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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청와대 출입기자도 중앙정보부에 불려갔던 시절

권숙정 news@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4-04-05 12:19

권숙정의 역사의 이삭줍기(7)
나는 1960년 겨울 <대한일보> 견습기자로 입사한 이래, 사회부(경찰서) 경제부(한국은행)를 거쳐 5·16 후 최고회의를 출입했다가 민정이양 뒤 제6대 국회를 출입하면서 야당 담당 취재 활동을 했다. 또 1966년 10월경부터 1971년 12월 말까지 5년여 동안 <대한일보>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들은 일화 하나. 1961년 5·16 후 9월경 민주당 구파 지도자인 김준연은 북한 김일성의 거물 밀사 '황태성'이 군사정부 보호 아래 있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정계는 발칵 뒤집혔고 가뜩이나 사상 문제로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던 군사정부 수뇌부는 당혹과 긴장에 휩싸였다.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친형이자 김종필 정보부장의 장인이 되는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며 좌익사상의 동지 관계였다. 해방정국 속에서 일어났던 대구 10·1 사건 때 박상희는 경찰에 사살되었고 황태성은 서울로 도피했다가 월북했다. 그는 북에서 무역성 차관을 지낸 거물이었다.

황태성은 박정희 의장을 만나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을 타진하기 위해 김일성의 밀사를 자청하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에 잠입, 박 의장 면담을 모색하다가 중앙정보부에 검거됐다. 빠른 재판 절차 끝에 그는 10월 말경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중앙정보부는 황태성으로부터 공작금 미화 25만 달러를 압수했다. 정보부는 이 돈을 KBS TV 방송국 창설 자금으로 썼다는 사실을 먼 뒷날(1981년) 정보부 경제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이 작업에 참여했던 김용태로부터 들었다.

또 당시 KBS 방송과장으로 재직했다가 문공부 방송국장을 역임했던 윤 아무개로부터도 같은 내용의 얘기를 들은 바 있다. KBS 방송국은 1961년 12월 사옥 준공, 개국됐다. 결국 김일성의 돈으로 세운 KBS TV 방송국인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와 함께 취재활동을 했던 각 언론사 기자들 중에는 5·16 후 군정 시 최고회의 때부터 출입했던 이들과 국회, 여야를 담당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 김경래 정재호 윤상철, <서울신문> 오전식 이한수, <대한일보> 전병성 김준환 권숙정 조창화, <동아일보> 이만섭 유혁인 박경석 이진희, <동양통신> 문태갑 노철용, <중앙일보> 김동익 이억순 심상기, <조선일보> 이종식 선우연 김윤환, <한국일보> 임삼 송효빈, <부산일보> 송정제, KBS 이석희,  동아방송 서병현 최종철. <동아통신> 곽지용 고의구 전신병 박용근 <합동통신> 김광택 조승천 김영일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아슬아슬한 일도 적지 않았다. 나도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서 곤욕을 치른 일이 있다. 1971년 2월 6일 미국은 한국군 월남 파병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한미 한국군 현대화 계획 합의에 따라 10억 달러의 한국군 전력증강 특별 군사원조를 공여키로 했다. 암호명은 '식목계획'이었다.

나는 이 특종을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으로부터 듣고 사안의 중대성과 기밀성을 감안, 외무부 출입 임한순 기자에게 참고로 알고만 있으되 기사화하지는 말라고 하면서 일러주었다. 그런데 내가 박 대통령 지방시찰 수행 출장 중 임 기자가 이를 기사화하고 말았다. 1면 톱 특종으로 대서특필됐다. 중앙정보부의 강력한 항의로 신문은 모두 회수됐고 임 기자는 정보부에 끌려가 출처 추궁과 함께 심한 신체적 고통을 받았다.

 이틀 후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기다리고 있던 정보부 요원과 함께 남산 정보부 조사실로 갔다. 지하실 복도에 들어서자 음습한 분위기 속에 여기저기서 구타와 신음소리가 들렸다. 임 기자가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저만치에서 지나가는 모습도 보았다.

나는 독방으로 안내되었다. 창문은 벽 상단부에 하나밖에 없었다. 30~40분 기다리는 동안 구타 신음, 울부짖는 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나는 금세 공포감에 사로 잡혔다. 공포감이 지
나치면 대담해지는 모양이다. 나는 비굴하고 추한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조금은 안정이 되는 듯했다.

수사관이 들어왔다. 165㎝의 작은 키였지만 그의 눈매가 사람을 얼어붙게 했다. 싸늘하고 잔인한 살기가 내 눈 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저런 사람도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일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수사관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우리 괜히 시간 끌면서 복잡하게 하지 말고 신사적으로 일을 끝냅시다.”

“나도 바라는 바요. 그렇게 합시다.”

“누구로부터 들은 얘기요?”

“이후락 비서실장한테서 들었소.”

내가 서슴없이 답변하자 수사관은 잠시 주춤했다.

“그렇게 고위층은…, 우리로서는 어떻게…, 그러면 그것을 듣게 된 경위를 기술해 주시오.”

나는 취재원인 강상욱 대변인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비서실장을 내세우며 거짓말을 했다. 설마 비서실장을 상대로 확인조사야 하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수사관의 요구에 다음과 같은 요지로 거짓 진술서를 써 주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때때로 비서실장을 만나 환담한다. 그 과정에서 주요 문제에 대해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비보도) 전제하에 말하기도 한다. 이 식목계획도 그때 들은 것이다.

조사관은 같은 진술서를 세 번씩 되풀이해서 쓰라고 요구했다. 마지막 진술서를 쓰고 있는 데 전화가 왔다. 수사관이 긴장된 모습으로 통화했다.

“아…, 예. 지금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들어와서 조사받은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라고 하고 설렁탕 한 그릇을 내놓았다. 나는 그들이 내준 검은 지프차를 타고 밤 10시경 신문사에 돌아왔다. 5시간 만이었다. 홍성원 정치부장 이하 부원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임 기자도 다음날 풀려나왔는데 출근은 못한 채 집에서 약 1주간 후유증 요양을 했다. 그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출처를 밝히지 않다가 매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내 이름을 댔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가 조사받는 동안 <동양통신> 청와대 출입기자 문태갑 선배가 강 대변인에게 알렸고 강 대변인은 군 동기생 친구인 문학림 정보부장 비서실장에게 전화 당부하여 무사히 빨리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의 횡포와 악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나는 육영수 여사와 단독 면담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정보부에 대한 원성과 여론을 설명하고 김형욱 정보부장의 경질을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그 얼마 후 김 부장은 3선개헌 전야, 신라호텔에서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의 공개적인 비난 사퇴 성토와 이에 대한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 등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렸었다. 의원총회가 끝나고 정보부는 이만섭 의원을 연행하려했고 이의원은 신변의 위협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당의원들이 둘러싸서 간신히 무사 탈출케하는 한편 청와대에 구원요청을 보냈다. 보고를 받은 박대통령은 누구든 이만섭의원에게는 손끝하나 건드리지 말라 고 엄명, 강력한 보호막을 쳐주었다. 김정보부장은 1969년 10월 3선개헌 후 이후락 비서실장과 함께 경질됐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상외교 취재기자로 아래와 같이 6회 해외 출장을 했고 별도로 월남 시찰을 두 번 했다. △1966년 10월 월남 참전 7개국 필리핀 마닐라 정상회담에 이은 월남 시찰 △1967년 3월 정일권 국무총리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방미 △1967년 12월 홀트 호주 수상 장례식 참석 △1968년 4월 18일 박 대통령과 존슨 미 대통령 호놀루루 정상회담 △1968년 9월 18일 박 대통령과 호주·뉴질랜드 수상 정상회담 △1969년 8월 20일 박 대통령과 닉슨 미 대통령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1968년 9월 박 대통령과 호주·뉴질랜드 수상 정상회담 취재 수행 때 나는 박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들었다.

 “이렇게 잘 사는 나라에는 공산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다. 우리도 하루 빨리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공산주의가 침투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저소득 빈민층에 침투해 갈등과 증오를 조장, 확대, 재생산하고 사회와 국가를 분열시키는 암적인 존재다. 앞으로 나는 우리나라 1인당 GNP(국민소득)가 2000달러가 될 때까지는 해외여행을 하지 않겠다.”

그 후 박 대통령은 1969년 8월 닉슨 미국 대통령과의 샌프란시스코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했을 뿐 10·26 사건으로 서거 때까지 10년 동안 해외여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청와대 출입 동안 육영수 여사의 행사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취재했다. 공보비서관 때도 계속했다. 육 여사는 국무위원 부인들로 양지회를 구성, 그 회장에 취임하여 국군장병 위문품 보내기, 불우이웃돕기, 연말연시 김장 및 연탄 보내기, 봄철 꽃나무 심기 등 봉사 활동을 했다. 그 중 육 여사의 내곡동, 청도, 소록도 등 한센병환자촌 방문행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때만 해도 그들은 천형의 문둥병자로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외인들이었다. 육 여사는 그들의 마을을 찾아가 퀴퀴한 냄새, 남루한 옷, 흉측한 몰골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마디가 없는 손을 덥석 잡고 위로, 격려했다. 육 여사는 그들에게 원조로 받은 비타민제 폐결핵 치료제 등 의약품을 보내고 양계, 양돈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나는 육 여사의 한센병환자촌 방문 수행 취재를 마치고 청와대로 돌아와서 전염병 위험이있는데 괜찮겠느냐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육 여사는 “한센병균은 햇볕만 쪼이면 곧 죽는다고 하니 걱정할 것 없다”면서 밝게 웃었다.

육여사의 ‘자비심 넘치는 보살행’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전염 위험을 말한 내가 몹시 부끄러웠다.
육여사의 마음과 손끝이 닿는 곳이면 거기에는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생겼고 자비가 넘쳤다. 불심이 깊으셨던 육여사께서는 서울 도봉산 도선사 조실 청담대선사님과 신심을 나누시면서 보살도를 익히셨고 행하셨으리라.

생전은 물론 서거하신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흠모와 추앙을 받고 계심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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