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달빛과 나비

최민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7-18 15:48

최민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황병기 선생의 가야금에서는 달빛냄새가 난다. 청아한 그의 가야금 연주는 댓잎에 듣는 빗방울이었다가, 빠르게 일어나는 구름이었다가, 휘몰아치는 눈보라였다가, 이윽고 고요한 달빛이 되어 천지간에 흐뭇이 내려앉는다. 잦아지는가 싶다가 사뿐 살아나는 산조의 선율은 천상의 궁궐에 사는 요정이 서둘러 은하수를 건너가는 작고 날랜 걸음새도 같고, 그 요정의 옷자락에 묻어 있는 열 사흘 달빛 같기도 하다.
흰 명주 두루마기를 단정하게 입고 무대 위에 앉아 있던 선생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조용한 카리스마라고 할까? 옷고름을 한 쪽으로 가지런히 개키고 정좌를 하고 앉은 모습에서 긴 세월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기품이 넉넉하게 배어나는 듯하였다. 그가 악기를 받드는 손길은 첫날 밤 새신랑이 신부의 저고리 앞섶을 풀 듯, 조심스럽고도 경건하였다. 어떤 무대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대가다운 풍모라 할까.
선생의 가야금소리에서 나는 노을 속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만나고, 결 고운 비단치마가 풀숲을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이른 봄, 꽃들이 벙글어 터지는 소리와 늦가을 들녘의 바람소리를 만난다.
  명기(名器)도 명기(名技)를 만나야 빛을 발하는 법. 좋은 연주가를 만나지 못한 악기란 나무토막에 불과할 뿐이다. 벙어리 나무통에 혼을 불어넣어 감추어진 소리를 길어 올리는 일이 훌륭한 연주가의 몫인 것이다. 그가 아껴 연주하는 가야금은 자고동(自枯桐)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자고동이란 바위틈 같은 데서 자라다 스스로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일컫는데, 악기 중에서도 가야금은 자고동으로 만든 것을 최상으로 친다. 밭둑에서 쉽게 자란 오동은 소리가 잘 나지 않고 힘들게 자란 오동일수록 좋은 소리가 난다 하니, 맑고 야무진 소리를 내는 대금이 쌍골죽과 같은, 돌연변이성 병죽(病竹)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시련과 좌절을 겪은 사람만이 인생의 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듯이, 한이 한없이 안으로 잦아들어 죽을 고비에 이르러야만 심금을 뒤흔드는 절창의 가락을 쏟아놓게 되는 것일까.
  선생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고 유려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잠든 가얏고를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뜯고 퉁기고 누르고 흔드는 손놀림이 성애를 알지 못하는 신부의 관능을 지극한 사랑으로 일깨워 가는 남정네의 손길만큼이나 정성스러워 보였다.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를 거쳐 휘모리로 풀어내는 산조가락의 흥취는 켜켜이 쌓인 여인의 정한이 주춤주춤 불씨를 머금다 마침내는 환희의 절정으로 치 달아 휘황한 불꽃으로 산화해버리는, 한바탕 육체의 향연과도 같았다. 즐거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되 비통하지 않은(樂而不流 哀而不悲), 선계의 가락이 달빛처럼 충만하다. 나도 가만히 눈을 감는다.
  신 새벽 호숫가. 이제 막 번데기에서 깨어난 나비가 달빛에 젖은 날개를 턴다. 조금씩, 조금씩 푸드덕거리며 서툰 날갯짓을 시작한다. 달빛 사이로, 나비가 날아오른다. 한 마리, 또 한 마리...... 노랑 바탕에 까만 무늬가 찍힌 호랑나비, 보랏빛 작은 날개를 가진 부전 나비, 모시 나비, 제비 나비, 배추 흰나비, 꼬리 명주 나비...... 하늘은 오색 날개로 눈부시고, 날갯짓 소리로 세상이 현란하다. 연주가와 악기가 혼연일체로 어우러지는 신비스런 법열의 춤사위. 도도한 악흥이 빛의 꽃가루가 되어 칠흑의 세상 위에 쏟아져 내린다.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나비들이 하나 둘 내려앉는다. 술렁이는 축제도 막을 내리고 호수에는 달빛만 교교하다. 제의를 치르듯 숙연하게 줄을 뜯던 선생의 손길도 멈추어 있다. 지악무성(至樂無聲) - 소리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고즈넉한 정적이 깃든다. 밝은 달무리를 삼킨 것처럼 비로소 가슴이 환하게 트여 온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홍익인간의 개념 2026.10.09 (금)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마음둘 곳이 없을 때는부모님을 생각하세요.  헤어짐과 만남이 서로 갈등을 쌓아 놓을 때는설렜던 기억만 생각하세요.  기분이 우울하거나 감정이 내려앉을 때는깊은 계곡 맑은 물을 찾아보세요.  우리가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터를 잡고 생활하고 있다면  또 그곳의 생활에 충실해하루의 일상이 바쁘게 회전하다가언뜻 어린 시절의 고귀하게 남아있는추억을 생각하고  더할 나위 없이...
송요상
에버그린 하우스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오래된 요양 병동이다.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노란 벽돌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오십 년이 넘은 낡은 건물은 새로 들어선 병동 맞은 편에 낮게 웅크리고 있다.    요양원이나 장기 요양시설에는 에버그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 많다. 상록수는 사철 내내 잎이 푸른 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맑은 공기와 생명력이 가득한 상록수 숲의 인상과 달리 요양 병동은 잿빛 하늘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이주령
아파트 9층인 우리 집 거실에서 베란다 쪽 소파에 앉으면 사거리가 보인다. 건너편 아파트와 시내로 나가는 길이 교차되는 길이다. 그 사거리를 바라보며 가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다. 신호에 따라 밀려왔다 밀려가고 달리다 멈추고 하는, 하등 신기할 것 없는 차량의 행렬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저렇게 많은 차들은 대관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새벽부터 밤중까지 끊임없이 굴러가는 지친 바퀴들은 언제 어디쯤에서 쉬게 될 것인가. '나는 바퀴를...
최민자
호모 사피엔스 2026.10.08 (목)
우쭐대는 글 들과 퍼즐처럼 늘어놓은 낱말들로 인간이 지성이라 쌓아놓은 성벽 위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을 뒤적이며 짐작으로 떠들고 떠들며 이름 부쳐놓고 이름 부쳐놓고 킬킬대는 호모 사피엔스  먼 길 돌고 돌아 여기 인공지능의 지성을 빌어 태초에 생명이 탄생하고 태초의 생명이 헤어진 길 그 헤어진 출발 선에서 다시 만나 모인다면 모든 생명들 한 동아리로 돌아가 그 최초의 언어로 말문의 장벽은 허물리고 그때 굶주린...
조규남
해외에 살면서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지 않게 되면, 한국에 갈 일이 점차 줄어든다. 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겨들었는데, 작년에 어머님마저 돌아가시니 서글픈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당장 한국에 가서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형제자매가 있어도 며칠은 괜찮겠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 불편하다. 그래서 묵을 곳을 인터넷을 통해 구했다.    예전에 엄마 집에 머물 때는 모든 것이 익숙해서 몇 년 만에...
박혜정
탈피 2026.10.02 (금)
검은 물속 바위 아래 웅크린가재 한 마리가 몸을 비틀고 있다살아남으려 껴입은 갑옷은 어느새숨을 옥죄는 감옥이 되었다터져 버릴 것 같은 몸을좁은 문틈으로 밀어낸다죽음의 동굴을 빠져나온다무방비하고 말랑한 새 몸가재는 벗어낸 뿌연 몸뚱이와 마주한다나를 지키던 세계를조각조각 씹어 삼켜새로운 갑옷을 만든다다음 죽음까지 또 한 번의 영원을 준비한다유명한 그림 속 붉은 가재를 떠올리다고개를 내젓고는청록의 꼬리를 접었다 펴물살을...
이인숙
꽃의 체온 2026.10.01 (목)
     인사동에 가면 '볼가'라는 찻집이 있다.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실내에 들어서면 창가에 풀꽃들이 도열해서 길손들을 반겨준다. 깜찍하게 예쁜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살며시 꽃잎을 만져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꺾고 싶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유욕이 발동을 하는 것일까. 꽃 앞에서 해 보는 생각이지만 내가 꽃잎을 만져보는 더 큰 이유는 생화인가 조화인가 알아보기 위해서다....
반숙자
감 2026.10.01 (목)
          1. 감 꽃 샛결바람 따스히 감 꽃이 떨어져요 장독대 물들이고 담장아래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가요   밭일 나간 엄마에게 막내소식 들려주려 바삐 바삐 떠나가다 가지 끝에 결린 바람   맴을 돌다 사분사분 감 꽃만 흩날려요   샛결바람 따스히 떨어진 감 꽃이 내 마음 물들이고 발치 아래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가요   2. 목걸이 실에 꿰어 만든 목걸이 엄마 기다리다 길어진 모가지에 드리우고...
김호정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