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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기억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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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4-09-09 09:03

민정희 /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201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첫 구절이다. 만약 과거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누구일까. 내 기억은 사라지고 주위 사람들의 기억에만 내가 남아 있다면 나는 그들의 기억대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를 알아보는 사람조차 없다면, 나의 정체성은 과연 성립될 수 있을까.
  주인공은 기억을 상실했다. 이름도, 국적도, 나이도, 알 수 없다. 그는 흥신소에 가서 자신의 기억을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소장인 위트도 생애 한 부분의 기억이 잘려 나갔기에 그를 딱하게 여겨, ‘기롤랑’이라는 이름과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주며 더는 뒤돌아보지 말고 같이 일하자고 제안한다. 그와 함께 일한 지는 팔 년이 넘었다. 위트는 은퇴하며, 아직 계약 기간이 남은 사무실과 자료들을 기롤랑에게 넘기고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향한다.
  위트가 떠난 공허 속에 기롤랑은 또다시 ‘아무도 아닌 자’로 남겨진다. 그는 그동안 미뤄 왔던 자신의 과거 찾기를 시작한다. 이십여 년간 파리의 카페나 호텔에서 일했던 두 바텐더의 흐릿한 기억을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 과거의 미로 속으로 거슬러 간다. 추적하는 동안, 그는 귀족 집안 출신인 하워드가 되기도 하고 그의 사촌 프레디가 되기도, 프레디의 친구 페드로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개인의 정체성은 자신의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기억에 의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롤랑은 페드로의 옛 주소인 아파트를 찾는다. 아파트의 문을 두드렸을 때, 뜻밖에도 자신을 알아보는 여인과 마주한다. 그 여인을 통해 기롤랑은 자신에게 드니즈라는 이름의 아내가 있었고 파리 주재 도미니카 영사관에서 근무했으며, 나치 점령 시기에 아내와 함께 스위스로 가기 위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여인은 아내의 친구이자, 그 아파트 주인이었다. 그녀는 아내가 남기고 간 낡은 수첩을 건네주었다. 그 속에는 빛바랜 결혼증명서가 끼어 있었다. 서류에 적힌 그의 이름은 지미 페드로 스테른, 주소는 로마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였다.
  그 순간, 국경을 넘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두 명의 안내원을 따라 국경으로 향하던 중, 안내원은 위험할 수 있으니 두 팀으로 나누어 가자고 했다. 안내원 한 명은 모든 짐을 실은 차에 아내를 태우고 먼저 떠났고, 그와 다른 안내원은 눈 속에 남았다. 그와 눈을 헤치며 걷던 안내원은 국경의 감시를 살펴보고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도, 안내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길을 잃고 눈 속을 헤매다 의식을 잃었다. 아내 드니즈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나이 26살이었다.
  더는 기억의 실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진짜 이름일지 모르는 지미 페드로 스테른의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를 찾아 로마에 가리라 결심하며 이야기는 끝난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유대인의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2차 대전 당시 그들의 상점은 불이 꺼져 있었기에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고 불렀다. 그의 주소로 보아, 그는 유대인일 가능성이 높다. 나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던 시절, 유대인으로서의 삶은 위험과 두려움 속에 내몰려 있었을 것이다. 그의 과거로의 여정은 흑백영화를 보듯 어둡고 쓸쓸하다. 1940년대 나치 점령 하의 프랑스가 겪었을 불안과 상실감이 소설 전반에 감돌고, 주인공의 잃어버린 시간이 불 꺼진 상점처럼 어둠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게 되는 주된 이유는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거나 심리적 고통에서 비롯된다. 기억하기 버거울 정도의 상처나 슬픔에 마주하는 순간, 잠재의식이 기억의 통로를 차단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억의 문을 닫는 본능적 방어일 수도 있겠다. 위트가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살라고 했던 이유는 결코 행복하지 않은 기억일 거라는 뜻이었을 게다. 그러나 위트가 고향인 니스로 돌아가 어릴 적 추억을 되새기며, 한때 잃었던 자신을 찾게 되자 과거를 찾지 말라는 자신의 충고가 잘못되었음을 시인한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완전한 삶인가.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기억을 퇴화시키고, 때론 부풀리기도, 축소하기도, 왜곡하기도 하지 않는가. 과거를 돌아보면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의 윤곽이 더 뚜렷하게 남아있곤 한다. 가슴 뻐근해지는 아픔이 발목을 잡으며 주저앉힐 때도 있고, 타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또 다른 타인에게 다가서지 못할 때도 있다. 때로는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기억이 모여 현재의 내가 있다고 믿기에 나는 어떤 과거도 굳이 잊고 싶지 않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 알츠하이머인 것은 기억 없이는 존재의 의미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모든 것이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담았던 낡은 상자들 속에서 끝이 나는 것이었다.”
 
  기롤랑이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간 사람들에게서 이미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이나 편지가 들어있는 상자를 통째로 받기도 한다. 화자는 삶이란 상자 속에 기억으로 압축되었다가 서서히 소멸하는 덧없음을 말하려 한지도 모른다. 나도 누군가의 상자 속에 들어있는 기억이 될지도 모르고, 나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상자 속에서 꺼내 보며 살다가 어느 날 상자와 함께 사라지게 되리라.
  그렇지만 기롤랑은 기억의 뿌리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억은 삶의 뿌리이자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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