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보리굴비 한 두름

조정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3-06-28 12:32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 조정
 맛의 기억은 회귀본능을 일깨운다. 텃밭에 올라온 여린 머위와 미나리를 조물조물 무쳐 맛을 보니 아득한 고향 들판이 파노라마 영상으로 펼쳐진다. 나물 바구니를 든 어릴 적 친구 얼굴도 아지랑이 속에서 가물거린다. 기억회로에 깊이 저장돼 있다 불현듯 나타나는 고향 들녘은 나를 설레게 한다. 모든 것이 신비롭게 채색돼 있던 그때 그 시절을 다시 살아보고 싶은 간절함에 목이 메는 봄이다. 이제 밖으로 떠돌던 삶의 여정은 뿌리를 찾아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나 보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라 했던가, 장독대 위로 하얀 살구꽃이 분분히 날리고 키 큰 참죽나무 울타리가 늘어선 고향 집 뒤란이 다가온다. 병아리들을 거느린 암탉이 골담초 가지 밑에서 쉴 새  없이 흙을 파헤치고 바지랑대로 한껏 높인 빨랫줄에서 굴비 두름이 봄바람을 타고 있다. 어슴푸레 산 노을이 내려앉으면 허름한 밥상을 풍족하게 할 알배기 굴비가 화덕 위에서 지글대고 그 고소한 냄새가 울타리 밖으로 퍼져 나온다. 엄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순하고 슴슴한 엄마의 손맛에 흐뭇해하는 식구들 얼굴 위로 희미한 남포불이 일렁인다.
 
 음력 3월 중순 봄비가 많이 내리는 곡우 무렵, 제주 서북쪽 추자도 인근 어장에서 잡은 조기를 소금에 절여 법성포 갯바람에 몇 달 말리면 영광 굴비가 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부터 겉보리 속에 저장하던 보리굴비는 수분이 빠지고 쫀득한 식감과 감칠맛이 더해져 밥상 위 일등 공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기운을 북돋아 준다는 조기(助氣)라는 이름과 조기가 보리굴비가 되기까지의 그 지난한 과정을 생각하면 육십년지기 친구에게 보낸 생일 선물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듯하다. 
 
 “이렇게 귀한 걸 보내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 도로 보낼 순 없고 맛있게 잘 먹을게…”
무슨 말을  할듯 말듯 머뭇대던 친구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간다. 
“사실 내 생일 한 달 전 이었어,  올해 윤달이 들어서. 며칠 전 네가 보낸 보리굴비 받고 사실대로 말하기가 좀 뭐해서.”
음력 날짜로 생일을 짚어가며 축하 메시지와 꽃다발, 케익 까지 사진에 담아 보낸 걸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난다. 
“머리 아파서 내년부터 니 생일 못 챙기겠다. 생일을 양력으로 바꾸던지.”
“그래 잘 생각했어.”
심지 깊은 친구는 어색함을 무릅쓰고 네가 있어 생일을 챙겨 주니 행복하다는 말로  나를 다독인다. 몇 년 주기의 윤달 계산법을 두고 옥신각신하던 우리는 감칠맛 나는 보리굴비 맛과 건강에 대한 염려를 주고받으며 다시 제 자리를 찾는다. 친구는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귀촌 계획을 알리며 이웃해 살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어디가 좋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이 계획에 우리는 몰두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우리는 마음 가는 대로 행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가 되었다. 산자락 하얀 찔레꽃 덤불 옆에서 소꿉 놀던 열 살 무렵부터 전학과 이사, 직장과 결혼 그리고 이민으로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서로 마음 붙이고 지내온 긴 인연이 새삼 대견하기만 하다. 우리는 우정의 지속성이 지란지교의 덕목이라고 믿어 왔다. 때로 모난 마음으로 어긋남이 있을 때에도 우리들 심중에는 신뢰와 인정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에 안도하면서. 이제 나보다 더 많이 내 어린 날들을 기억하는 서로를 신기해하며 살구꽃 피는 마당을 이웃해 살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예감한다. 
 
 서쪽 하늘은 곧 자취를 감출 노을빛으로 찬란하다. 선홍빛 솜털 구름이 펼쳐진 하늘에 둥지를 찾는 나그네새들이 줄지어 날아간다. 노을의 황홀함에 두 손을 모으며 느린 걸음으로 함께 걷는 이 길은 곧 해가 지고 사방은 가뭇없이 어두워질 것이다. 너는 나를 비추고 나는 너를 비추며 부족하기에 더욱 정겨운 우리들… .
내년 생일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가로등 같은 친구에게 보리굴비 한 두름을 보내야겠다. 지금 여기까지의 우정은 네 덕분이라고 쓴 카드와 함께.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괜찮아 2025.09.12 (금)
“웩”달빛을 덮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미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것이 온몸에 쏟아져 내렸다. 훅 올라오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움켜쥐었다. 술에 취한 행인이 토를 한 것이다.“하하하, 할아버지, 속상하겠어요.”저만치 책방 앞 노란 벤치가 나를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에구, 이제 늙어 쓸모없게 보여서 그렇지 뭐!”처량한 신세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사실 한 달 전 노란 벤치가 오기 전까지는 간혹...
장로사
공원 가까운 동네 2025.09.12 (금)
   B.C.(British Columbia) 주에 있는 광역 밴쿠버(Metro Vancouver)는 21개의 크고 작은 자치 행정구역으로 구성돼 있다. 그중 밴쿠버가 인구가 66만 정도로 제일 큰 도시고, 써리(Surrey)가 버금으로 약 57만, 버나비(Burnaby)가 약 25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버나비는 지리적으로 광역 밴쿠버의 거의 중심 위치에 있고, 써리, 노드 밴쿠버(North Vancouver), 웨스트 밴쿠버(West Vancouver), 리치먼드(Richmond)는 강이나 바다로 분리되어 다리를 통해서만 통행할 수 있다....
김의원
책장 앞에서 2025.09.12 (금)
사랑이 지겨워지고그리움이 옅어 질 때기다림이 말라가고미움이 아련할 때낯설게 서 있는 거울 속의 나목마른 내 영혼은 어느 우물 앞에 서 있나갈 곳 잃어 헤매는 순례자는 어느 모퉁이에 서 있나
김민관
바다 2025.09.09 (화)
넓다참 넒다하늘을 담고구름을 담고별을 품고달을 품고외딴 섬 안아주고고깃배 채워주고갈매기 춤추고고기떼들 뛰게하고그리고 그대온갖 투정모진 열화(熱禍)언제나 팔 벌리고말없이 받아주니
늘샘 임윤빈
여름 이야기 2025.09.09 (화)
우리는 긴 여행을 계획했다. 남편, 딸, 그리고 나, 세 식구가  함께 할 소중한 여정이었다. 딸은 교사로서 바쁘게 지내다가  여름방학으로 얻은 자유였고, 남편은 오래전부터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눈으로 꼭 보고 싶다고 얘기했다. 마음속 깊이 새겨질 추억을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은 시작되었다.첫 여정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였다. 오래된 건축물과 현대적인 빌딩이 어깨를 나란히 한 도시의 풍경은 마치 과거와 현재가 함께 살아 숨...
박명숙
별 밤 2025.09.09 (화)
   여름 하늘을 수놓을 거라는 페르세우스 유성우를 찾아 나서며 영혼의 울림과 안식을 품은 태고의 빛을 보게 되기를 바랐다. 도시의 불빛을 거부한 채 달빛조차 없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날개를 단 듯 가벼웠다. 낮처럼 밝은 밤에 익숙한 도시인은 다수의 유성이 비처럼 보인다는 별똥비는커녕 별 하나의 작은 빛조차 오롯이 가슴이 품지 못하고 살아간다. 시간을 멈춰 세우고, 과거와 현재, 미래로 향한 마음을 한곳으로...
권은경
시간이 지났다고 잊혀지는 것이 아니듯멀리 있다고 잊혀 지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도눈을 감으면 보이는 이도 있다 말소리도 바람에 날아 가고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아도지우면 지울수록 생각이 나는 사람도 있다 호수에 잠긴 강물처럼구름에 가린 달빛같이물속에 잠긴 마을과 사람들 웃음소리 산꼭대기에 옮겨진 누각과 집들사람들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가는 기억 치매노인 반복된 소리처럼수장된 기억을 꺼내는...
전재민
가을비 2025.09.02 (화)
나뭇잎 떨어진 황량한 전경속냉기로 덮어가는 거리 위에우수로 가득 찬 눈물 내려온다그리움이 묻힌 창가로하늘 향한 눈동자 앞에하염없는 쏟아짐적시고 채우며 떨어진다자욱한 안개 너머로 보이는얼룩진 미련과 아쉬움가득 채워진 물기로말끔히 닦고 지워진다가을비의 단상 속에단풍잎은 부드럽게 충족되고흐느낌은 거름 되어무딘 거리에 계속 흩뿌린다싸늘한 일상은 촉촉해진다
김윤희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