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광고문의
연락처: 604-877-1178

열쇠 없는 집

반숙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12-26 16:23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람이 일생 동안 집을 몇 채나 갖고 사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을 수도 있고 평생 동안 단 한 채도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죄송하게도 우리는 아파트에 살면서 농장에 딸린 농막 한 채를 덤으로 가지고 산다.
아파트에서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농막은 산날망*에 거미집처럼 불어 있어 집이랄 것도 없으나 눈비를 피할 수 있고 소박하게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또한 지대가 높아서 아담한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공기가 맑아 처음 오는 사람들은 별장 같다고 하나 거미집 같은 별장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게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자질구레한 농사일로 매일이다시피 드나들지만 수확이 끝나고 새봄이 오기까지 농막은 빈집이다. 예외가 있다면 가끔씩 아파트가 답답하거나 눈이라도 내릴 때면 소풍 삼아 다녀올 때도 있지만 그나마 큰 눈에는 통행이 어렵다.
오래전에 농막에 밤손님이 든 일이 있다. 손님은 성격이 괄 했던 모양이다. 집도 아닌 것 같은 오두막을 청통같이 잠가 놓은 것이 화가 났던지 앞 베란다 유리문을 박살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귀한 자식이 폭행당한 것 같은 아픔이 있었다. 그 뒤로는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는데 가끔 누군가가 다녀가는 눈치다.
어떤 날은 라면을 끓여 먹은 흔적이 있고 어떤 날은 흙 발로 마루를 걸어 다닌 자국이 어지러울 때도 있다. 손님이 탐낼 만큼 귀한 살림집기는 없어도 주인의 입장에서는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드나드는 사람이 마뜩잖을 수도 있다.
  작년 겨울의 일이다. 동장군이 한바탕 활개를 친 뒤 궁금해서 올라갔다. 누가 또 다녀갔다. 이번 손님은 먼저 다녀간 손님과는 달랐다. 우선 그는 주방에서만 머문 듯 마루는 청소해 놓은 대로 깨끗했고 종이컵에 담배꽁초만 수북했다. 참이슬표 소주 두 병이 비워진 채로 있고 그 밖에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은 없었다. 허긴 음식을 해먹으려 해도 수돗물을 빼놓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변한 것이라면 장롱에 걸어 두었던 오리털 점퍼와 겨울 코트가 없어졌다.
  가끔씩 이런 일을 겪으며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누가 오죽하면 이 산골짜기를 찾아 들었을까. 마을에서도 동산을 넘어야 올 수 있는 집이고 허술하기가 짝이 없다. 무엇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정도인 데다가 뒷산을 타고 왔다면 이곳의 지리를 전연 모르는 사람의 우발적인 행위라고 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맘먹고 들렀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왜, 무엇 때문에,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눈보라치는 겨울 밤 그는 황량한 적막을 헤치며 왜 여기로 왔을까. 불 꺼진 집,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그리도 가슴에 치밀어 담배만 피웠을까. 그러고도 모자라 안주 없는 강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무엇을 체념하고 무엇을 얻었을까.
  수사관을 피해 다니는 남자? 아니면 4,5십대 실직가장? 6,7십대 남자라면 북풍이 살을 에는 날씨에 예까지 올라올 기력도 패기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들 교육비에 휘청거리는 4,5십대의 "젖은 가랑잎" 같은 남자가 어느 날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싶어 예까지 온 것일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다가 나는 싱겁게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편지 한 통을 쓰기 시작했다.
  누추한 집을 찾아오셨군요. 고요한 산천에서 하룻밤 단잠이 들었다면 감사합니다. 제왕이라 할지라도 고대광실에서 잠 못 들어 한다면 제왕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는 낮에는 땀을 흘리며 고달프게 일하고 저녁이 오면 사슴처럼 단잠에 빠져드는 농사꾼입니다.
손님, 무엇이 그대를 이 골짜기를 찾게 했는지는 모르나 혹시 저지른 실수 때문에 괴로워하시는지요. 실 수 한 번 했다고 불행해하지 마세요. 누구나 실수는 하잖아요. 그 실수 때문에 숨어 살아야 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너무 아깝지 않아요. 실직? 실연? 내 맘대로 상상해 봅니다.
그대는 내 집에 오신 손님일진대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건넌방에 가면 쉼멜표 피아노가 있습니다. 40년 전에 멈춰버린 시간의 단절 속에 이제는 녹슬고 낡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님, 부탁컨대 무슨 노래든지 한 곡만 쳐 보시기를 권합니다.
  나는 가끔 세상일이 꼬이고 힘이 들 때면 이 피아노에 앉아 천천히 몇 곡을 칩니다. 엊그제는 "즐거운 나의 집"을 쳤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처져 제 음향이 아니었으나 조율하지 않은 피아노 소리는 그대로 또 다른 여운이 있었습니다.
손님, 그대의 삶도 지금 조율이 되지 않아 힘겨운 것은 아닌지요. 만약 여름에 다시 올 수 있다면 새벽 밭으로 나가 보세요. 그리고 밭골에 앉아 낮게 고개 숙여 어깨를 비비며 자라는 풀꽃들이 분명 당신에게 무슨 말을 속삭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동산에 떠오르거든 책장 안쪽에 넣어둔 잘 익은 포도주로 새 출발을 위하여 축배를 드세요. 손님, 땀 흘린 만치 돌려주는 자연의 선물을 한 아름 받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내려가세요. 모쪼록 내가 없을 때 조용히 다녀가세요.
다시는 이 집에 오실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주방 식탁 위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라면과 물을 넉넉하게 준비해 놓고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열쇠 없는 꺼벙한 집이 한없이 자유스러워 보였다. 

*산날망 : 동네보다 지대가 높은 산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동쪽의 거리 2026.01.23 (금)
독도가앞서 밝아올 때울릉도의 등줄기인왕산의 오래된 벽봉황산의 그림자남한산성의 돌땅끝마을의 끝내 닿지 않는 손성산일출봉새천년 해안 샛바람길의 비린 새벽정동진. 호미곶사람들은산과 바다도시의 모서리마다각자의 동쪽을 세운다나는이름 하나 들고서 있었다간절곶아주 오래전간절함이 먼저 와우리 사이에 서 있었고말은해보다 늦었다빛이 오기 전 오빠는부르지 않아도 이미동쪽에 있었다가장 얇은 그 새벽나에게 동쪽은한 사람 서있던...
김회자
한글은 계시였다 2026.01.23 (금)
세계가 한국을 바라본다. Kpop의 박동, 드라마의 서사, 영화의 감정, 음식의 향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K’의 중심에는 조용히 빛나는 한글이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래 살고 나서야 비로소 깊이 깨닫는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도, 기술적 발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정신이 글자의 옷을 입고 세상에 다시 나타난 계시였다.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의 건국 이념에서 시작된다. 홍익인간—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라. 이 네 글자는 한 나라의 뿌리가...
심정석
 제목은 거창하게 대화의 기술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언어학자도 아니고 대화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느낀 점들을 개인적으로 피력해 보고자 한다.  사람이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인 고민도 털어놓고 싶고 이런저런 상담도 하고 싶지만, 잘 들어주지 않는 사람과는 말을 섞기도 꺼려진다. 남의 말을...
이현재
태풍 2026.01.23 (금)
난 바다 어디쯤외눈박이 눈을 하고달려오는 바람 하나거침없는 생이 부럽다 나 그렇게뜨겁게 산 적이 있었던가그렇게 겁 없이사랑한 적 있었던가 젖은 머리 풀고 질주하는구름기둥 끝에 매달려짧고 굵게 살다 죽는비결 한 수배워야 할까 보다
정금자
갓 지은 흰 쌀밥 같은삼백육십오 개의 이름 없는 하루 해와 달 경계에서 호명을 기다린다 아직 목울대에 후회가 걸려있는데때 묻은 손이다시 하루를 빚는다 덜 굳어 찌그러져도금이 번져 부스러져도 울음이 새지 않도록웃음 한 벌 문설주에 걸어 두고 욕심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먼저 박수를 내밀어야지 하루를 닫으며그래도 괜찮았다고 끄덕이게오늘의 이름 아래'사람' 쪽에 발 디딘다 응달로 찾아드는 얇은...
임현숙
  2025년 한 해 동안 읽은 책을 돌이켜 보니 온라인까지 합해서 모두 37권이다.   나이가 깊어 가니 읽는 속도도 느려지고, 읽으며 독해력이 떨어지니 자연 반복해서 읽게 되니 읽고 싶은 책 욕심은 많으면서도 읽는 양은 빈약한 셈이다.   누가 그랬던가, 늙어서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 책이나 실컷 읽어야겠다고 하면서 젊어서 책 읽기를 더디게 한다. 나이 먹어서 뭘 하겠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미룸이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해야 할...
한힘 심현섭
  어느 달 밝은 밤이다 해바라기 같은 둥근 달이 담장을 넘어 마당을 지나 툇마루로 올라오더니 방안을 기웃거린다. 방 안엔 한복에 한 뼘이나 되는 긴 수염을 늘어 틀이고 머리에서 눈썹까지 하얀 탈을 뒤집어쓴 칠성 할 배가 신선처럼 앉아 내일 약초 캐러 갈 도구들을 챙기고 있었다. 좋은 약재를 구하면 횡재를 하는 날이지만 헛 빵을 치는 날엔 다리 품만 파는 날이다. 밖에는 밤이 깊어 갈수록 바람소리가 사나워졌다.이때다 어디선가 한참 먼...
안오상
자식의 자식 2026.01.12 (월)
등에서 잠든 너를 내려놓지 않는 건내 어머니 골수를 먹고 자란 기억 때문무릎이 시큰거리다콧등까지 싸해지는 따스한 대물림 어제와 오늘도 혼동하는 너에게내일 다시 하자는 약속,울음을 삼키는 너의 눈을 피해주었던 걸 뺏는 건 참으로 곤란하지 동네 애들 다 데려간 피리 부는 아저씨집안 일 다 해도 미움 받는 신데렐라‘왜’냐고 묻는 삼십개월 너에게‘사람‘에 대해 무슨 설명 하리오 잎을 다 떨군 나무에 기댄 너의 숨소리찬 바람...
윤미숙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