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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없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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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5-12-26 16:23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사람이 일생 동안 집을 몇 채나 갖고 사는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을 수도 있고 평생 동안 단 한 채도 가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죄송하게도 우리는 아파트에 살면서 농장에 딸린 농막 한 채를 덤으로 가지고 산다.
아파트에서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농막은 산날망*에 거미집처럼 불어 있어 집이랄 것도 없으나 눈비를 피할 수 있고 소박하게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또한 지대가 높아서 아담한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공기가 맑아 처음 오는 사람들은 별장 같다고 하나 거미집 같은 별장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게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자질구레한 농사일로 매일이다시피 드나들지만 수확이 끝나고 새봄이 오기까지 농막은 빈집이다. 예외가 있다면 가끔씩 아파트가 답답하거나 눈이라도 내릴 때면 소풍 삼아 다녀올 때도 있지만 그나마 큰 눈에는 통행이 어렵다.
오래전에 농막에 밤손님이 든 일이 있다. 손님은 성격이 괄 했던 모양이다. 집도 아닌 것 같은 오두막을 청통같이 잠가 놓은 것이 화가 났던지 앞 베란다 유리문을 박살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귀한 자식이 폭행당한 것 같은 아픔이 있었다. 그 뒤로는 문을 잠그지 않고 지내는데 가끔 누군가가 다녀가는 눈치다.
어떤 날은 라면을 끓여 먹은 흔적이 있고 어떤 날은 흙 발로 마루를 걸어 다닌 자국이 어지러울 때도 있다. 손님이 탐낼 만큼 귀한 살림집기는 없어도 주인의 입장에서는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드나드는 사람이 마뜩잖을 수도 있다.
  작년 겨울의 일이다. 동장군이 한바탕 활개를 친 뒤 궁금해서 올라갔다. 누가 또 다녀갔다. 이번 손님은 먼저 다녀간 손님과는 달랐다. 우선 그는 주방에서만 머문 듯 마루는 청소해 놓은 대로 깨끗했고 종이컵에 담배꽁초만 수북했다. 참이슬표 소주 두 병이 비워진 채로 있고 그 밖에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은 없었다. 허긴 음식을 해먹으려 해도 수돗물을 빼놓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변한 것이라면 장롱에 걸어 두었던 오리털 점퍼와 겨울 코트가 없어졌다.
  가끔씩 이런 일을 겪으며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누가 오죽하면 이 산골짜기를 찾아 들었을까. 마을에서도 동산을 넘어야 올 수 있는 집이고 허술하기가 짝이 없다. 무엇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구미가 당기지 않을 정도인 데다가 뒷산을 타고 왔다면 이곳의 지리를 전연 모르는 사람의 우발적인 행위라고 밖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맘먹고 들렀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왜, 무엇 때문에,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눈보라치는 겨울 밤 그는 황량한 적막을 헤치며 왜 여기로 왔을까. 불 꺼진 집,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집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엇이 그리도 가슴에 치밀어 담배만 피웠을까. 그러고도 모자라 안주 없는 강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며 무엇을 체념하고 무엇을 얻었을까.
  수사관을 피해 다니는 남자? 아니면 4,5십대 실직가장? 6,7십대 남자라면 북풍이 살을 에는 날씨에 예까지 올라올 기력도 패기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들 교육비에 휘청거리는 4,5십대의 "젖은 가랑잎" 같은 남자가 어느 날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싶어 예까지 온 것일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다가 나는 싱겁게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에게 편지 한 통을 쓰기 시작했다.
  누추한 집을 찾아오셨군요. 고요한 산천에서 하룻밤 단잠이 들었다면 감사합니다. 제왕이라 할지라도 고대광실에서 잠 못 들어 한다면 제왕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는 낮에는 땀을 흘리며 고달프게 일하고 저녁이 오면 사슴처럼 단잠에 빠져드는 농사꾼입니다.
손님, 무엇이 그대를 이 골짜기를 찾게 했는지는 모르나 혹시 저지른 실수 때문에 괴로워하시는지요. 실 수 한 번 했다고 불행해하지 마세요. 누구나 실수는 하잖아요. 그 실수 때문에 숨어 살아야 한다면 당신의 미래가 너무 아깝지 않아요. 실직? 실연? 내 맘대로 상상해 봅니다.
그대는 내 집에 오신 손님일진대 아무것도 대접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건넌방에 가면 쉼멜표 피아노가 있습니다. 40년 전에 멈춰버린 시간의 단절 속에 이제는 녹슬고 낡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님, 부탁컨대 무슨 노래든지 한 곡만 쳐 보시기를 권합니다.
  나는 가끔 세상일이 꼬이고 힘이 들 때면 이 피아노에 앉아 천천히 몇 곡을 칩니다. 엊그제는 "즐거운 나의 집"을 쳤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처져 제 음향이 아니었으나 조율하지 않은 피아노 소리는 그대로 또 다른 여운이 있었습니다.
손님, 그대의 삶도 지금 조율이 되지 않아 힘겨운 것은 아닌지요. 만약 여름에 다시 올 수 있다면 새벽 밭으로 나가 보세요. 그리고 밭골에 앉아 낮게 고개 숙여 어깨를 비비며 자라는 풀꽃들이 분명 당신에게 무슨 말을 속삭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동산에 떠오르거든 책장 안쪽에 넣어둔 잘 익은 포도주로 새 출발을 위하여 축배를 드세요. 손님, 땀 흘린 만치 돌려주는 자연의 선물을 한 아름 받고 씩씩한 발걸음으로 내려가세요. 모쪼록 내가 없을 때 조용히 다녀가세요.
다시는 이 집에 오실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주방 식탁 위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라면과 물을 넉넉하게 준비해 놓고 내려오다 뒤돌아보니 열쇠 없는 꺼벙한 집이 한없이 자유스러워 보였다. 

*산날망 : 동네보다 지대가 높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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