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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4-25 11:36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10)
육영수 여사 묘비 건립 작업이 끝났을 무렵인 1974년 10월 초순 나는 김정염 비서실장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방으로 갔다. 그는 나에게 비서실장 보좌관을 하라고 말했다. 전혀 의외였다. 나는 “그런 중책을 감당하기에 부족합니다”라고 사양했다.

김 실장은 “말조심만 하면 된다. 비서실장 보좌관의 말은 비서실장의 말로 외부에 비칠 수 있고 나아가 대통령의 의중으로도 확대 전달 될 수 있기에 무엇보다 말조심이 중요하다”며 “만약 북한에서 간첩이 내려온다면 접선 5순위에 보좌관이 포함된다. 비서실장실, 보좌관실 자체가 2급 비밀”이라며 재차 말조심을 강조했다.

그렇게 중책을 맡게된 나는 보좌관 4년여 동안 언론계 친구, 대학 친구, 기타 외부 인사들에게 벙어리 행세를 해야 했다. 나는 이 4년여 동안 점심은 잔치국수 짜장면으로 일관했다. 청와대 본관 근무자 중 부속실장, 비서실장, 의전수석비서관, 나, 그리고 본관 경호과장 등에 대해서는 청와대 본관 식당으로부터 점심식사를 배달받았다. 점심시간에도 자리를 이탈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점심이 잔치국수, 짜장면이 대부분이고 간혹 짜장밥, 볶음밥이 나올 때도 있었다. 김정염 비서실장은 9년 동안 이 점심을 먹었다. 나는 가끔 김 실장이 좋아하는 일식 생선국을 외부에서 시켜드리곤 했다.


<▲ 진해 앞바다의 저도 휴양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참모들과 함께한 박 대통령. 임방현 대변인과 김정렴 비서실장이 뒤에 서 있다. 사진=사진과 함께읽는 대통령 박정희/기파랑 ·안병훈 엮음 >


비서실장 보좌관 4년여 동안 나는 이른바 대통령 통치비자금과 비밀 문건들을 보관 관리했다. 10·26 후 남은 자금 9억 5000만 원은 박근혜 큰영애에게 전달했고 비밀문건 등은 청와대 보일러실에 던져 불태웠다는 얘기는 앞에서 기술한바와 같다.

김영삼의 국회의원직 제명이 있던 무렵 나는 점차 꼬여가는 정국을 수습하기 위하여 백두진 국회의장을 희생양으로 하여 여야 간 대화국면을 모색하는 방안을 대통령께 진언하도록 김계원 실장에게 건의했다. 김 실장의 진언을 들은 박 대통령은 그러나 “백두진 의장이 무슨 죄가 있느냐”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김 실장이 전했다.

나는 김 실장이 민관식 국회부의장을 만나 백 의장의 자진사퇴 유도와 여야 관계호전 방안을 의논해 보도록 건의했다. 김 실장이 오케이 했다. 나는 민 부의장에게 연락하여 두 분의 만남을 약속했다. 그런데 당일이 되니 대통령의 안가 만찬이 있어서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는 또 다른 날을 잡아 약속을 했다.

당일이 되니 또 만나러 나갈 수 없는 사유가 생겼다. 역시 대통령 관계 행사 때문에 김 실장이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기다리고 있는 민 부의장에게 그 사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다음 만날 일정을 협의 조정하는 중에 10·26 사건이 일어났다. 일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국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 내가 겪고 들은 얘기를 토막별로 정리한다.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권오병이 중증 위암치료차 경희의료원에 입원하고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위문금 봉투를 준비해 문병을 갔다. 박 대통령의 위로 말씀과 위문금 봉투를 전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박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산삼을 먹었더니 조금 기운이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들 말에 의하면 산삼 한 뿌리에 900만 원을 주고 샀는데 더 사달라고 조르니 큰일이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한 번 더 문병을 갔다. 나중에 서울중학 옆에 있던 한옥 자택이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산삼 때문이 아니었는지….

△심의환 총무처 장관이 위암 투병을 할 때도 세 번 문병과 위문금을 전달한 바 있다. 삼선교 근방의 자택이 공기가 나쁘고 시끄러워 공기 좋고 조용한 성북동으로 이사했으면 하는데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달라고 하여 받아주었다. 그는 성북동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박 대통령은 그가 죽을 때까지 장관 자리를 유지하도록 했고 부인에게 위문편지를 썼으나 10·26 사건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마지막 친필서신이었다. 10·26 한참 지나서 전달됐다.

△강문봉은 박 대통령과 군 동기생으로 오랜 친구 사이었다. 반정부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실형을 살고 있었다. 박 대통령 앞으로 탄원 서신이 왔다. 내용은 결백 주장과 충성맹서였다. 그는 며칠 뒤 석방되었다. 그밖에 군 원로 반혁명 반정부 군 동료들에 대해 처별과 별도로 그들 가족의 생계비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배려심을 엿볼수 있는 사례라하겠다.

△1970년대 중반 국회의사당이 신축 개관된 뒤의 일이다. 정일권 국회의장이 감사의 인사를 표한 뒤 청와대 건물이 너무 낡았으니 새로 짓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국회가 서둘러 예산 반영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청와대 신축을 하지 않겠다”라고 사양했다. 자신을 위해서는 철저히 절제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청와대 건물은 일제강점기 총독관사로 지었던 목조 건물로, 낡고 협소하고 삐걱거렸다 .천정에는  쥐가 돌아 다녔다. 결국 박 대통령 서거 후 8년이 지나서 신축되었다.

△야당의 거물 정치인 유진산이 사망한 뒤의 일이다. 미망인이 박 대통령에게 탄원 편지를 보내왔다. 상도동 자택이 은행 경매에 넘어갈 처지인데 이를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사람이 죽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면서 선처 조치를 했다. 유진산은 생전에 이 집을 담보로 은행융자를 받아 정치자금으로 썼는데 살아 있을 때는 별말이 없다가 사후 이자를 못 내게 되자 경매절차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왕사쿠라, 정상배' 등으로 억울한 매도를 많이 당한 정치인이었으나 사후에는 빚만 남긴 깨끗한 정치인이었다.

△어느 날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집무실로 내려갔다. “내 대구사범 동기생 석 아무개가 폐암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이라는데 가서 문병하고 주치의를 만나서 상태를 상세히 알아보고 오라”는 지시였다. 나는 즉시 병원으로 가서 문병하고 주치의를 만나 진료 상태와 전망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복명했다. 나는 그가 나을 때까지 진료비를 부담토록 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매달 병원에 가서 진료경과를 듣고 진료비를 정산한 뒤 그 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6개월여 만에 사망했다.

△1971년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로 항명파동의 주동자가 된 김성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콧수염을 뽑히는 수모와 심한 곤욕을 치르고 국회의원직을 사퇴, 정계를 은퇴했다. 그는 자유당 국회의원일 때 “국회의원은 백수건달”이라는 말을 했으며 그로인해 '백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공화당 재정위원장인 그는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이른바 '4인방'을 만들어서 반 김종필 세력을 구축, 돈과 권력을 활용해 여야를 넘나드는 폭넓은 활동으로 1960년대 한국 정치를 주름잡았다. 그는 길 총장을 포섭할 때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수표를 주었는데 수표를 받은 길 총장이 깜짝 놀랐다는 말이 은밀하게 떠돌았다.
1971년 6월 개각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오치성 내무장관이 임명되면서 반 김종필전선의 길재호, 김성곤, 백남억, 김진만, 4인방세력의 정치적 거세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들 지역구의 경찰서장, 시장, 군수를 모두 인사교체 함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뿌리를 베어 버렸다. 권력을 둘러싼 양대 세력의 대회전이었다.
이에 4인방은 강력히 반발했고 1972년 10월, 급기야 박대통령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 주동자와 추종 의원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일대 곤욕과 수모를 당했다. 1960년대를 주름잡던 이들 4인방체제는 일거에 궤멸되고 말았다. 그의 항명파동의 파장이 유난히 컸던 것은 박 대통령의 직접 만류를 무시한 것 외에 그의 내각제 개헌 구상 의혹이 조기 포착됨에 따라 사태의 폭발성이 상승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최후의 만류 메시지를 김성곤에게 보내면서 “돈과 권력을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것, 어느 쪽이든 한쪽만을 택해야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이 최후 경고를 받은 김성곤은 주춤하면서 항명의 발길을 돌리려 망설였으나 추종자들의 떠밀림에 버티지 못한 채 밀려 버리고 말았다. 정계를 은퇴한 그는 미국 보스턴으로 가던중 하와이에서 장문의 편지를 박 대통령께 보내왔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때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하여 어떻게 썼다는 것과 경제 활동을 통해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들은 김진만 후임 재정위원장에게 정확히 인계했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께서 보시고 내려 보낸 이 편지를 모두 읽어 본 뒤 파쇄기에 넣었다. 김성곤의 정치자금 조달과 관련하여 나는 쌍용양회 상무를 지냈던 우 아무개로부터 토지거래 양도세를 대납해 달라는 의외의 요구를 받았다. 내용인즉 우아무개가 쌍용양회 임원 재직시 공화당정치자금을 마련하기위해 강남 땅을 사고 팔 때 김성곤 위원장이 자기의 명의와 인감을 편의대로 사용하고 양도세를 미납한 채 미루어 왔다.

10여년이 지나고 김성곤 사후 그 양도세 고지서가 자기 앞으로 나왔는데 이것은 정치자금 조달 관계로 생긴 문제임으로 청와대가 이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60년대 강남개발 당시 김성곤 공화당재정위원장이 거래했던 일로 그가 생전에 처리 했어야 했던 일이다. 청와대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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