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26-05-29 09:30

민정희/(사)한국문협 밴쿠버 지부 회원

옷장 문을 열자, 색색의 스카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부터 원색이 섞인 대담한 무늬가 대부분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색상이다. 스카프는 물론 옷조차도 무늬 없는 단색이나 어두운 계열만 즐겨 입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어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비슷한 색과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미술 동아리에서 동료가 오늘도 무채색의 여인이 등장하셨군.” 하며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 호감은 있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이였다. 역시 미술 전공자라 색감에 민감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때부터 나의 모습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 색상 때문이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의미를 품은 말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두운색의 옷을 즐겨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자신을 뚜렷하게 내세우지 않는 성격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림의 스타일을 말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릴 나는 원색 쓰기를 주저했다. 어떤 색이든 흰색이나 다른 색을 섞어 썼기에 분위기 있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개성 있다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좋아하는 색상이나 어떤 색의 옷을 주로 입는가에 따라서 사람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나이 차가 많은 다섯 오빠 속에서 자란 나는, ‘여자는 사기그릇과 같아서 함부로 취급하면 깨질 있다라는 어른들 생각의 안에서 과분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지나친 보호는 의존성과 소심함으로 이어졌고, 또래의 아이들이 당연히 알아야 것을 제때 알지 못하는 늦된 아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사교성도 부족해 관심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지도, 먼저 말을 걸지도 못했다. 마음으로 삭이다 보니 가슴 깊이 우울의 습지가 생겨났고, 자존감은 아래로 향했다. 그런 성격이 표정에도, 옷을 고르는 취향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자문해 본다. 만약 나를 소개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할 있을까. 그저 현재 주부이자 아이의 엄마라는, 외적인 배경 외에 나를 설명할 있는 있을까. 내가 나를 온전히 정의할 없듯, 타인의 시선 속에 비친 모습 또한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인상이 차갑고 어둡다고도 했고, 어떤 이는 열정적이고 뜨거운 사람이라고도 했다. 면모가 모두 나인 것을 인정하지만, 정작 나도 본질을 알지 못한다. 안에는 여러 모습의 내가 있어, 가끔 자신도 놀라는 이면이 나타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여러 색깔이 혼합되어 무슨 색인지 알지 못하다가 불현듯 색깔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안의 복잡한 파동을 어떻게든 분류해 보고 싶어서였을까. 요즘 유행하는 MBTI 테스트나 별자리, 심지어 사주 명리 같은 것에 나를 대입하여 성격유형을 알아보기도 한다. 같은 종의 나무라 해도 가지의 형태와 뿌리의 깊이가 하나도 똑같지 않듯, 개개인의 성격이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있겠는가.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성격유형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무의식 자신의 내면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 싶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환경과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페르소나를 드러낸다. 따라서 겉모습이나 이미지, 일상의 행동과 말만으로 사람을 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결국 보이는 모습은 내면과 전혀 다를 있으며, 일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빙산의 일각일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은, 거대한 빙산 아래 가려진 진짜 나를 찾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도 물음을 통해 지나온 생의 궤적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앞으로 나아갈 삶의 방향과 가치를 찾기 위함일 게다. 사람은 살아가며 조금씩 다른 얼굴을 만들어 간다. 환경에 의해, 관계로 인해, 때로는 스스로 선택한 의지에 의해. 어쩌면 인생은 평생을 거쳐 묻고 답을 구하며,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르겠다.

 

무채색의 여인이란 말은 나를 돌아보고 탐구하게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스카프를 모으기 시작한 같다. 옷은 밝게 입어도 스카프로 나를 표현하기 위한 몸짓이었음을 부인할 없다. 내면의 우울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소극적인 방어일 수도, 스스로를 바꾸어 가기 위한 표면적인 시도였을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타인의 거울에 밝게 비치고 싶은 하나의 페르소나였을 것이다.

 

스카프를 매개로 나를 표출하고 내면의 변화 또한 꾀해 왔지만, 아직도 나는 어두운색의 옷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어둠은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나만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 고유한 배경이라는 것을.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말씀이 어눌한 자 2026.09.18 (금)
출석하는 교회의 금요 예배 시간을 통해 EM청년부 담당 목사님으로부터 인상 깊은 주제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출애굽기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내놓은 답은 인간적인 주저함 그 자체였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어눌한 자니이다.” 한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로...
민완기
거울 2026.09.18 (금)
참 못생겼다참 많이 늙었다넌 잘났냐넌 젊으냐웃다가       울다가       싸우다가   또 웃다가  오늘도 두 영감이 함께황혼길 간다늙었다 못생겼다서로서로 놀리며마주보고 웃으며한평생둘도 없는길벗이 되어 
임윤빈
펴둔 채 2026.09.17 (목)
정원의 테이블은 봄에 폈다. 여름 내내 펴져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펴져 있다. 한 번도 앉지 않았다.의자는 봄에 서로를 마주 보게 돌려두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라도 나눌 것처럼, 둘을 바짝 당겨 붙여 두었다. 여름내 그 자세 그대로, 아무도 앉지 않은 두 의자가 서로를 마주 본 채 비어 있었다.의자 위로 먼지가 앉았다. 먼지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앉는 법이 없어서, 바람이 몇 번이고 지나가고 볕이 몇 번이고 들었다 물러간 뒤에야 겨우 얇은 막을...
윤의정
즈라촉 2026.09.17 (목)
당신은 나를 본다나는 당신을 본다가벼이가만히 즈려보는촉촉한 마음그 속에 비친 나빛난다​카니나마치 작은 소녀인 양​어두운 밤반짝이는 당신검은 밀도를 밀어내며 별빛을 두른다한 줄기 빛을 건넨다나는 그 눈동자 속작은 아이​꼬레마치 별을 삼킨 아이인 양​당신의 눈그 깊이 내가 스며 있나니​*즈라촉​*즈라촉(러시아어 зрачок)는 ‘눈동자’를 가리키거나눈동자와 관련된 여러 시대의 언어의 표현이다.
하태린
낙엽의 낯빛이 붉게 물들고 바람도 선선해지는 가을이 되면, 북쪽에 살던 캐나다 구스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이사 갈 채비를 차렸다. 창공에 승리의 상징 같은 V자를 그리며 날아가는 구스들은 추운 북쪽 호숫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곳에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날갯죽지 깃털 속에 꿈을 숨겨 온 엄마 구스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자라날 때부터 연한 풀과 질긴 풀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어 체력이 유난히 좋았다. 게다가 더...
황정현
시절은 어느새 연분홍 자두꽃을 피워내는 중이다. 달력을 넘긴다. 손때 묻은 기억이 접힌 종이 위에 매달려 어제로 남는다. 지난달의 페이지를 뜯어내 버리면 한 달의 기억이 지워지거나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냥 뒤로 넘겨놓는다. 한 장씩 뒤로 밀려나면서 차곡차곡 쌓여 두터워지는 시간의 흔적. 어제의 두께는 한 달의 나를 품고 한 해의 나를 묵시한다. 여태 억지를 쓰며 새 달력 뒤의 벽에 붙박아 놓았던 지난해 달력을 이제 떠나보낸다. 달력을...
강은소
들꽃의 노래 2026.09.10 (목)
창조자의 섭리로봄의 문이 열리고 야생화의 작은 속삭임으로들녘마다 한 편의 시가 쓰인다 길섶의 민들레시냇가의 수선화돌 틈에 몸을 낮춘 할미꽃아무도 이름 불러 주지 않는이름 모를 꽃들까지 누가 먼저 오라 하지 않았는데도햇살이 따스해지면너희는 어느새환한 얼굴로 와 있구나 산들바람에 몸을 맡겨가만가만 춤을 추고말없이 향기를 피워 올리면하늘의 전령인벌새와 나비와 꿀벌이빛깔과 모양을 가리지 않고너희 곁으로 찾아...
김철훈
세월은내가 붙잡지 않아도저 혼자 흘러가고내마음은살아온 날들을하나씩 되돌아본다.젊은 날의 불꽃은이미 먼 데서 식었지만그 불꽃이 남긴 온기는아직도 내 안을 비춘다.나이 든다는 것은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조용히 내려놓는 일.기억이 흐려져도내가 살아낸 시간들은어디에도 사라지지 않는다.두려움이 찾아와도나는도망치지 않기로 한다흐려지는 날이 찾아와도내 마음만은흐려지지 않기를.남은 날들만큼은조용히,그러나 단단하게나로 살고...
이봉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