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그리고 싶은 그림

최민자 jacob@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6-04-16 11:41

최민자/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빗살무늬토기를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누가 이 질박한 흙 그릇에 처음으로 무늬 넣을 생각을 했을까. 왜 꽃이나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지 않고 어슷한 줄무늬를 아로새겼을까.


누군가 날카로운 뼈바늘 같은 걸로 그릇 아가리에 첫 획을 긋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감격하여 가슴이 뛴다. 그는 어쩌면 인류 최초의 추상화가였을지 모른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가 들소 그림 같은 사실화인 데 비해 신석기의 빗살무늬는 리드미컬한 기하학 문양이다. 그 가는 빗금 하나가 현대 미술의 주 흐름인 추상성으로 이어져 왔음을 생각하면, 달에 첫 발자국을 낸 암스트롱만큼이나 위대한 첫 손자국이 아닌가.


미술사학자 보링거(Wilhelm Worringer)에 의하면 인간의 추상 충동은 인간 내면과 외부 환경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불안심리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는 신석기 토기의 빗살무늬를 ‘공간에 대한 공포’로 해석한다. 원시 공동체였던 구석기 시대 이후 계급과 소유가 생겨나고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안이 현상 너머의 초월적 질서를 추구하게 되어 토기의 빈 공간을 빼곡하게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리듬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인간과 외계 현상 사이가 비교적 행복한 친화 관계일 때는 사실주의가, 변화와 불안이 많은 시기엔 추상주의가 유행했다 하니 20세기 이후의 추상적인 흐름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듯도 싶다.


빗살무늬를 다시 바라본다. 이 정교한 사선의 시작은 사냥 나간 남정네를 기다리던 젊은 아낙의 초조함에서 출발했을 것 같다. 무심히 동굴 밖을 내다보다가 때마침 휘몰아치는 빗줄기를 보고 불안해진 마음이 무심한 빗금으로 형상화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비 때문에 사냥을 못 나간 사나이의 우연한 손놀림일 수도 있다. 그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해 안정되고 질서정연한 규율을 추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공간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았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시간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산다. 그들은 황량한 벌판에 홀로 남겨질 듯한 두려움으로 그릇 표면을 빼곡히 채웠지만, 우리는 빈 시간에 대한 강박의식 때문에 하루를 빽빽하게 채우려 든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공간적 거리의 의미는 축소되고 속도와 시간이 경쟁력이 된 시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야말로 인간의 중요한 행동양식이라는, 한 사회심리학자의 말을 사람들은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느긋함이 게으름으로, 유유자적이 빈둥거림으로 전도된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일하는 것은 여유보다는 무능에 속한다. 남의 밭에는 곡식이 푸른데 홀로 땅을 놀리는 기분이랄까. 거두든 못 거두든 심고 가꾸는 척 허둥거려야 스스로 조금 위안이 된다.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일수록 일정이 꽉 짜여 한가할 틈이 없다. 이동전화를 옆에 차고 이동 수단을 바꿔가며 도시라는 사냥터에서 유목민처럼 살아간다. 돈과 권력, 지식과 정보, 사랑과 쾌락─ 원하는 사냥감은 제각기 달라도 무엇에 쫓기듯 무엇을 좇으며 낮도깨비처럼 밖으로 떠돈다. 한 여행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여행마저도 휴식이나 충전의 의미는 아니라고 한다. 한 군데서 여유 있게 쉬는 것보다는 힘들게 다리품을 팔아가며 여기저기 지치도록 끌고 다녀야 본전 생각을 덜 한다는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을 기웃거리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일도 내 일상의 빗금 긋기에 다름아니다. 빈 시간, 빈 가슴을 채워두기 위하여 남들처럼, 유행처럼 빗금을 긋는다.


촘촘히 채워진 시간의 무늬에 그럴싸한 제목을 붙여본다. ‘無題’ 또는 ‘作品 4-7’…….

모호하다. 나조차 내 그림을 알 수가 없다. 이것들이 정녕 내가 그리고픈 그림은 아니다. 빗살무늬 대신 조선백자의 넉넉함을, 동양화의 여백을 그리고 싶다.


여백이란 비어 있음의 표현이지 그리고 남은 허드레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통풍과 영혼의 소통을 계산하여 일부러 비워두는 원만 함일 뿐, 그릴 게 없어 비워둔 자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백자를 빚고 사군자를 치던 선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빈 동굴에 메아리가 퍼지듯 비어 있음이 울림을 만드는 이치를.


이제는 좀 비워두고 싶다. 촌스럽고 한물간 유행이라도 꽃과 새, 하늘과 구름을 그리고 싶다. 텅 빈 하늘에 노을 한 자락, 꽃향기를 그리워하는 새의 노래, 그 넉넉한 여백을 그리고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무채색의 여인 2026.05.29 (금)
옷장 문을 열자, 색색의 스카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부터 원색이 섞인 대담한 무늬가 대부분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색상이다. 스카프는 물론 옷조차도 무늬 없는 단색이나 어두운 계열만 즐겨 입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어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늘 비슷한 색과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미술 동아리에서 한 동료가 “오늘도 무채색의...
민정희
국수 먹는 날 2026.05.29 (금)
마을 사람들 모여 대 솥 걸고 삶아내는 국수 기뻐서 슬퍼서 지쳐서 맺은 깐부를 평생을 찾아다닌다 이 손 다음 손들이 밀어낸 칼국수 가마솥에 풍덩 담가 빨간 고추가 어른거리는 가을 하늘에 양념장을 한다 구름에 세월 가도 낯설은 이름 칼국수를 시장 골목 끝에서 찾는다 양철 대문에 쓴 이름 ‘칼국숫 집’ 큰 소리로 고향 친구를 부른다 식당 아주머니 항아리 앞치마에 하얀...
반현향
가야금 2026.05.28 (목)
불러야 할 곡이 있어그대 태어났는가 쪽 찐 머리 빗질하듯 줄 고르고떨쳐 앉은 무릎에 기대어현침에 오르내리는 바빠진 손길 들려줄 울음 있어그대 태어났는가 어깨 타고 줄 위에 흐르는 애달픔꺾이는 가락마다 뛰노는 가슴마지막 떨림마저 어느덧 잦아들고  울어야 할 슬픔이 남아 그대 태어났나속 울음 속 울음에 껍데기만 남아버린저어할 노래가 있어 몸으로 울 가얏고
김민관
죽음을 통한 회복 2026.05.28 (목)
                                                                         이명희/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서론-한동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죽음에 눌려 있다가 이유리의 연작소설을 읽고 나니 뭉쳤던 근육이 풀렸다. 죽음은 산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하나라는 책임이 따른다. 죽음의 의미는 경건이지만...
이명희
구피 클럽 2026.05.22 (금)
구피는 물이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비닐봉지를 건네받아 구피들을 조심스레 어항 속으로 쏟아 부었다. 구피의 형형색색을 따라 빛을 내던 비닐봉지가 이내 쪼그라들었다. 손에 묻은 물을 추리닝 바지에 대충 닦고 있는데 아버지가 먹이통을 들고 와 나를 옆으로 밀쳤다. 아버지가 먹이를 뿌리자 구피들은 작은 입으로 먹이를 받아먹었다. 구피가 입을 벌렸다 오므릴 때마다 물방울이 피어올랐다. 이 순간,...
고현진
꽃은 아직 2026.05.21 (목)
함박꽃이 피면 바람결에낯익은 그림자 올 것만 같아아침마다 마당을 서성인다 밤새 비라도 내리면꽃봉오리 빗물에 무거워질까창문을 열었다 닫는다 햇살 깊은 날이면오늘은 끝내 환한 속살 보일까그림자 길어질 때까지골목 끝에 걸린 눈길 하나 꽃은 아직꽃잎을 여미고 있다  함박꽃 봉오리 앞에서심장 소리 먼저 봄을 건너고 마른 입술 사이 침을 삼키듯아껴둔 이름 베어 문다 마중 나간 발소리는 더뎌서몇 번의 봄비를 더...
강은소
불효자의 곡(哭) 2026.05.21 (목)
생명체인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한이치이겠지만 태어남은 죽음을 약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세월이흐르면 생명체의 세포는 노화(老化)되고 유한(有限)한 것이기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진리(眞理)는 불변(不變)인가 하는 것도 요즈음 세상에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세상에 불변이란 것이 있는가 하는 의문도 해보기도 한다. 보름 전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는...
노동근
낡은 이불 2026.05.15 (금)
열 살 남짓한여름 이불을 꺼낸다 몸이 오가던 길이손금처럼 갈라져 있고보라 꽃잎마다누에가 실을 잣는다  몸이 찌푸리면길도 따라 구부러졌고설레어 잠 못 들 때신작로가 등 뒤로 뻗어갔다 밤마다오랜 일기장을 뒤적이듯갈라진 길을 더듬으면 그날들이 올올이 손을 흔든다 어머니가구멍 난 스웨터를버리지 못했던 까닭이 해진 꽃잎에서줄줄 풀려나온다.
임현숙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