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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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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6-04-10 14:06

반숙자/(사)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다리와 다리 사이에 열 일곱 살 애기 초경 같은 빛깔이 어른댄다. 누가 장난삼아 색종이를 끼워뒀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겹겹의 잎 사이 안쪽 한 장이 그 빛깔을 푹 덮고 있다. 볼펜 끝으로 잎을 들춘 순간 아! 숨 막히는 황홀. 누가 볼세라 얼른 잎을 도로 덮어주는데 가슴이 뛴다. 처음이다.


​밖에는 눈보라 치고 영하 십 사 도의 혹한에 거실에 들여놓은 화초들은 철모르고 푸르러 커피를 마실 때면 커피잔을 들고 군자란 앞으로 갔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군자란이 내 집에 온 지 달포가 지나도록 잎들은 단순한 ​구도로 어제가 오늘인 듯 변화가 없었다. 새침데기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지금 가슴에서 다리까지 떨려 구부정하게 걸어서 소파에 앉았다.


열 두 서너 살쯤인가. 송판 때기 같던 가슴에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 것은. 그냥 가슴이아팠다. 혹여 어디에라도 가슴께가 부딪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가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자가 진단으로는 꼭 죽을 병이 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언니 그리고 삼촌이 함께 살았다. 언니는 나보다 여섯 살이 위지만 대범하고 사내 같아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언니보다 삼촌이 만만했다. 삼촌과 언니는 두 살 차이로 저녁이면 얼굴에 여드름을 싸느라 하나뿐 인 쪽 거울 쟁탈전이 벌어졌다. 나는 건넛방 삼촌에게 가서 삼촌 손을 내 가슴에 대주며 "아재야, 나 죽는다. 너무 아파." 하고 하소연을 했다. 언니는 무덤덤한데 삼촌은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쉿, 비밀이야." 하고는 엄마께 가서 말하라고 등을 떼밀었다. 그때 비밀이라고 강조하던 삼촌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큰 눈을 부라리며 입술에 검지를 세워 억지로 위엄을 부리던 얼굴,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고 장난을 치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그것이 상징이었던 것 같다. 아이가 소녀가 되는 과정의 변화, 그로부터 몇 년 지나서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서 엄마를 부르며 울며불며 부엌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뒤 곁 김치광으로 가더니 이슬을 보고는 놀란 듯 얼른 옷을 도로 입혔다.


오늘 군자란 잎 사이에서 나는 67년 전 그 충격의 격랑을 만난다.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얼른 잎으로 꽃을 가리며 가슴이 두근댔다. 이 두근거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비밀을 훔쳐본 것 같은…. 송판 때기 같던 가슴에 앵두만 한 유두가 봉긋해지며 여체는 비로소 비밀의 열쇠를 건네 받는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며 우주의 환희를 처음 배운다. 그 환희가 밀주일 때 여인은 애달프다는 것도 모른 채다. ​


군자란도 내 집에 올 때는 밍밍한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푸른 잎으로 밀봉하고 안으로부터 조용한 변화를 시도하는 생체의 리듬을 누가 눈치를 챘으랴. 이파리 댓잎뿐이던 포기 사이 누가 저토록 황홀한 비밀을 숨겨 놓았을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생명의 저 안쪽을. 겨울 들판에 서면 대지 깊숙이 잉태의 씨를 뿌려놓고 시침을 뚝 떼는 누가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랴. 화분에 눈길을 줄 때마다 군자란 포기가 물구나무서서 내 게로 걸어오는 환각이다. 나는 이 설렘을 사랑한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만물을 향한 호기심과 설렘은 바로 내 창작의 옹달샘이다. 심리학자 김정운은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변할 때 생기는 심리적 반응이 설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의 기준은 바로 이

설렘의 유무라고 하니 아무래도 나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해피니스트가 아니겠는가. 지금 군자란은 색종이 한 장에서 꽃송이 다섯 개로 불어나서 하루가 다르게 올라오고 있다. 소녀였던 아이가 여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늙어서 노파가 되는데 인생은 헤르메스의 그릇인 양 아직도 밀봉되어 있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납이나 아연 구리를 금으로 만들기 위해 적정한 비율로 섞어 헤르메스의 그릇에 넣어 밀봉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열을 가하는데 이때 만약에 그릇이 깨져 밀봉상태가 무효 될 때 연금술 과정이 모두가 어그러지고 만다. 사람이 태어날 때 저마다 헤르메스 그릇 하나씩을 선물 받은 것은 아닐까 싶다. 알에서 깨어나기 이전의 모습을 그 안에 담고, 가끔은 그 그릇이 깨져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생은 언제 연금술이 완성되어 제대로 된 그릇 하나 탄생할까. 자아완성이라는 먼 지평의 사막을 가며 세상은 모르는 것이 많아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신의 비밀. 탐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나는 헤르메스의 그릇에 담겨있는 구리 조각이라는 것. 내면의 공간에서 충실히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 나의 주인이신 연금술사의 처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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