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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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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9-16 09:30

양한석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어느 날 한 그림 앞에서 나는 솟구치는 힘을 느꼈다. <푸른 말>이란 제목의 그림이었는데 독일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의 1911년 작품이었다. 칠순을 코앞에 둔 내 노년의 반사 작용이었을까. 우선 이 그림이 각별히 내게 다가오게 된 계기는 해변 기마 경비 순찰대를 마주치면서 시작되었다. 말이 주는 위용감에 발걸음이 멈춰졌으며,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운 말의 모습과 그 크기에 압도감이 먼저 일어나기도 했다. 그 뒤로 말의 매력에 한참 빠져들기 시작했다. 말 등 위에 올라 장발 같은 말갈기를 쓰다듬으며 타고 가는 사람의 모습은 의연하면서도 당당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튼튼한 말 다리의 도드라지게 뭉쳐있는 근육질은 내게 강한 탄력감을 주었다.

승마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골든 이어즈(Golden Ears) 산을 찾아 다니면서 더욱 끌리게 되었다. 숲속에는 승마길이 여러 군데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길로 말을 타고 가는 광경을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그때마다 자신 속에 감춰져 있던 기마 민족의 본성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쭉 뻗은 나무 숲길을 따라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은 얼마나 늠름하고 멋진 일일까! 푸른 자연 속에서 동물과 한 몸이 되어 일어나는 경이로움은 얼마나 클 것인가!

찬찬히 이 그림을 감상하면서 여러 생각이 스쳐 갔다. 약 이백여 종이 있다는 말 종류 중에서 그림 속에 보이는 <푸른 말>은 사실 지구상에 없다. 작품의 이미지로 표현된 청색은 건장하고 강인한 남성의 힘찬 기질을 나타낸 것이라 보면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 반 고흐의 일생처럼, 프란츠 마르크는 꽃다운 36세의 나이로 일차 세계 대전 중에 전사했다. 산업화로 잃어가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가 사랑하던 동물의 그림을 통하여 추구해 나갔다. 평생 동물만 그려가면서 자연스러운 본래 순수함을 찾고자 했다. 프란츠에게 말은 그와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면서 커다란 활동력을 안겨준 고마운 동반자가 되었던 것이다.

말은 방향 감각이 탁월하고, 서서 잠을 잘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다. 툭 튀어나온 커다란 눈망울과 길쭉한 얼굴 생김새는 무언가 갈망하는 호소력을 느끼게 한다. 이 그림에서 그가 얼마나 말과 친하고 애정이 깊었는지 말을 그린 부분이 화면 속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둥그런 눈을 지그시 감은 말의 정적인 표정은 기운찬 화폭 속에서 동물과의 어떤 정신적인 친화감마저 일으키고 있다. 그 후로 나는 말을 대상으로 그렸던 한국의 화가들도 살펴보게 되었다. 조선 후기, 오원 장승업이 그린 군마도와 현대에 와서 운보 김기창의 군마도가 인상에 남았다. 운보는 청력 상실과 언어가 어눌한 장애인이었지만, 이를 극복하려는 예술의 힘으로 역동적인 군마도를 막힘없이 그려냈다. 이러한 그림들을 살펴보면서 어떤 공통점을 찾게 되었다. 대상을 묘사할 때, 화가는 감정 이입된 동물의 특성과 기질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좀 더 말에 관한 생각을 넓히다가 말이 던져주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인류 구원을 완성하시는 결정적 시점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출발 장면이 사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하나님의 한없는 겸비와 사랑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실 때에, 그분은 뉘이실 자리조차도 없어 말구유 안에서 첫울음을 터뜨리셨다. 예수님은 수많은 생명의 말씀으로 가르치셨고,
치유와 기적을 일으키심으로 많은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로마의 권력 앞에서 주님의 시작은 그야말로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왜 커다란 준마를 타고 가셔도 턱없이 부족할 판국에 매어놓은 나귀를 쓰시겠다고 풀어 가져오라 했는지 궁금해질 뿐이다. 참으로 초라한 모양새가 조롱과 웃음거리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죄악의 예루살렘을 향하신 주님의 출발은 이 세상을 짊어진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하나님과 한 몸 되어 뜻을 이루시는 길에서 철저하게 낮아지심으로 순종의 본을 보이신 어린 양과 같으셨다.

나귀는 말보다 다리가 짧아 체구가 작지만, 귀가 길고 힘이 무척 세다. 짐을 운반하는 가축으로 주로 애용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나귀가 태어날 때부터 등짝에 나타나는 십자 줄무늬가 아롱져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어 어떤 연상이 일어나게 됐다. 과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암시하려고 애초부터 십자 줄무늬가 있는 나귀를 타고 가신 것일까? 아니면 매어진 나귀를 풀어 오라 하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의도였을까? 빌레몬이란 가장 짧은 옥중 서신을 보면, 주인 빌레몬의 눈을 피해 달아난 종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라는 당부의 내용이 나온다. 야생마와 같은 오네시모를 길들여 가는 온유한 사랑과 용서가 무엇인지 감동깊이 전해주고 있다. 이렇듯 나는 말을 주제로 삼은 그림을 보면서 구원에 이르는 영원한 생명을 운반하는 십자가를 떠올리며 동시에 승마의 꿈을 꾸기도 하고 한쪽엔 말을 기르는 목장까지도 있으면 좋겠다고 비약된 공상을 펼쳐보기도 한다. 이 나이에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은근히 자신의 처지를 살펴보지만 그리 불가능한 노릇도 아니다. 그래도 돈내기하는 경마장까진 안 가리라 다짐하며 이만큼 주신 것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고 노래한 청마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가 떠오르면서, 나도 앞으로 문마라는 아호를 지어볼까, 생각 중이다. 나중에 글 말이 잘 달릴지, 자못 궁금해져 온다. 요한 계시록 6장에 등장하는 일곱 봉인과 네 마리의 말들 백마, 홍마, 흑마, 황녹마 그리고 말 탄 사람이 들고 있는 무기의 상징성을 오늘의 현실과 비교해 가며 풀어보려고 한다. 어디선가 가을 햇살을 닮은 밝고, 가느다란 빛들이 깊숙이 비쳐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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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쏘았을까독침 날아와심장에 박힌다벌떼는 귓속에까치는 머리에 살아서내 안에 서러운 항아리괜찮다 괜찮다고 말해본다아니다 아직은 아프다불면의 따가운 눈잿빛 거리를 서성인다보라눈보라 치는 날의 쥐똥나무를각 세워 몸통 잘린 채로홀로 푸르르다시렁 위 등불 켜고천 길 아래로 무릎 꿇고옹이진 마음 비워내던 날길모퉁이 키 작은 그 나무나를 보고 말한다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라고꾸욱하얀 그 꽃향기 가슴에 찍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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