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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5-15 09:04

조정/(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아직 나는 온전히 살아있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지던 하루하루가 경이롭기까지 한 요즈음이다. 


이른 새벽 길을 떠나 4시간여 만에 도착한 강진 월출산 자락은 새 생명들의 함성으로 넘실거린다. 열두 폭 월출산 능선에 둘러싸인 드넓은 녹차밭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밤새 머금은 이슬로 이제 막 연둣빛 새순을 내미는 차밭은 마치 윤슬이 반짝이는 초록빛 바다 같다. 박새들의 맑고 고운 재잘거림이 백운동 원림(白雲洞 園林)의 고요를 깨우고, 거꾸로 나무를 타는 동고비와 나뭇가지에 앉아 쉬지 않고 꼬리를 까딱대는 딱새들…, 모두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몸짓들이다.

 

 사흘 전까지 살아계시던 시숙께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만 하루 동안 이생에서 맺은 인연들과의 작별 인사를 마친 그분은 이제 작은 유골함 속으로 거처를 옮겨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입구에 늘어선 화환과 상주에게 조의를 표하는 문상객들로 영결식장은 의외로 북적였다. 많은 가족과 친척, 고인의 친구분들, 아들 회사 동료들은 “고인께서 더 고생하지 않게 되어 다행입니다.”라며 정중하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화려한 영결식장 분위기와 어울리게 조문객 중 누구도 그분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예상보다 앞서 병상에서 돌아가신 80 중반 노인은 자식의 짐을 덜어준 분이라며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다음날, 화장과 발인을 거쳐 공원 가족묘지 석관에 안장하기까지 모든 절차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오전 중으로 마무리되었다. 간결하고 신속한 안장식이 끝나자 무덤덤하게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들은 서둘러 각자의 일정대로 발길을 돌렸다.

 

 남편은 고인이 되신 시숙의 얼굴 모습과 목소리가 유난히도 닮았었다. 가끔 시숙께서 저 까마득한 세월 건너 어릴 적 골목 친구들 근황을 알릴 때면, 남편은 덩달아 목소리에 활기를 띠곤 했다. 영결식장에서 만난 그 옛날 동네 형들은 남편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한테 아마 말을 못 했을 거야, 형이 우리한테 네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라며 형의 유언 같은 말을 대신 전했다. 요즘 남편은 형에게 전화를 하려다 그분의 부재를 실감하며, 형이 남긴 ‘고맙다’라는 말로 허전함을 달래는 듯하다. 그가 느끼는 상실의 고통은 형을 사랑했던 만큼의 무게가 아닐까…, 아픈 형에게 정성을 다하던 남편의 애통함을 미루어 짐작하며 연암의 시 한 편을 떠올린다.


우리 형 얼굴 수염 그 뉘를 닮았던가

아버지 생각나면 우리 형 바라봤지

이제 형 그리우면 어디에서 볼 것인가

내 얼굴 비춰 보러 시냇가에 가 봐야지 


이 시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51세 때 큰형마저 세상을 떠난 뒤 지은 <연암억선형 燕巖憶先兄>이라는 시로, 형을 바라보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연암이, 시냇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애절함을 담고 있다.

 

 봄빛이 내려앉은 차밭을 따라 조선 시대 이담로(1627~1701)가 조성한 백운동 원림 안뜰로 들어선다. 단아한 초옥 주변에 선비의 덕목을 닮은 대나무, 매화가 운치를 더하고, 계곡물을 끌어들인 ‘유상곡수’에선 선비들이 술잔을 띄우며 읊던, 다산의 ‘백운동 12경’ 시구가 들려오는 듯하다. 푸른 기상을 뽐내는 운당원 대나무 숲을 지나 정선대에 오르자, 하늘과 맞닿은 월출산 옥판봉이 눈부시게 나타난다.


부리에 노란 꽃가루를 묻힌 동박새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툭 툭 미련 없이 떨어진 동백꽃 송이송이 들이 나무 둥치를 선혈로 물들인다. 붉은 주단이 깔린 화사한 숲길은, 덧없고 신비로운 삶과 죽음의 서사 모두가 자연의 순리임을 이해시킨다. 삶의 끝은 소멸이 아니며 시간의 질서에 의한 생의 무한 반복이라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이 순간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끼는 것은 무탈한 오늘이 기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어느 날 한 줌의 재로 망각의 강을 건널지라도 그 또한 삶의 일부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우듬지 아늑한 둥지 안에서 여린 까치들이 목청 높여 어미를 부른다. 은은한 천리향 잔향이 바람에 실려 오고, 하늘에 줄지어 날던 나그네새들이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동백이 온 숲에 불을 지피는 봄은 다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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