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가을 금관

정목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10-10 15:42

정목일 / 캐나다 한국문협 고문
1.
언젠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라 금관을 보는 순간 오랫동안 나는 한 그루 황금빛 나무를 연상했었다.
박물관 유리 진열대 안에 들어 있는 천년 신라 유물들은 대개 시간의 침식에 못 이겨 퀴퀴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망각 속에 덩그렇게 놓여 있었지만 금관만은 어둠 속에서 촛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생명의 빛깔로 너무나 선연한 모습으로 살아 있어 천년 신라를 말해 주는 촛불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나는 우두커니 이 천 년 신라의 황금빛 촛불 앞에 서서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금관의 출자형(出子型)은 그 형태가 나뭇가지를 본뜬 것처럼 보였다. 어떤 학자는 사슴 뿔을 형상나무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나뭇가지처럼 여겨졌다. 그냥 나무가 아니라, 항상 새롭게 싹터서 영원 속에 가지를 뻗는 무성한 생명력의 나무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황금빛 가지에 심엽형(心葉型) 영락이 달려 별빛처럼 눈 부셨다. 황금빛 가지는 푸른 하늘을 향해 뻗쳐 있고, 그 가지 끝에 심엽형 영락이 달려 영원한 노래를 뿌려주고 있었다.

순금 빛의 나무, 영원히 시들지 않을 생명의 나무야 말로 신라인이 염원했던 마음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신라 금관을 보는 순간, 영원 속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껏 하늘로 가지를 뻗치고 싶은 신라인의 마음이 금관에 피어 있음을 느꼈다.

이미 왕조와 임금은 사라지고 없으나 신라 금관은 유리 진열대 속에서 심엽형의 영락을 번쩍거리며 숨쉬고 있었다. 그 영락들이 내는 순금 빛살에 천년 세월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2
어느 날 나는 뜻밖에도 박물관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금관을 보았다. 황금빛 가지들을 하늘 높이 뻗친 세 개의 금관. 그 것은 놀랍게도 아직 내가 보지 못했던 살아 있는 금관이었다. 황금빛 가지가 청명한 하늘로 뻗어 나가 마치 수 천 개 아니 수 만개의 출자형을 이루었고, 순금빛 나비형 영락을 달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에 너무 맑게 열려 있어서 피리를 불면 가장 잘 퍼져 나갈 듯한 가을이었다. 가을의 한복판에 세 그루 금관이 하늘 높이 서 있었다. 육백 년 수령의 세 그루의 은행나무, 살아있는 가을의 금관이었다. 가을의 찬양이었고 극치였다. 세 그루 은행나무의 황금빛깔로 가을의 절정을 그 자신이 가을 금관이 되어 번쩍거리고 있었다. 아직 그토록 장엄하고 화려한 가을 빛깔을 바라 본적이 없었다.

몇 해 전 계룡산 동학사에서 한 그루의 느티나무와 만난 적이 있는데, 붉은 느티나무 단풍과는 또 다른 느낌이 가슴속으로 물결쳐 왔다. 서녘 하늘로 막 사라지려는 놀처럼 선홍 빛의 단풍은 섬찟한 아름다움으로 가슴을 적셔주었지만 순금빛 은행나무들은 황홀하고 장엄한 신비와 어떤 자비의 품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육백년쯤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가을을 맞고 있는 은행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이보다 선명히 가을의 극치감을 그려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신라 금관의 순금 영락이 흔들리듯 수많은 순금빛 잎사귀들을 영락처럼 영겁 속에 달고서 우뚝 서 있었다. 이 세 그루의 은행나무들은 가을의 금관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육백 년 전의 은행나무가 빚어내는 가을의 황홀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된다 하여 은행나무가 모두 똑같은 빛깔로 물들 수는 없을 게다. 백년 된 나무의 단풍과 천년 된 나무의 단풍이 어떻게 같을 수 있으랴. 육백 년 은행나무에 열린 은행들을 바라보았다. 순금의 잎들 속에 달려 있는 순금의 열매. 나무는 은행잎을 바람에 날리며 영원 속에 가을의 교향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가을 연주에 취한 듯 은행나무 잎들이 나비가 되어 떨어지고 있다. 은행 알들이 저절로 툭툭 가을의 한복판으로 떨어지고 있다. 농한 가을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 육백 년의 세월 속으로 한 해의 가을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 속을 물들여 놓은 찰나의 빛깔이었다. 은행나무 잎을 손바닥에 올려다 놓았다. 육백 년 은행나무의 삶이 잎맥 속에 물들어 있었다. 육백 년 은행나무의 삶이 잎맥 속에 물들어 있었다. 육백 년의 햇살과 바람과 빗방울의 말들이 순금빛 단풍 되어 떨어져 있었다.

3
온양에서 열린 수필문학 세미나를 마치고 인근에 있는 맹씨 행단(孟氏杏壇)을 찾기로 했다. 내가 시간을 내어 문학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은 평소 글로만 익혀 오던 필자들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맹씨 행단은 조선시대 명재상(名宰相)이며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진 맹사성(孟思誠)의 고택 (古宅)이 있는 곳이다. 이곳엔 수백 년 자란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단(壇)을 쌓았기 때문에 맹씨 행단이라고 부른다.

맹사성의 고택을 본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수백 년 자란 은행나무와 대면한다는 기대는 자못 설렘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수백 년 자란 은행나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순간의 황홀한 환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맹씨 행단에 도착하여 육백 년 수령(樹齡)의 세 그루 은행나무와 만났다. 이 은행나무들은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맹사성이 심은 나무들로써 오른편의 두 그루는 마치 쌍둥이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는데 약 육백 년의 수령에 높이 35미터, 나무 둘레가 약 십 미터나 되는 거목이었다. 왼편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어 쌍벽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나무는 570년 수령인데 오른쪽의 은행나무와 비슷한 높이로 서 있었다.

고택을 지키며 살고 있는 후손의 살림집이 있어서 맹사성의 유물을 볼 수 있었다. 옥 피리 한 개와 벼루였다. 당대의 시인이요, 음악가였던 맹사성이 평소 아꼈던 옥피리와 벼루를 보면서 밖에 그가 심어놓은 은행나무가 떠올랐다. 생전에 가을의 이맘 때쯤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멀리 영원의 하늘에다 옥피리를 불었을 것이다. 또 불현듯 먹을 갈아 시를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으리라. 아깝게도 맹사성의 유물인 옥 피리 중간 부분이 부러져 있어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옥피리를 보고 다시 마당에 나오니 세 그루의 은행나무가 만드는 황금빛 가을 풍경 위로 어디서 옥 피리 소리가 은은히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육백 년 전 은행나무가 해마다 가을을 맞으면서 가슴속에 간직해 두었던 악상 한 부분을 끄집어내어 영원의 하늘에다 불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맹씨 행단에 와서 세 그루의 은행나무가 빚는 가을 교향악을 들었다. 나 에게도 한 순간이나마 은행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삶의 순간이 있기를 바라고 싶었다.

은행나무는 가을 금관이 되어 육백 년 전의 명상과 노래를 천지 사방에 마구 뿌리고 있었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다시 피어나는 꽃 2026.05.08 (금)
나는밴쿠버의 봄 한가운데다시 선다고요히 숨을 고른다 흐드러진 꽃들 사이아직 피지 않은 하나보이지 않는 곳에서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긴 겨울은나를 꺾지 못하고도리어 나를 묻어더 단단히 길러낸다 이제는 안다피어남이란우연이 아닌의지의 시간임을 한 번 더스스로를 일으켜나의 자리에서새벽 머금은 불빛으로  A Flower Blooming Again            Poem by Lotus...
로터스 정병연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나기 전, 도시가 폭파되는 뉴스 화면이 내 머릿속에선 떠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터키와 국경을 접한 이란에서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이, 그쪽으로 가야 하는 내겐 마치 심장 가까이에서 울리는 경보음처럼 들렸다. 가지 않아도 될 이유는 충분했고, 두려워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내 머리는 최악을 상상했고, 나를 멈추게 하려는 공포 회로가 빠르게...
박정은
존재 2026.05.07 (목)
비 오는 여름, 있어도 없어도 그만일 듯한 개망초꽃이 되어 들판에 나가 보았어. 비안개 속으로…….누가 치는 것일까. 한 가닥 실바람 끝에서 실로폰 소리가 들려왔어. 무논에 펼쳐 놓은 초록빛 융단위에 문득 드러눕고 싶었어. 그냥 논바닥 위에 누워 버릴까……. 한 포기 벼가 되는 거야. 한 알의비안개 미립자가 되는 거야. 무논의 물과 부드러운 흙에 닿아 있는 벼들의 수염뿌리가 되는 거야.희뿌옇게 비안개 속에 펼쳐진 외로움의 광막한 공간-....
정목일
청춘의 빛​안(An)이라이라 불리는 별빛오천 년 전 수메르인이 보았던날 선 별의 조각아니 예리한 칼날 가시다​그날 밤표창처럼 휘익 날아와당신의 심장에 꽂힌다늘 품 안에서 빌어온 탓이다​가슴 속 불꽃을 태우며우웅— 진동한다핏기 없는 떨림오로지 가슴으로 받아낸단발마뿐​참지 못한 당신은심장의 별을 기어이 뽑아다시 밤하늘 저 멀리 던진다날아간 표창은안드로메다의 이마에 부드럽게 착,곤지가 되었다당신의 단발마는 그녀의...
하태린
다시 만나는 길 2026.05.01 (금)
길을 가다 길이 나누어지는 곳에 꽃을 심는다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던 길가다 보면 곧은 길은 휘어지고가는 이도 길 따라 굽어지고저버렸던 것들이 휘돌아 다시 올지 모를 기로에하얀 물망초 잠잠히 피어 서성인다
자명
뉴욕 일기 2026.05.01 (금)
금발의 미녀가 귀여운 개를 이끌고 허드슨 강변을 거닐고, 노부부가 산책하는 센트럴 파크의 한가로움, 월스트리트를 숨 가쁘게 오가는 화이트칼라들의 모습은 절묘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TV 화면을 통해 비추어지는 이곳 맨해튼은 누구나 한 번쯤 동경하게 되는 도시다. 그러나 처음 발을 내디딘 이들은 한결같이 실망과 당혹감을 경험하곤 한다. 지독한 교통체증, 좁고 불결한 거리, 곳곳에 늘어선 부랑자들과 끊이지 않는 사이렌 소리. 비라도...
자명
다시 피어나는 꽃 2026.05.01 (금)
나는밴쿠버의 봄 한가운데다시 선다고요히 숨을 고른다흐드러진 꽃들 사이아직 피지 않은 하나보이지 않는 곳에서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긴 겨울은나를 꺾지 못하고도리어 나를 묻어더 단단히 길러냈다이제는 안다피어남이란우연이 아닌의지의 시간임을한 번 더스스로를 일으켜나의 자리에서새벽 머금은 불빛으로            A Flower Blooming...
로터스 정
AI와 망설임 2026.04.30 (목)
“와! 이걸 정말 직접 작곡을 하고, 노래도 하신 거예요?” 노래를 듣고 놀라서 물어본 질문에,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직접 쓴 노랫말에 곡을 붙이고, 보컬(음성)까지 넣어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예전 ‘시리’와 ‘알렉사’처럼 단순히 사람이 시키는 명령을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처럼 예술 창작분야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나도 AI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상에서 궁금한 점이 있거나, 문제가...
정재욱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