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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쓰는 고향역사(1):정희량 이야기

정봉석 phnx604@hotmail.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3-27 16:44

들어가는 말

서부 경남의 두메산골 함양과 거창 사이에 위치한 안의라는 고을엔 광풍루(光風樓)라는 축조한지 340년이나 되는 아름다운 조선조 목조 건물이 있다.

이 건물이 다시 헐려 이건한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멋갈스런 이름의 건물은 이 안의라는 내 고향에 남은 유일한 문화재가 되기 때문이며 이 아름다운 산골 동네의 아이콘이며 상징이니 무리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한문서적중 내가 소장한 66년 안의 향교가 발행한 안의 읍지와  자유당 말기쯤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함양 군지는 내가 이역만리 타국에 살지만  옛 함양과  안의의 향토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  서물엔 이곳 서부 경남의 양대 가문,  옛 안의땅 위천의 강동 마을  초계정씨 동계 정온 가문과 함양의   개평 마을  일두 정여창  하동정씨 가문의 내노라 하는 사람들의 평전인 신도비 내용이 그대로 실려있는데다  조선조의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게재된 충신 열전도 있으니 긴장감마저 우러나온다.  특히 영조 초기 안의 사람 정희량이 일으킨 무신년 역모 사건을 둘러싼 서부 경남 지역 사람들의 고뇌와  갈등을 어렴풋이 행간에서 엿볼 수 있어  여간 흥미롭지 않다....

우암 송시열은  정조가 얼마나 존경했는지 "宋子"라는 극존칭을 붙여 추앙한 사람이다. 문묘와 향교에 배향된 우리 나라 18현중 공자 맹자라고 할 때의 극존칭인 "子"자가 붙는 유일한 사람으로 정주학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고수한 철저한 보수 원칙주의자이며 요즘말로 "보수 수구 친일 반공 친미 꼴통"이라 할 수 있는 "노론"의 태두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충청도 출신으로 인조 효종 현종 숙종 연간에 걸치는 불세출의 학문과 도량으로 87세에 장희빈 장옥정의 중전 책봉을 반대한 이유로 귀양중 사약을 받고  비명에 사라질 때까지  일세를 풍미한 풍운아형 학자이다.

이런 우암 송시열이 노구의 몸으로  당시 안의 현감 장세남이 흉년으로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숙종 9년인 1683년에 현 광풍루을 중수한 후   광풍루에 대한 "헌정문"이라 할 수 있는 "기문(記文)"을 부탁해온 바, 자신의 대 선배인 일두 정여창이 안의 현감 재직시 중창했던 이 누각에 대한  광풍루기를 흔쾌히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충북에 있는 소쇄원에도 그가 지은 제둴당이 있는데...안의현감 재직시 건립한 "쇠불모티" 언덕에 먼저 짓고 이름한  '제월당'이라는  일두선생의 창작을 빌려쓴 부담 과 미안함도 작용했지 싶다.

지금은 현대식 키높은  빌딩이 여기 저기 들어서 이 유서깊은  누각 건물이 별 볼일 없게 되었지만 6~7십년대만 하더라도 어떤 방향에서든 안의라는 아담한 분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이 바로 이 광풍루였다. 그 위치가 또한 광주, 전주, 진주, 김천으로 연결되는 옛 국도가 모두 만나는 사거리 교차로요, 안의읍을 보듬고 흐르는 남강 지류인 금호강의 남쪽 언덕에 위치하여, 안의 골짜기 전체가 360도 파노라마로 조감되는 절묘한 위치라, 조선조  지방에 세워진 누각치고 이만한 포인트를 가진 누각은  별로 없지 싶다.


<▲ 원래 성종조에 일두 정여창이 현감으로 재직시 중건하여 광풍루라 이름하였는데 임란에 불탄 후 숙종 9년(1683)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름 이조 루각건축물 중 빼어난 건축양식을 자랑하는 안의고을의 아이콘이다. 축조된지 350년을 바라보는 건물이 도로 확장을 빌미로 작년 가을 해체되어 이건한다고 한다.>


함양 상림의 학사루도 숲에 갇혀 답답하기만 하고 거창의 침류정도  전망은 광풍루에 당하지 못한다. 어디 그 뿐이랴, 1914년 안의군이 폐군되어  반을 나누어 인근 함양 거창에 통합되기 전만 하더라도 조선조의 전형적인 읍치로서 우람한 객사건물과 외삼문, 내삼문, 동헌 내아, 각종 창고까지 광풍루 북쪽에 포진한 아름다운 건물군까지 훤히 조망하고 있었으니 그 자리를 낙점한 일두 정여창의 혜안에 감탄할 따름이다.

건평만 150여평에 달하던 안의 객사는  일제 강점기 시절엔 보통 학교 교사였고, 해방후엔 중학교, 고등학교가 차례로 이 건물에서  개교하는 편의를 제공하였다.그러다가 1960년 1월 이 조선 중기의 대표적 목조 건축물인 객사가 의문의 방화로 소실되자, 졸지에 학교가 없어진 안의 고교는 이 광풍루를 임시 교사로 삼고 아래 웃층을 잠시 칸막이 하여 사용했던 적이 있는 만큼, 안의라는 고을이 영조 4년에 일어난 무신란으로 반역향으로 찍혀 폐현되고 , 8년 후 복현되었다가  일정 때 다시 폐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으니, 이 고을의 영욕이 무상한 풍상을  모두 겪고 살아 남은 유일한 건물이니 안의의 아이콘이요 심볼이라 할 만하다.

더구나 이 건물은  정희량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도 존재했던 유일한 건물로서 파란만장한 안의 고을의 300년 풍상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1728년 3월에 거사한 정희량이 이 누각에 올라가 더러는 고을의 내노라 하는 선비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시도 지었을 것이 분명하니, 정희량의 체취가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기도 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나는 다시 한번 타임머신을 타고  무신란이 일어났던 18세기 초엽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안의라는 고을이 정희량으로 인해 반역지향으로 찍혀,8년이라는 폐현의 고통을 감내하고 이 고을은 물론 경상우도 전체가  60년 가까이  과거 금지라는 차별대우를 받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평가는 온통 부정적인 '만고역적 정희량'밖에 남은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과연 천하의 못되 먹은  역적일까?라는 의구심이 항상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이곳 명문 거족의 양반 사대부로서 도성 근처도 아닌 덕유산 자락 산간 벽촌인 오지에서 감히 쿠데타를 획책하다니...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동키호테적 발상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그 뚝심과 무댓보가  궁금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정희량에 관한 자료가 전무하다.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이역만리 캐나다에서도 손구락 하나로 왕조실록이나 승정원 일기, 비변사 기록,문집, 족보, 향토지리지 등의 원문 검색이 가능하니 그 당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런 저런 자료를 검색하다 보면 정희량이 보일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출발하기로 한다.

영조 4년 이인좌-정희량의 난이 당파싸움의 산물이란 사가들의 비판을 비켜갈 수 없는 이상, 선조 초기 붕당이 성립한 시기부터 그 이후 세포 분열을 거듭하여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의 사색당쟁이 그 절정을 이루던 후기 조선의  역사 여행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소설도, 평론도, 논문도,아닌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두서도 없고 스토리 라인도 없다. 자료를 찾으면서 붓이 가는대로  중구난방으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전개할 뿐이다.

이런 여행은 나 혼자만 하는 여행이 아닌 동반자가 필요하다. 그 동반자들은 나와 같이 안의라는 시골 마을에서 초 중 고 12년을 같이 다닌 고향 동창들이다. 그들 모두는 어려서부터 만고 역적 정희량, 우리 안의를 통째로 말아먹은 원죄를 지은 '카인'으로 인식하며 자랐던 사람이니 귀가 솔깃할 것이라 생각한다. 일단 그들을 내 이야기를  들어줄고  그들을 청중으로 삼고, 저녁먹고 동네 사랑방에 불러내어 숭늉이나 마시면서 구수한  얘기를 부담없이 풀어나가기로 한다.

조 선조 당파, 붕당은 선조 초기에 태동한 바   율곡 이이를 태두로한 기호지방의 서인과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한  영남의 동인으로 조정이 갈라 선 후, 임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기화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 서, 딴 살림을 차린후  광해조에 이르면  이 북인이 대북 소북으로  세포 분열한다.

한편 서인도  효 종 현종연간의 왕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다툰 예송문제로 과격 원칙주의자인 노론과  수정론자인 소론으로 갈라져 싸우다가 숙종조에 이르먼 장희빈 장옥정과 인현왕후 민씨의 갈등, 장희빈 소생  경종의 건저(建儲: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남인, 노론 ,소론이 엎치락 뒤치락 정권이 바뀌는 환국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물긷고 빨래하던 궁녀 무수리 최씨와 숙종사이에 태어난 영조가 단명한 경종의 뒤를 이은후 노론이 최후의 승자로 궅혀진다....그 이후 조선의 개혁 세력은 노론의 수구 보수 세력의 세도정치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이조가 망할 때까지 노론 천하였고...일제시 거의 모든 친일 세력도 기득권 세력인 노론 일색.....해방후 친일 반공 보수 친미 세력또한 이 노론세력의 잔재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요즘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써먹는 약방의 감초이기도 한 노론 망국론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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