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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도 시차가 있어서

허정희 ch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6-06-04 14:10

허정희/(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이사 온 아파트 1층에 요가 센터가 들어섰다. 유리문이 열릴 때마다 습한 열기와 함께 땀에 젖은 사람들이 요가 매트를 어깨에 메고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낯설었으나,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들이 거리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며 문안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그들의 표정에는 몸속의 묵은 것을 털어내고 나온 사람들만의 가벼움이 있었다. 땀방울은 단순히 운동의 흔적이라기보다 무엇인가를 비워낸 정화의 표식처럼 보였다. 호기심은 여름의 열기보다 강렬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유리문에 적힌 ‘옥시젠 요가(oxygen yoga)’를 검색해 보았다. 원적외선으로 달궈진 방에서 진행되는 퓨전 요가였다. 설명 속에 적힌 ‘해독 효과’라는 문구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문득 내 안에도 빠져나가지 못한 묵은 독소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 잠시 고국을 방문했을 때, 친구가 무심코 던진 ”너는 변한 것 같아”라는 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나는 예전의 나를 잃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 달라져 버린 내 모습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고국과 이곳 사이의 시차처럼, 그 문장은 내 마음에 늦게 도착해 자꾸만 덧났다. 어떤 설명도, 반박도 할 수 없는 문장이 가슴속에서 부풀어 올라 나를 답답하게 짓눌렀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땀과 함께 그녀의 말을 흘려보낼 수 있다면 나도 다시 가벼워질 수 있을까. 


그날 저녁, 나는 아래층 요가 센터로 내려갔다. “10일에 15달러, 정말 ‘언빌리버블’ 딜이에요.”라며 직원은 작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묘하게 섞인 그녀의 억양에 웃음이 났지만, 머릿속엔 오직 ‘해독’이라는 단어만 맴돌았다. 나의 오랜 무거움을 덜어내는 값치고는 너무 저렴한 가격 같았다. 나는 홀린 듯 그녀가 내민 단말기의 결제 버튼을 눌렀다. 


첫 수업 날, 태양은 남은 열기를 모두 밀어 넣듯 나를 요가실 안으로 떠밀었다.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어두운 방, 흔들리는 촛불, 뜨거운 공기와 땀 냄새가 뒤섞여 숨이 막혔다. 사람들은 의식을 준비하는 사제들처럼 말없이 매트를 펴고 누웠다. “숨을 들이쉴 때는 우주의 새 기운을 채우고, 내쉴 때는 여러분 안의 불안과 독소를 모두 흘려보내세요.” 요가 선생의 목소리가 주문처럼 내려앉았다. 방 온도가 올라갈수록 호흡은 거칠어졌다. 땀이 눈가를 타고 흐르던 그 순간, 차이나타운 유리 벽 너머에서 끝없이 회전하며 구워지던 통닭들이 떠올랐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내 몸도 발갛게 익어가는 기분이었다. 닭에서 기름이 빠져나오듯 내 안의 묵은 감정도 빠져나간다고 믿고 싶었다. 속에서 차오르는 비명을 삼키며 숨을 참았다. 발끝이 떨리고 힘이 빠졌지만 고통스러울수록 정화는 완벽해질 것이라며 버텼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눈앞이 하얘졌다. 몸의 중심이 무너지며 나는 그대로 매트 위로 쓰러졌다.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밀려온 것은 해독의 가벼움이 아니라 열기처럼 훅 올라오는 민망함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에 슬며시 눈을 감아버렸다. 기운 빠진 내 몸이 식어가는 통닭처럼 누워 있던 그때, 다행히 마지막 휴식 자세인 사바사나(Savasana)가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사람들 사이 아무도 내 추락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얼마나 누워 있었을까.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곧 다음 수업이 시작됩니다.” 요가 선생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해독을 꿈꾸며 들어왔던 내 몸은 탈진한 채 바닥과 완벽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땀에 젖은 채 유리문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숨 막히던 요가실의 열기와 달리 차가운 빗방울이 머리와 팔 위로 떨어졌다. 빗물이 몸에 남은 땀과 뒤섞여 흘러내렸다. 나는 무엇에서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변했다”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를 부정하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숨을 참고 있었던가. 매트 위에 쓰러지던 순간, 붙들고 있던 숨의 무게를 비로소 알았다. 억지로 밀어내려 할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던 마음이 바닥에 주저앉고 나서야 조금 느슨해졌다. 빗물이 내 몸에 쏟아지는 순간, 가슴 한편이 이상하리만치 가벼워졌다. 나는 비에 젖어 무거워진 옷을 입고, 올 때보다 가벼워진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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