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살면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긴 시간 동안 아무 대화도 나누지 못하거나 날씨 얘기와 경제 동향 이야기를 나누는 둥 마는 둥 보내기도 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인사말과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과 눈인사하는 이상의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될 때 반복해서 만날 경우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 속에 추억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렸을 때 이발소를 처음 간 기억은 초등학교 입학 전이던 1965년 정도로 기억된다. 동네 이발소가 있었는데 그전엔 어머님이 데리고 오시다가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던 나이가 되어 이발소를 혼자 갔다. 당시 이발소는 의자가 있고 이발사들이 의자에 앉은 손님들을 이발해 주면, 면도사가 면도하고 10대 중반 정도로 보였던 청소년 이발 수습생이 청소하면서 이발을 배우면서 머리를 감기는 일을 하였다. 이발을 끝내자, 그 청소년이 머리를 감아주었다, 머리를 감은 다음에 세수하라고 물을 받아줬는데 세수를 혼자 해본 적이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랬더니 세수하라고 여러 번 말해도 가만히 서 있자 씩씩거리며 오른손을 좌우로 내 얼굴을 씻으며 비누칠까지 하며 세수를 시켜주었다. 이렇게 나의 첫 자발적 이발소 출입이 시작되었고, 그다음에 갈 땐 세수하는 방법을 배워가서 머리 감은 후 세수를 혼자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엔 혼자 용돈으로 빵 사 먹을까? 딱지 살까를 고민하게 되다 보니 이발소를 저렴한 곳을 찾아다니었다. 살던 동네는 80원이었는데 당시 2km 정도 걸어가면 60원에 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그 동네 사는 학교 친구가 얘기해주어 가면 그렇게 그 이발사가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머리를 길을 수 있어서 가르마를 타고 멋있게 길러 거울 보며 빗으로 머리를 빗기도 하였으나 중학교에 가면서 빡빡머리가 되면서 머리는 이발기란 도구로 1부, 2부라고 머리카락 크기별로 구분하여 깎았다.
이발사분들과의 대화는 이때부터 시작된 거 같다. 당시 나눈 대화는 주로 이발사분들이 어디서 지난번에 깎았냐며 잘 못 깎았다고 다음부터 거기 가지 말고 여기 와서 깎은 라는 내용이었다. 머리를 하다 고등학교 가니까 당시 스포츠머리라고 불리던 앞머리를 약간 기를 수 있는 머리를 깎았다.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같이 있던 곳이어서 학교 앞에 이발소가 여러 개가 있었다. 월요일엔 교련 선생님이 머리 검사를 하여 일찍 학교에 도착 머리를 깎고 등교하는 날이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머리를 기를 수 있었고 수염이 나기 시작하여 면도하게 되었다. 대학에 다니다 중간에 입대하여야 해서 80년대 초경 다시 머리를 빡빡 깎고 입대를 하였다, 군 생활을 한 곳은 캠프 콜번(Camp Colbern)이라고 불리던 미 통신여단 304통신 대대로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병으로 근무를 했다. 이곳은 통신 부대로 2개 중대가 있던 작은 부대로 500명 정도의 규모였으나 부대 내에 모든 시설이 다 있어 클럽도 있었고 이발소, 도서관, 극장, 레크리에이션센터(Recreation Center로 당구장, 탁구장, 대형 TV 보며 쉴 수 있는 공간) PX라고 불리던 면세점, 병원, 체육관 등 용산이나 동두천 등 큰 부대에 있던 시설이 규모만 작을 뿐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이발소는 미군들이 이용하였고, 카투사는 카투사 병이 이발을 배워 이발을 무료로 해주었는데 워낙 실력이 아마추어여서 부대밖에 있는 이발소를 이용했다. 군부대는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로 중부고속도로 요금소 옆에 있던 검단산자락을 뒤로하는 곳이었다. 이 부대 밖엔 파라다이스, 김치 클럽 등 미군들을 대상으로 하는 바가 있었는데 이중 김치 클럽의 DJ가 70년대 80년대 유명 작곡가 겸 가수 고 김정호 씨였다.
하루 근무를 마치면 이곳 클럽에 가서 맥주를 마시며 노래를 들었는데 그중 한 곳이 김정호가 활동하던 곳이었다. 이발하러 가면 당시 이발사가 김정호 씨 또래였는데 단골이었던 그의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하고 80년대 중하반기에 대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건물 내 이발소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광화문에 있는 현대해상화재보험 건물 지하에 이발소에서 약 2년간 이발을 했는데 이발을 해주시던 분을 몇 년 후 여의도에 있는 쌍둥이 빌딩 지하 이발소에서 만난 인연이 있다. 내가 직장을 옮기듯 그분도 광화문에서 여의도로 옮겼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분이 이발하면서 2년 만에 다시 이발하게 되어 반갑습니다였다.
90년대 중반에는 이스라엘에서 근무하게 되어 이곳에서 이발소를 이용하였다. 텔아비브 북단 네타냐(Netanyna)라는 도시에 단골로 가던 이발사와의 대화는 지금도 추억을 불러온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라고, 물으면 나는 항상 최대한 멋있게 알아서 해달라고 했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자르던 모습이 기억난다.
2000년대 중반 캐나다에 이민해 온 후 집 근처 자주 찾던 이발소 중 토미건스라는 곳을 자주 갔는데 이곳에서 만난 이발사 미쉘과는 대화를 나누다 미쉘의 아들이 고등학생인데 신경이 예민해서 공부에 집중을 못 하여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에는 캐나다보다 더 입시 경쟁이 심하고 학생 중에는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경쟁사회가 불러온 일인데 이를 극복하는 것도 인생의 과정이라고 머리를 깎으며 말해주자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누구나 다 조상으로부터 받은 유전인자를 받았고 너 역시 그 안에서 형성되어 가는 거 아니겠냐고 말을 내게 이어갔다.
한국을 방문하면 들리는 이발소가 있다. 우연히 찾은 곳인데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단지 이발관이란 곳인데 한국 방문 시 내가 거주하는 강남구 일원동에서 꽤 먼 거리인데도 항상 그곳에서 이발한다. 70대이신 이발사는 70년대, 80년대 기능올림픽, 세계 이발 미용 대회 금메달 3연패의 기록을 갖고 계신 보기 드문 명인이다. 이곳에 가면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한국 가면 언제 가능한지 확인하고 예약을 하고 간다. 70대이지만 이분의 체력은 젊은 사람 같다. 알고 보니 UDT 출신이다.
10년 전 처음 갔을 때 차에 지갑을 두고 이발하는 바람에 계산할 때 돈이 없어 잠깐 차에 갔다 오겠다고 하자 못 믿겠다고 나를 따라 나오려고 하셨다. 당황한 나머지 주머니를 이곳저곳 뒤지다가 셔츠 윗주머니에 체크카드가 있어 계산하고 나왔는데 그 일로 이분과 더 친해졌다.
이분과 이발 중에 나누는 대화, 이분 이발을 기다리다가 이분이 다른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가 한 편의 드라마다. 젊었을 때의 무용담부터 최근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 등 듣다 보면 이발이 다 끝나 머리를 감게 되고 이발 가운을 벗어야 할 시간이 온다.
이발은 진짜 이곳 캐나다에서 이발하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가격은 캐나다 반값인데 이곳에서 이발하면 인물이 달라진다.
다음에 한국 가면 또 갈 건데 이발보다 더 기대되는 게 이야기보따리이다.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시며 이어지는 그분과의 대화 속에 새로운 추억이 하나둘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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