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해진 캐릭터 회화·원화
지난 7월 케이옥션에서 일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A Blue Sky! Like We Could Go On Forever!’(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푸른 하늘!·2019)가 6억6000만원에 낙찰됐다. 일본 애니메이션 ‘도라에몽’의 등장인물을 작가 특유의 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같은 날 경매에 나온 이배의 ‘붓질-f’(3억2000만원), 이우환의 ‘점으로부터’(2억8000만원), 장욱진의 ‘강 풍경’(2억원)을 모두 제치고 그달 케이옥션 최고 낙찰가를 기록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이미지가 미술 시장의 중심부로 들어왔다. 유명 작가가 캐릭터를 차용한 회화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에 사용된 원화와 셀, 수집용 카드까지 경매의 주인공이 됐다. 가격을 끌어올리는 첫 번째 힘은 새롭게 시장에 진입한 컬렉터 세대의 추억과 취향이다. 두 번째는 손에 잡히는 실물이라는 점이다. 무엇이든 화면에서 무한히 복제되는 시대에 직접 만지고 소유할 수 있는 ‘물성(物性)’은 오히려 귀해졌다.
이제 피카츄 한 마리의 몸값은 웬만한 유명 작가의 작품을 넘어선다. 지난 2월 미국 골딘 경매에 나온 ‘피카츄 일러스트레이터’ 카드가 구매자 수수료를 포함해 1649만2000달러(약 230억원)에 팔렸다. 포켓몬 카드를 넘어 모든 수집용 카드 가운데 역대 최고 경매가다. 1998년 일본 잡지 ‘코로코로 코믹’이 개최한 그림 대회 수상자에게 나눠준 비매품으로, 프로레슬러인 로건 폴이 소장했던 카드다.
애니메이션 원화와 셀(캐릭터를 그려 촬영에 사용한 투명 필름)도 ‘작품’ 대우를 받으며 가치가 뛰고 있다. 미국 헤리티지 옥션이 지난 5월 개최한 일본 애니메이션 경매에는 원화와 셀 1200여 점이 출품됐다. 2600명 넘는 입찰자가 몰렸고 출품작이 모두 팔려 낙찰 총액 250만달러(약 35억원)를 기록했다. 1997년 TV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 실제 사용된 피카츄 셀은 7만3200달러(약 1억원)에 팔렸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에서 주인공 산(さん)을 그린 셀은 6만7100달러, ‘아키라’에서 데쓰오와 가네다의 오토바이가 등장하는 셀은 7만3200달러에 낙찰됐다. 지난 8월에는 디즈니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제작을 위해 그린 콘셉트화가 8만5400달러에 팔렸다.
한때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순수미술이 빌려 쓰는 소재이거나 어린이용 대중문화로 취급됐다. 이제는 회화뿐 아니라 셀과 원화, 카드도 독립적인 수집 대상이 됐다. 영국 가디언은 이 시장을 ‘밀레니얼 세대의 주식시장’에 비유했다.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에 태어나 애니메이션을 보고 캐릭터 카드를 모으며 자란 세대가 구매력을 갖추면서 추억이 수집과 투자 수요로 바뀌었다는 분석이다. 정태희 서울옥션 수석사업부 팀장은 “최근 30~40대 컬렉터의 유입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며 “이들이 유년 시절의 향수와 서브컬처(하위 문화)에 기반한 작품을 친숙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시장에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추억을 가격으로 바꾸는 것은 희소성이다. 손으로 그린 셀은 애니메이션 제작이 끝나면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고, 1990년대 후반 디지털 제작이 확산된 뒤에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종이와 투명 필름은 흠집과 변색에 약해 세월이 흐를수록 온전하게 남은 작품도 줄어든다. 여러 장 인쇄한 카드라도 대회 상품이나 특별판처럼 처음부터 발행량이 적었거나 절판된 종류는 수량이 한정돼 가격이 오른다.
대형 경매사들도 본격적으로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세계 양대 경매사 중 하나인 크리스티는 지난 3월 뉴욕에서 처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중심에 둔 ‘애니메 스타츠 히어(Anime Starts Here)’를 열었다. 헤리티지는 디즈니와 일본 애니메이션 경매를 정례화했고, 서울옥션도 지난 7월 특별 기획전 ‘프리미엄 포켓몬 카드’를 개최했다. 경매사가 작품의 진위를 확인하고 보존 상태에 등급을 매긴 뒤 거래 기록을 공개하면서, 미술 시장으로서의 틀이 갖춰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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