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초콜릿 상자를 골목 식구들에게 두루 나누어주곤 모습을 감춰버린 그녀가 어디선가 겨울을 나고 봄비처럼 돌아왔다. 눈수술을 한 후 자꾸 뒤뚱거린다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그녀가 내미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수잔은 얼마나 부끄러웠던가.

그녀의 정원은 꽃달력이었다. 이른 봄 크로커스, 스노우드롭이 나즈막이 왔다 가면 동백과 목련에 향그런 웃음이 대롱이다 처연히 졌다. 그 허전한 틈을 담장의 넝쿨장미가 윤기나는 잎새와 새초롬한 봉오리들로 채웠다. 곧 소리 소문없이 돋아난 별꽃들이 계단식 정원석을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 내렸다. 여름 햇살이 성큼 다가와 실타래처럼 엉킨 넝쿨과 덩굴 속에서 용케 호박과 강낭콩을 노릿하게 구워냈다. 현관 양 옆에 팜트리 두 그루가 근엄하게 경계를 서고 그 아래 분홍, 자주, 크림색의 칸나가 시녀처럼 꽃초롱을 들고 서있었다. 

계절을 다투어 피고 지던 꽃과 열매들이 향기와 풍요로움으로 사람들을 매혹했다. 공연히 개 산책 핑계로 골목을 빙 돌아 나가는 이도 생기고, 연고 없는 자동차들이 들어와 꽃내음에 지독한 매연을 첨벙 빠뜨려 놓고 달아나기도 했다. 그 탓에 이 집 저 집 정원에 개똥무더기가 쌓였다. 물색없는 운전자들이 아무 드라이브웨이에나 들어와 차를 돌려 나갔다. 그러자 이웃들은 드라이브웨이에 장애물을 놓아 낯선 차들의 침범을 막았다. 그녀도 예외없이 드라이브웨이에 오크 배럴 한 쌍을 세워 두었다. 어스름 저녁이면 절로 켜지는 데코레이션 라이트 덕분에 제법 얼큰한 선술집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녀의 정원은 바이올렛 가의 명소이자 천연방향제였다.       

그녀가 없는 새 까마귀들이 그녀의 정원 잔디를 화투짝처럼 뒤집어 놓았다. 팜트리마저 곧추 세웠던 고개를 떨구고 풀이 죽어있다. 그녀의 부재(不在)가 남긴 황폐가 수잔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빨간 자동차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 간 걸 보았다. 강아지가 그걸 보더니 마구 달려갔다. 그 힘에 끌려 그녀의 집에 이르렀다. 그녀처럼 머리가 허연 아들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리는 그녀에게 “하이, 엔젤리카, 그동안 어디 갔었어요?” 안부를 묻자 “신장이 나빠져 수술 받고 아들네서 쉬다 와요. 스윗하트, 잘 지냈어?” 그녀의 눈길이 수잔을 스쳐 강아지에게 꽂혔다. “이젠 괜찮아요? 모치가 항상 당신 집 앞에서 멈추곤 했어요.” “나도 모치가 무척 그리웠어.” 그녀가 몸을 기울여 모치의 뽀뽀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아들과 함께 그녀를 부축해서 현관으로 갔다. 앞장 선 모치의 걸음이 탭댄스를 추듯 발랄했다. 그녀의 볼에 복숭아빛이 감돌았다. 

“여보, 안젤리카 할머니가 돌아왔어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에게 소리쳤다. ”안젤리카가 누군데?” ”아참, 모치 예뻐하는 이탈리안 할머니.” “그 빨간 렉서스도 돌아왔어?” ”네, 아들이 몰고 왔던데.” “그럼 안 팔고 아들 주려나?” 중얼거리는 남편에게 “아니, 이웃이 큰 수술 받고 겨우 살아왔는데, 기껏 자동차 타령을 하고 있어요? 인정머리 없이.” 수잔이 날선 목소리로 남편을 힐난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그 할머니가 대수술을 받았는지, 크루즈 여행하고 온 건지. 늘 서있던 빨간 렉서스가 안 보이는구나고만 생각했지. 당신 맨날 빨간 차, 렉서스 노래 불렀잖아. 늙은 각시 소원 하나 들어 주려고 열중했던 게 그리 잘못이야?” 남편 얼굴이 붉다 못해 대추빛이다. “차가 없어 산에도 못 가고, 시니어 체조 교실에도 못 간다며... .” 힘없이 떨군 남편의 정수리가 휑했다. 콧날이 매콤해졌다. “젊었을 적 얘기지. 누가 지금 사달랬나. 첫애 입덧 때 갈비 먹고 싶댔더니 만삭 때 사주며 왜 안 먹느냐고 다그치더니. 뒷북치는 건 여전하시지.” 남편 손에 두유 한 팩을 쥐어주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염색약을 꺼내놓고 거울을 마주했다. 머릿속을 들춰보니 대파뿌리처럼 흰 머리가 뭉텅 올라와있다. 얼굴을 요지조리 살펴 보았다. 눈밑이 검검스레 꺼져있고 오른쪽 볼에 떡하니 페니만한 검버섯이 피어 올랐다. 때밀이수건에 비누를 묻혀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베이킹소다를 듬뿍 묻혀 박박 닦았다. 볼이 얼얼해지도록 닦았지만 검버섯은 더 깊고 침침해졌다. 남편만 탓할 일이 아닌 걸. 자신도 검은 속내를 품은 속물이었다. 수건을 내던졌다.   

수잔의 집은 골짜기를 면하고 있어 늘 습하고 냉했다. 정남향에 토질이 좋아 뭐든지 풍성하게 키워내고, 면적도 다른 집  곱절이어서 듀플렉스를 지을 수 있는 그녀의 대지를 탐낸 지 꽤 되었다. 몇 해 전 옆집 할머니가 갑작스레 양로원으로 떠났다. 그러자 채 한 달이 안 되어 자손들이 감정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본가를 홀딱 팔아치웠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언젠가 그녀도 집을 건사할 수 없을 때가 오겠지. 그럼 그 집을 헐값(?)에 사야지. 텃밭자리에 별채를 짓고 출가한 딸 식구를 불러들여 살면 참 좋겠다는 희망을 품은 게. 그리고 그 집 앞을 오가면서 수잔의 희망은 간절한 소망으로 단단해져 갔다. 

소망이 간절해지면 눈 먼 욕심이 된다. 욕심은 음침한 곳에서 빠르게 촉수를 뻗어간다. 하얀 솜털들이 억만 개로 증식하면서 흑화되고 마침내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묵은 밥솥에 남아있는 밥덩이가 검은곰팡이를 피우며 부패하는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수잔의 탐욕이 검은 균사(菌絲)들을 길러 내면을 잠식하고 그예 겉으로 발현한 게 이 검버섯이 아닐까. 자신의 내면에 자라고 있는 검은곰팡이의 실체를 마주했다.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남편의 소망은 수잔의 것에 비해 소소하고 훨씬 순수하기까지 했다. 염색약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내면의 벽이 가장과 위선의 검댕이로 뒤덮이는 걸 방관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씻어내야만 했다.   

봄이 와도 그녀의 정원은 적막했다. 오두막이 솟은 포치의, 그녀가 늘 앉아있던  의자가 비어있었다. 그녀가 덮고있던 낡은 담요 홀로 알리섬(Alyssum)의 향기와 라벨라(Labella)의 보랏빛을 고요히 지켜봤다. 

동백과 목련이 피면서 수잔의 걸음이 바빠졌다. 담벼락에 무참히 진 낙화들을 거두어 수잔 집에 있는 고무나무 잎새에 얹었다. 무구(無垢)한 고무나무가 수잔의 업을 힘겹게 지고 있는 셈이었다. 동백, 목련이 다 져도 그녀의 집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시멘트 틈을 비집고 팬지가 얼굴을 내밀었다. 철쭉꽃만하던 게 분꽃만큼 잘아졌다. 호미를 들고 가서 화단에 옮겨 심었다. 혈색이 돌더니 콘플라워만큼 커졌다. 재미졌다. 

여보, 잔디흙 좀 사다줘요. 잔디씨도 좀... 치킨 메뉴얼도 좀... . 남편에 대한 요구가 잦아졌다. 왜 남의 정원에 그리 진심이냐는 남편의 질문에 죄닦음하는 거니 군소리 말라고 윽박질렀다. 잔디가 고르게 초록빛을 띠고 꽃들이 하롱하롱 나부낄 즈음 그녀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그녀가 돌아왔다.

이제 호박씨, 독하게 매운 이탈리안 땡초씨와 오이씨가 구획별로 뿌려질 테고, 또 모치는 신나서 그녀의 텃밭을 헤집고 다니겠지. 그러면 수잔이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그녀가 흙손을 털며 모치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잔주름 짓겠지. 

늦봄의 볕이 수잔의 등을 다사롭게 감싸안았다. 

봄, 여름을 거쳐 가을이 될 때까지 수잔은 그녀의 정원에 머물렀다. 수잔의 얼굴에 기미, 주근깨가 은하수처럼 박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잔의 마음밭에 그윽한 향내가 머물고 꽃달력이 차곡차곡 넘어가고 있으므로, 그녀의 정원처럼.       

                                                   20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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