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만난 정일영 인하대 영미유럽인문융합학부 초빙교수가 모교인 인하대 강의실에서 ‘역전 만루 홈런’을 치듯 바게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강의실 조명은 프랑스 국기 색을 상징적으로 연출한 것이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꿈은 잘 이뤄지지 않는다.”
학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후 프랑스로 유학 가서 언어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왔지만 그를 위한 교수 자리는 없었다. 30년간 프랑스어 강사 자리를 전전한 그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예순셋, 우연히 출연한 유튜브 방송 이후 인생이 뒤집혔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프랑스어를 배워보자는 취지의 영상에서 그는 갑자기 “어차피 지금 배우기 시작해도 프랑스어로 의사소통하기는 어렵다”며 “한국말로 소리를 질러 내 감정을 표현하라”고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커야 한다” “일단 빠뜨롱(Patron·사장) 나오라고 소리를 치라”는 이 당황스러운 강의에 사람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단일 조회 수 901만회, 편집본 조회 수 2360만회를 기록했다. 기회는 또 다른 기회를 불러왔다. 지난달 그는 시간강사 정년인 만 65세가 되는 시점을 열흘 앞두고 모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일흔까지 정년 연장이 가능하다.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 강의실에서 만난 정일영(65) 인하대 영미유럽인문융합학부 초빙교수는 “방송 섭외와 인터뷰 요청이 쏟아져 요즘 정신이 없다”며 “대머리에 ‘숏다리’인 내가 광고까지 찍었으니 사람 일 정말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인생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 정일영 교수가 사진을 촬영하는데 '팬'이라는 한 학생이 정 교수의 저서에 사인을 받으러 왔다. 이 학생은 "교수님이 인터뷰를 하러 학교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후다닥 달려왔다"고 했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솔직함이 무기, 에두르지 마라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을 받기도 전에 말을 쏟아냈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최근 한 그룹사에서 강연을 했고 대기업 인문학 강연 등도 여럿 예정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건가요.
“제가 기업 강연을 왜 가겠어요. 그래야 우리 학생들에게 더 많은 취업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으니까요. 가서 우리 학생들 인성 하나 자신 있고 서울에서 대학 나온 애들 못지않다고, 내가 강의료 안 받아도 되니 학생들 인턴 기회라도 좀 달라고 말을 해요. 일은 들어가서도 배울 수 있잖아요. 들어가면 다 해요.”
-요즘 학생들 고민거리가 많죠.
“한 학생이 휴학하겠다고 찾아왔어요.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나고, 성적도 안 좋고, 취업도 어려운데 학교 다닐 자신마저 없다는 거예요.”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봐라, 65년 지지리 궁상맞게 살다 이렇게 됐다. 너도 3개월 만에 상황이 바뀔 수 있다. 유럽은 개천에서 용 나기 어렵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 가능하다.”
-젊은 층에게 인기 많은 비결을 조금 알 거 같네요.
“제가 희망 같은 걸 준대요. 참고 견디다 마침내 꿈을 이뤘고, 솔직하다고요. 근데, 내 또래 대한민국 남성이 10중에 2만큼만 이야기하고 나머지를 감춘다면 저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말할 뿐이에요.”
그가 최근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결국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북 사인회는 대기표를 받아 차례를 기다려야 할 만큼 인파가 몰렸다. 대부분 10~20대였다. 젊은 층이 그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삶은 사회가 정해 놓은 ‘성공의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굳이 감추지 않는다. 실패담도 당당하게 얘기한다. 흔한 자기계발식 충고와 정반대인 그의 말에 젊은 층은 귀를 기울인다. 그의 조언은 현실적이다. 실패를 의지 부족이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교수 임용에 번번이 실패하며 자책했던 이야기를 풀어내며 “일단 전력을 다하고, 안 되면 남 탓을 하라”고 한다. “영 아니다 싶으면 빨리 포기하라”고 한다.
그는 권위를 앞세우지 않는 ‘생계형 엘리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사 학위를 받고 수십 년 대학 강단에 선 전문가지만 근엄한 모습과 거리가 있다. 전문성을 내세워 잘난 척하기보다 청년들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 경험이 많다는 이유로 정답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외모나 처지를 소재 삼아 농담도 한다. “난 머리 삼면에 있어야 할 머리카락들이 흔적도 없다. 이렇게 머리카락 바쳐가며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교수가 되지 못했다”는 식이다.

▲ 정일영 교수는 “출석과 성적이 반드시 완벽해야만 좋은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설렁설렁 강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유머 감각만 보고 만만해 보여 수강 신청을 했다가 피눈물 흘리는 학생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권위는 갖고 있는 사람이 세우는 거예요. 저는 권위를 갖고 있지 않아요.”
-청년들과 이렇게 막힘 없이 소통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요즘 세대 갈등이 심한데요.
“세대 간에 꼭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청년층과 중장년층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역사적으로 세대 간 소통이 완벽하게 된 적이 있나요?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래, 넌 그럴 수 있지’라고 하면 돼요.”
-그래도 같은 세대 분들에게 젊은 층과의 소통 방식을 조언한다면요.
“에두르지 않고 말하는 게 좋아요. 상사 때문에 힘들다는 젊은 직원에게 ‘좋은 날 오니 참고 견디라’고 하면 그게 마음에 와 닿겠어요? 난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이 내 편이 될 때까지’ 버티라고 해요. 그때 가서 따질 건 따지는 게 현명하다고요. 솔직히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가수 꿈꾸던 딴따라 소년
그의 삶은 중년 이후에도 삶의 궤적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인생의 결과가 정해진다고 여기기 쉽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기회는 뒤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살면서 가장 간절히 바랐던 운(運), 그에게는 교수직이었다. 스스로를 ‘교수가 되지 못한 이무기’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모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평소 접속을 잘 안 하는데 초빙 교수 모집 공고가 났더라”고 했다. 지원하고서 피가 말랐다. 일주일 후 학교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에는 ‘임용을 축하드린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무기가 용이 됐어요.
“심장이 벌렁벌렁했어요. 심폐 소생술로 되살아난 기분. 너무 기쁘고 고마워서 그날 고기도 실컷 먹고 완전 즐겼어요.”
-전임 교수가 아니어서 아쉽진 않나요.
“사람들은 1층이 가장 비참한 줄 알아요. 근데 저처럼 지하실에서 올라오면 1층만 돼도 2층, 3층 올라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감사하죠. 지금 제 마음이 그래요.”
그는 학창 시절, 공부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부진아였다”고 했다. 꿈은 가수였다. 초등학생 때 소풍 가서 노래를 불렀다가 칭찬을 들은 게 계기가 됐다. ‘대학가요제에 나가 가수가 되려면 우선 대학부터 가야 한다.’ 순서가 뒤바뀐 생각으로 인하대 불어불문학과에 진학했다. 가끔 신촌 디스코텍에서 DJ로도 활동하며 재능을 뽐내던 차, 이른바 ‘딴따라’는 절대 안 된다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입대했다.
그러나 전역 후에도 여전히 가수의 꿈을 놓지 못하고 장발에 염색을 하고 다녔다. 어느 날 지인을 만나고 온 아버지는 불쑥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집 자식은 다 유학을 갔다는데 나만 유학 보낸 자식이 없어서 할 말이 없다. 너도 가라.”
-무슨 의미였을까요.
“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마음껏 공부하지 못한 한이 컸어요. 이불 뒤집어쓰고 촛불 켜고 몰래 공부하다 이불을 태워 먹을 만큼 공부에 한이 맺힌 분이라 제게 유학을 권한 거죠.”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당시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이 많아 가능했어요.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는데, 10년간 공부하고 오라며 아버지가 있는 돈을 다 털어 1억을 마련해줬죠. 지금이면 이 돈으로 2년도 못 버텨요.”
사실,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프랑스어가 서툴러 수업을 따라가느라 애를 먹었다. 두통약을 먹어가며 공부만 했다.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놀아요. 부모님 피 같은 돈인데. 공부는 군 복무처럼 기간을 채우면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빵 하나도 선뜻 사 먹지 못했다. 밖에서 사 먹은 거라곤 값이 저렴한 바게트가 전부. 그 흔한 프랑스 과자 ‘마카롱’ 한 번 먹어본 적 없었다. 그렇게 유학 생활 8년 차인 1995년, 서른넷의 나이로 파리 8대학에서 언어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곧바로 교수가 될 줄 알았으나 자리가 없었다. 이듬해부터 인하대를 비롯해 경희대·경기대·충북대·청주대 등에서 시간강사로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끊임없이 교수직에 도전했지만 임용 탈락의 연속이었다. 강사의 삶은 고됐다. 방학에는 한 달 수입이 20만원에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교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언젠가 되겠지, 되겠지….”
-많이 불안했겠어요.
“외국에서 박사 학위 받은 사람 꿈은 교수 하나예요. 주변에서는 내가 괜찮은 줄 알던데, 안 괜찮았어요. 30대 후반까지도 아버지께 용돈 받아가며 살았어요. 이러다 교수가 되지 못할 수 있겠다, 난 뭘 해 먹고 살지라는 불안감이 정말 컸어요. 이걸 내보이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숨기고 감췄고요. 불안을 잊으려고 다른 일을 많이 했죠.”
-어떤 일이요?
“짬짬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등학교 시간제 강사도 하고…. 보통 안 하거든요, 자존심 상한다고. 이력서에도 일부러 안 쓸 정도니까요. 가족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데, 막노동도 한 적 있어요.” 그 무렵 우울증이 찾아왔다. 잘못된 선택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면서 숨을 쉴 수 없어 병원에 가보니 공황장애라네요.”
정 교수는 스스로를 ‘극내성인’이라고 칭한다. 구독자 22만명의 유튜브 채널명도 ‘악성 내성인 정일영’. 이유가 있다. 그는 “지금도 학생들 강의 평가를 보며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시간 강사 시절에는 이런 예민함이 극심한 생계 불안과 맞물렸다. 강의 평가는 어떨지, 다음 학기에도 강의를 맡을 수 있을지 꼬리를 무는 걱정과 스트레스가 도미노처럼 그를 괴롭혔다.
“걱정을 덮기 위해 책을 썼어요. 가진 게 없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책 쓰는 것밖에 없었어요. 지금껏 쓴 책이 스무 권이 넘어요. 내년 출간을 앞둔 출판 계약도 세 건이고, 서재에 잠들어 있는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도 있어요.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나만의 총알이랄까요.”
또 하나의 탈출구는 잃어버린 옛 꿈에 다가서는 것이었다. 가수·영화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일앤영밴드’를 조직해 보컬로 활동했다. 6개월간 한 방송사 라디오의 게스트로 출연하며 소장한 샹송 CD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인기 밴드 ‘들국화’ 멤버인 최성원과 연락이 닿아 “그간의 공부를 포기하고 음악 쪽으로 진출할 생각이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어떻게 공부했는데 포기를 하나’라는 생각에 거절했다고 한다.
정 교수는 암담한 시기를 극복할 수 있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어머니의 존재’를 꼽는다. “형, 누나는 4년 장학금 받고 대학 다닐 만큼 공부를 잘했는데 저만 어머니 속을 썩였어요. 그래서인지 애틋하고 각별해요. 교수가 돼서 연구실 구경시켜 드리는 게 제 평생 소원이었을 정도로요.” 정 교수의 메신저에는 올해로 아흔일곱인 어머니 사진과 함께 프랑스어로 ‘내 삶의 이유(ma raison de vivr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가 지금도 강의 중 틈만 나면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이따금 다른 기회는 찾아오더라
교수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이따금 다른 기회는 찾아왔다. 그는 그때마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기회를 붙잡기 위해 발버둥쳤다. 그는 40대에 찾아온 EBSi 수능 프랑스어 강의를 “절호의 찬스였다”고 했다. ‘먹고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는 “박사 학위를 받고도 생계를 위해 강사를 하며 버티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며 “살아남으려면 남과 달라야 했다”고 했다.
50대 초반부터는 한 온라인 외국어 교육 업체에서 프랑스어 ‘델프(DELF)’ 강의를 시작했다. 프랑스 공인 인증 시험으로, 토플처럼 듣기·읽기·쓰기·말하기 영역으로 구성돼 있다. 정 교수는 현재도 델프 감독관이자 채점관이다.
-AI가 번역과 통역을 해 주는 시대입니다. 제2외국어 학과 통폐합에 위기감은 없나요.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AI는 도구이지 동료가 될 수 없어요. 외국어를 정말 잘하는 사람은 대체되지 않아요. 정상회담에서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을 기계에 맡기겠어요? 학생 수를 줄일 순 있어도 학과를 없애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때를 놓친 삶이 있다고 보나요.
“있죠. 대부분은 원하는 걸 다 이루지 못하고 살아요. 저도 제가 ‘이룬 소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1년마다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 ‘반딧불이 목숨’이니까요. 다만 더 일찍 이 자리에 왔다면 학생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죠.”
-젊을 때와 비교해 성공의 기준이 달라졌나요.
“엄청 다르죠. 30대의 저는 전임 교수가 아닌 인생을 실패라고 생각했어요. 그때의 내가 지금을 보면 ‘루저’라고 할 거예요. 하지만 63세의 제가 지금을 보면 성공했다고 할 것 같아요. 성공엔 절대적인 기준이 없어요. 다 상대적인 거예요.” 동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너도 잘났고, 나도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대로 살면 됩니다. 저도 그렇게 살았어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멀리 보지 말고, 선택은 좁게, 집중은 길게 하세요. 1년 뒤를 보지 말고 2~3개월 안에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찾으세요. 그래야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어요. 남과 비교하지 말고 굳이 비교하고 싶으면 나보다 상황 어려운 사람과 비교하세요. 대신 그 사람 모르게요.”
“혜성처럼 떠올랐지만 별똥별처럼 지고 싶지 않다.” 교수가 된 지금, 그에게 꿈을 묻자 이런 말을 하더니 뒤이어 “일단 매년 계약을 연장해 정년까지 초빙교수 자리를 꿰차는 게 목표”라는 답이 돌아왔다. “직함이 있어야 기업 강연을 할 수 있고 그래야 제가 학생들 취업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이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모든 짓을 다 할 거예요.” 그의 생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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