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세계 1위 의류OEM 일군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세계 1위 의류OEM 일군
김웅기 글로벌세아 회장
갤러리 가장 깊숙한 곳에 서예 작품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김웅기(73)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 유묵(遺墨)”이라고 했다. 일본 소장자가 지난해 12월 경매에 내놓은 이 유묵은 김 회장이 19억5000만원에 낙찰받아 1세기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묵 앞에 앉은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은 “안 의사를 정신적 지주로 모시고, 세계적 기업을 만들겠다”고 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龍乕之雄勢豈作蚓猫之熊)’, 해석하면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모습이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의 모습에 비하겠는가’입니다. 해외에서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애국심을 갖지 않을 수 없어요. 안중근 의사를 글로벌세아그룹의 정신적 지주로 모시고, ‘용과 호랑이의 기세로 세계 속에 우뚝 서는 기업’의 표상으로 삼으려 합니다.”
김 회장은 의류업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35세에 퇴사한 그는 1986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글로벌세아그룹의 모태인 세아교역(현 세아상역)을 창업해 세계 최대 규모 의류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기업으로 키워냈다. 2007년부터 쌍용건설·나산·태림페이퍼·STX 중공업 플랜트 사업부 등을 잇달아 인수·합병(M&A)했고, 지난해엔 자산 규모 6조원을 돌파하며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플라잉 맨(Flying Man)’이라는 별명처럼 일흔이 넘은 지금도 세계 현장을 누비는 그가 출장길 기내에서 틈틈이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한 글을 모아 경영 에세이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쌤앤파커스)를 펴냈다. 서울 강남구 S2A 갤러리에서 만난 김 회장은 “기업가는 국가 발전을 위해 회사 매출과 영업이익이 오르도록 혼신의 힘을 바쳐 노력해야 한다”며 “그렇게 경영하지 않는 기업가는 죄인”이라고 말했다.
◇김환기 ‘우주’ 한국 미술 최고가 낙찰
OEM·ODM(제조업자개발생산) 위주로 사업해온 김 회장이 대중에게 알려진 건 김환기 작품 ‘우주’(Universe 5-IV-71 #200)를 낙찰받으면서다.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32억원이라는 한국 미술품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김환기가 타계 3년 전인 1971년 완성한 푸른색 대형 전면 점화로, 유일한 두폭화다.
-왜 ‘우주’에 끌렸나요?
“김환기 선생의 작품을 좋아해 몇 점 소장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대표적인 수작이라 어떻게든 환수해 국내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치열한 경합 끝에 낙찰받자 ‘이제 해외로 내보내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부터 들었습니다.”
-2022년에야 작품을 일반에 공개했습니다.
“어느 날 ‘국민 화가의 수작을 혼자 감상하며 장롱 속 금송아지로 만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갤러리 S2A를 만들었지요. 약 2개월 동안 무료로 전시했고 3만5000여 명이 감상했습니다.”
-미국 미술 잡지 ‘아트뉴스’ 선정 세계 200대 미술품 컬렉터에도 포함됐는데요.
“작품 수를 세보지는 않았지만 제법 되리라 생각합니다(웃음). 좋은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감을 느껴요. 아무래도 국내 화가들 작품이 중심이고 단색화가 많습니다. 처음 구입한 작품은 구사마 야요이의 ‘초록 호박’과 김창렬·이우환·정상화 선생의 단색화였습니다.”
-저 안중근 의사 유묵에도 사연이 있나요.
“경매 현장에 있던 갤러리 임원에게 ‘살펴보시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회의 중 밖으로 나와 인터넷에서 유묵을 확대해 봤어요. 온몸에 전율이 일더군요.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썼다곤 믿기 어려울 만큼 시원하고 당당한 필치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한민국 영웅의 정신이 깃든 유묵이 110년 만에 돌아온다니, 천만금이 들어도 아깝지 않았어요. 조금 작게 영인본을 만들어 제 방과 모든 그룹 계열사 사장실에 걸어두게 했습니다.”
◇아내가 반대했다면? “사업은 내 운명”
충북 보은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고교 시절 재봉틀을 배워서 옷을 만들고 고쳐 입었다”고 책에서 밝혔다.
-어렸을 때부터 옷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나 봅니다.
“재봉틀 돌리는 게 재미있어서 자투리 천을 가지고 독학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자주 바늘귀를 꿰어 달라거나 북실을 감아달라 하셔서 자연스럽게 섬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요. 대학에서는 섬유공학을 전공했습니다.”
-졸업하고 주택건축업에 뛰어들었다고요?
“어릴 때 적산가옥에 살면서 돼지 축사며 닭장이며 많이 지었어요. 군 제대 후 직장을 알아보는데, 누님이 집을 산다고 하길래 ‘내가 지어주겠다’ 했죠. 해보니 너무 쉽더군요. 50평 정도 되는 땅을 사서 4채를 더 지어 팔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시행과 건설을 다 한 거죠. 계속했더라면 세아의 모기업이 건설회사가 됐을 거예요(웃음).”
-그만두고 충남방적 계열사에 취업한 이유는 뭔가요.
“겨울에 바람 불고 눈 오고, 여름에 모기장 쳐놓고 자재를 지키는 게 여간 고되지 않더군요. 대졸자들은 좋은 회사 취직하는데 난 뭔가 싶었죠. 그래서 손 떼고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일하면서도 제 목표는 전문 경영인이 되는 거였어요.”
-창업을 유일하게 지지한 사람이 아내라고요?
“아내가 반대했다면 아마 사업을 포기하고 다른 회사에 취업했을 거예요. 하지만 사업은 제 운명이니 결국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우연히 갤러리에서 만난 아내 김수남 여사는 “가진 게 워낙 없었다. 망해도 잃을 게 없어서 허락했다”며 웃었다.
◇최고 위기와 보람 동시에 느낀 코로나
김 회장이 세아상역을 창업한 1986년은 한국 섬유 산업이 절정을 지날 즈음이다. 1993년 중국 칭다오 공장, 1995년 사이판 공장 등 해외 진출도 늦었다. 하지만 세아상역은 창업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다. 1998년 과테말라부터 중미(中美) 진출을 계기로 글로벌 의류 업체로 성장했다.
-남들이 철수할 때 해외로 진출한 이유는 뭔가요.
“인건비가 오른다고 무조건 철수할 게 아니라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해요. 자동화 설비를 강화해 같은 인건비로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면 됩니다. 실패 이유를 걷어내고 성공 모델을 이식하려고 했어요. 물론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원리는 간단합니다.”
-치안이 불안한 중미로 진출했는데.
“중미 6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들입니다. 미국 포함 7국에서 생산한 원사로 원단과 의류를 생산·수출하면 관세가 부과되지 않아요. 적게는 17%, 많게는 34%에 달하는 면세는 수출입 회사에는 대단한 혜택입니다.”
과테말라에 세운 ‘세아인터내셔널’은 몇 년 후 수출액이 연간 2억6000만달러에 달했다. 커피 등 농산물을 포함한 과테말라 전체 수출액 중 11%에 해당하는 금액. 과테말라 제조 업체 중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기도 했다.
세아상역이 매출 10조원을 눈앞에 둔 대기업 글로벌세아그룹으로 올라선 건 인수·합병(M&A)을 통해서다. 글로벌세아는 2007년 나산 인수를 시작으로 세아STX엔테크, 태림그룹, 쌍용건설, 발맥스기술 등을 그룹사로 편입했다.
-M&A에 적극적인 이유는 뭔가요.
“편하게 사업하려면 의류 OEM·ODM이라는 한 우물만 팠겠죠. 하지만 한 업종에서 잘한다 해서 무한히 클 순 없어요. 매출과 이익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죠. 게다가 불황이 오면 대책이 없어요. 1등 기업의 다른 분야 진출은 위험 분산 차원에서 숙명과 같습니다.”
-사업하면서 언제 가장 힘들었나요.
“코로나 시기에 최고의 위기와 보람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고객사들이 주문을 중지했고, 생산 중이거나 이미 생산한 오더까지 취소하거나 선적 연기를 요청했어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협력사 포함 근로자 6만여 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밀려드는 오더 취소를 어떻게 처리할지 해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때 미국 정부가 대량의 방호복과 마스크를 자국 회사들을 상대로 입찰에 부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오랜 친분이 있던 미국 최대 방적 회사 파크데일(Parkdale)을 통해 입찰에 참여했어요. 방호복 3000만장과 면 마스크 3억장을 수주했습니다. 아시아와 중미 모든 공장을 풀가동했지요. 2020년에 창사 이래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최고 실적을 올렸습니다.”
◇사회 환원 통한 ‘사업보국’은 기업 의무
김 회장은 “처음에는 돈 많이 벌려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나이가 드니 왜 정주영·이병철 회장께서 ‘사업보국’을 앞세웠는지 알겠다”고 했다. 사업보국은 요즘 말로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다. 글로벌세아는 국내는 물론 그룹사가 진출한 다양한 나라에서 사회공헌(CSR)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3년 9월 개교한 아이티 ‘세아학교’가 대표적이다.
-하필이면 2010년 대지진이 일어난 해 아이티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장관으로 있던 미국 국무부에서 투자 파트너십 제안을 받았어요. 모든 임원진이 투자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주력 시장인 미국에서 정부와 파트너를 맺는다는 상징성이 컸어요. 넉 달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2011년 투자 조인식에 미 국무부 관계자, 아이티 총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왔어요. 힐러리 장관은 아이티 투자에 대해 ‘무역을 통한 원조(aid for trade)’라고 극찬했습니다.”

2014년 3월 아이티 세아학교 개교식. /글로벌세아그룹
-2012년 공장 준공식 날 세아학교 건물 기공식도 열었습니다.
“교육은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세아학교에서 아이티의 미래를 책임질 리더들이 배출되기를 희망해요. 그들이 가난과 폭력을 몰아내고 경제와 정치를 발전시키길 간절히 바랍니다.”
세아학교가 세워지기 전까지 아이티 북부에는 지속 가능한 학교 운영과 시스템이 전무했다. 현재 세아학교는 초등학교에 이어 중고교까지 있다. 총 700명이 100% 무상교육을 받는다. 한글과 태권도를 가르치고 오케스트라도 운영한다.
-최근 부영그룹이 직원들에게 출산 지원금 1억원을 주기로 했습니다.
“이중근 회장님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셨다고 생각해요. 정부에서 소득세 문제를 해결해주면 우리도 당장 시행하고 싶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건 완전히 황홀한 기쁨입니다. 그걸 알게 해주고 싶네요.”
평생 세계 현장을 누벼온 그에게 은퇴 계획은 없다. 김 회장은 “은퇴하면 고인 물이 될 것”이라며 “생이 다할 때까지 쉬지 않고 흐르는 물이 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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