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무심의 의자

최민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1-03 15:53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알뜰장터에서 간이의자를 들여왔다. 엉덩이를 겨우 걸칠 만한 넓이에 바닥에서 한 뼘
정도의 높이여서 의자라기보다는 깔개에 가깝지만, 거칠게 갈라진 나뭇결과 둥글게 닳아진
모서리가 정겨워 첫눈에 선뜻 집어 들었다. 투박한 통나무 상판에 네 개의 다리를 끼워 맞춘
단순하고 튼튼한 모양새도 충직하고 미더워 보였다. 마루 앞 기둥 아래 놓아두고 '무심의
의자'라 이름 붙여 주었다.
​ 커피 한 잔을 타 들고 나와 나는 종종 이 의자에 앉는다. 사선으로 비껴 드는 햇살을 받으며
눅눅한 마음을 뒤집어 말리거나, 반가사유상처럼 턱을 받치고 앉아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지나버린 시간을 되돌려 세워 마법의 금빛 가루를 뿌려주다가, 순정하게
벼려진 기억의 칼날에 느닷없이 허를 찔리는 것도 좋다.
의자에 앉으면 손수건만 한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솔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과
해끗한 풀꽃들의 고갯짓도 돋보인다. 소나무 한 그루만 빼고는 내 앉은키보다 한참 낮은
백성들인지라 한 뼘 높이의 나무의자를 자주 옥좌로 착각하곤 한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심판의 권위가 절로 생겨나는가. 눈높이가 같을 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위에서 굽어보면 불필요한 것까지도 세세하게 드러나 보인다. 곁가지가 보기 싫게
자란 산국이며 더위에 늘어진 맥문동 이파리며, 게릴라처럼 낮게 포복하며 옆으로 기어가는
씀바귀 줄기까지 고스란히 눈에 띈다. 화초와 잡초가 한 끗 차이련만 웃자란 쇠비름이
채송화 줄기 위로 붉은 장딴지를 슬며시 뻗는 것도 내 눈에는 썩 고와 보이지 않는다. 높이가
주는 시야의 확장. 기껏 한 뼘 높아졌을 뿐인데 만족스런 것보다 못마땅한 것들이 더 잘
보이는 것, 이상한 일이다.
거슬리는 것들을 너그럽게 눈감아줄 아량이 없는 나는 급기야 커피잔을 내려놓고 일어난다.
이럴 때 내 의자는 무심의 의자가 아니다. 유심의 의자, 심판의 의자다. 삐져나온 소나무
순을 치고 꽃 핀 괭이밥을 냉큼 뽑아 던진다. 어제까지 무심히 보아 넘긴 한련 줄기도
누리시든 잎들이 지저분해 보여 미련 없이 걷어내 버린다. 원칙도 기준도 없이, 기분에 따라
돌변하는 내 변덕이 힘없는 동포들에겐 횡포, 아니 천재지변이겠다. ​
사악하고 부패하고 불합리한 세상을 왜 그냥 보고만 계시냐 고 누구는 하늘의 무심함을
탓하지만, 신의 인내심 아니 무관심 이야말로 더할 수 없는 자비가 아닐까. 내가 만약
신이라면 맘에 들지 않는 이 세상을 수천 번도 더 갈아엎었을 것이다. 아마도 신은 세상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한 높이로 올라가 버렸거나, 세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스카이라인
정도에 좌정해 계시거나, 아니면 진즉 지상에 내려와 진흙탕 같은 사람들 사이에 함께 섞여
뒹굴고 계실지 모른다.
발등이 좀 간지럽다 싶더니 개미 한 마리가 왼쪽 발목 언저리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깟 개미 목숨쯤 이야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기척 없이 해치울 수도 있지만 고공 투하
정도로 봐주기로 한다. 어쩌랴. 그도 한집 식구인데.​

삼십 년 가까이 아파트만 살다가 처음으로 마련한 단독주택인 여기도 살아보니 전혀
단독주택이 아니다. 개미와 모기, 지렁이나 귀뚜라미처럼 먼저 터 잡고 살아온 족속들과
적당히 화친하며 지내야 하는, 이야말로 기실 공동주택인 셈이다. 문과 창을 꼭꼭 여며 닫고,
정해진 날에 정기소독을 하는 아파트가 차라리 단독주택에 가깝다 할까. 진즉 알았으면 아예
등기도 공동명의로 했을 거라고, 그랬다면 세금이라도 감면받았을 거라고, 허위 단심
줄행랑치는 병졸 뒤에서 썰렁하게 혼잣소리를 해 본다.
고운 때 가신 퇴기들을 얄짤없이 축출해버리고, 성벽을 기어오른 졸개 한 녀석 너그럽게
관용하고 흐뭇해하는, 이 또한 제왕의 도락 아닌가. 무심이 유심이 되고 유심이 흑심이 되는,
한 뼘 높이 권좌의 끗발이 식은 커피보다 달달하고 황홀하다. ​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2025.07.11 (금)
엄마를 잃고도밥은 먹어야 한다고눈 붓도록 울고도숟가락은 들어야 한다고눈물 섞인 국도삼켜야 한다고뜨거운 불의 식사 밥을 먹는다배고픔은 슬픔을없애주지 않는다엄마가 사라진 방 안에도밥상은 놓인다빈자리가 뼈처럼 드러나도뜨거운 불의 식사밥은 식지 않는다남편 잃고홀로 9남매를 길러낸울 엄마자식이 뭔지밥 묵고살아내게 되더라살아지게 되더라 란 말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가장 잔인한 위로 같다이젠 부를 엄마도 없는데목구멍은...
김회자
  지난 5월, 빌 게이츠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며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재산 중 99%를 기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이미 지난 25년 동안 1천억 달러 넘는 돈을 사회에 환원했는데, 앞으로 20년 동안 1,070억 달러(약 150조 원)로 추정되는 그의 재산 중 1퍼센트만을 남기고 모두 세상에 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어떤 책에서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김보배아이
오늘이 그날이다 2025.07.11 (금)
   오늘은 아내가 이 땅에 태어난 지 꼭 68년이 되는 날이다.예전 같았으면 달력에 큰 동그라미 두 개를 그리고, 별표와 하트도 그려 넣었을 테지만, 오늘 서재 왼쪽 벽에 걸린 달력에는 그런 표시 하나 없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 아내의 생일이 오면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미역국을 끓여 놓고 출근하곤 했다.아내는 아침 잠이 많아 내가 출근한 뒤 에야 일어나기 때문에,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건 아예 기대하지...
우제용
칠월의 에필로그 2025.07.04 (금)
초록이 물오르면포도 광주리에 둘러앉아시퍼런 입술들이 깔깔대며구름 위를 달린다포식자의 먹잇감이풀을 뜯는 칠월은가슴에 품은 진초록이다칠월마다 삶의 이삿짐이옮겨갔지만진초록이 마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칠월은등줄기 진땀이어미의 젖가슴을훑고 가는 여름감기나의 노스텔지어 칠월에발을 담구면시리고 저리는 삶의 변주곡이장조로 화답을 한다
반현향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호텔 신세를 지곤한다. 강남보다는 강북에 있는 호텔을 선호한다. 강남은 남에 나라에 온 것 같아 낯설다. 그래서 강북에 머문다. 60년대 모습과 정감이 조금은 남아 있어 길 찾기가 편하다. 또 혹시나 내가 남긴 옛 추억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해서다. 50년대 후반 주경야독, 신문팔이, 고학시절, 자주 찾던 신문사들이 아직도 현존하는 광화문 근처에 머물고 있다. 석간 신문을 박아내는 우렁찬...
심정석
만년설 2025.07.04 (금)
소복이 쌓인 눈이어느새 쌓인 눈이하얗게 쌓인 눈이 봄이 왔다고마음대로 눈물이 된다 숨죽여 울고소리 내어 울고가슴 치며 울어도 녹지 않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
문선혜
분가 2025.07.04 (금)
    아들이 분가했다. 처음 집을 떠나 독립해서 살아보겠다고 했을 때, 내 안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훅! 들어왔다. 살인적인 고물가, 렌트비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아이가 지는 게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 그런 염려스러운 엄마 맘이 먼저였다. 장남에게 은연중 믿고 의존해 왔던 내 기대어진 몸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게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아이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지혜롭고,...
고희경
아침 이슬이여, 너는 어둠의 울타리에 걸어 놓은  내밀(內密)의 창(窓) 지순한 그리움의 초상이구나    춥고 습한 긴밤들을 눈물로 견디며 모든 고통의 순간들은 결국 숭고한 환희로 통하는 길이라는 지혜를 터득한 너의 맑은 이마여!                                           ...
안봉자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