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문을 열자, 색색의 스카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부터 원색이 섞인 대담한 무늬가 대부분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색상이다. 스카프는 물론 옷조차도 무늬 없는 단색이나 어두운 계열만 즐겨 입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어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늘 비슷한 색과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미술
동아리에서 한 동료가 “오늘도
무채색의 여인이 등장하셨군.” 하며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호감은
있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이였다. 역시
미술 전공자라 색감에
민감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때부터 나의
모습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옷 색상
때문이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의미를 품은 말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두운색의 옷을
즐겨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자신을
뚜렷하게 내세우지 않는
성격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림의
스타일을 말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늘 원색
쓰기를 주저했다. 어떤
색이든 흰색이나 다른
색을 섞어 썼기에
분위기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개성 있다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색상이나 어떤
색의 옷을 주로
입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나이 차가 많은
다섯 오빠 속에서
자란 나는, ‘여자는
사기그릇과 같아서 함부로
취급하면 깨질 수 있다’라는 어른들
생각의 틀 안에서
과분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지나친
보호는 의존성과 소심함으로
이어졌고, 또래의 아이들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제때 알지 못하는
늦된 아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사교성도 부족해 관심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늘 마음으로
삭이다 보니 가슴
깊이 우울의 습지가
생겨났고, 자존감은 아래로
향했다. 그런 성격이
표정에도, 옷을 고르는
취향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자문해
본다. 만약 나를
소개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저 현재
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라는, 외적인 배경
외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내가 나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듯, 타인의 시선
속에 비친 내 모습
또한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내 인상이 차갑고
어둡다고도 했고, 어떤
이는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 두 면모가
모두 나인 것을
인정하지만, 정작 나도
내 본질을 잘 알지
못한다. 내 안에는
여러 모습의 내가
있어, 가끔 나 자신도
놀라는 이면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여러
색깔이 혼합되어 무슨
색인지 알지 못하다가
불현듯 한 색깔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내 안의
이 복잡한 파동을
어떻게든 분류해 보고
싶어서였을까. 요즘 유행하는 MBTI 테스트나 별자리, 심지어 사주
명리 같은 것에
나를 대입하여 성격유형을
알아보기도 한다. 같은
종의 나무라 해도
가지의 형태와 뿌리의
깊이가 단 하나도
똑같지 않듯, 개개인의
성격이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성격유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무의식 속 자신의
내면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싶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드러낸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미지, 일상의 행동과
말만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결국 보이는
모습은 내면과 전혀
다를 수 있으며, 일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빙산의 일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은, 그 거대한
빙산 아래 가려진
진짜 나를 찾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이 물음을
통해 지나온 생의
궤적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과 가치를 찾기
위함일 게다. 사람은
살아가며 조금씩 다른
얼굴을 만들어 간다. 환경에 의해, 관계로 인해, 때로는 스스로
선택한 의지에 의해. 어쩌면 인생은
평생을 거쳐 묻고
답을 구하며,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무채색의 여인이란
말은 나를 돌아보고
탐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스카프를
모으기 시작한 것 같다. 옷은 밝게
못 입어도 스카프로
나를 표현하기 위한
몸짓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내 내면의
우울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일
수도, 스스로를 바꾸어
가기 위한 표면적인
시도였을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타인의
거울에 밝게 비치고
싶은 또 하나의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스카프를 매개로
나를 표출하고 내면의
변화 또한 꾀해
왔지만, 아직도 나는
어두운색의 옷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어둠은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 줄 고유한
배경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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