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호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오늘도 사랑 편지가 들어왔다. 가끔 이런 연서를 받지만 오늘은 유난히 기분을 들뜨게 한다. 그냥 사랑만 담은 편지가 아닌 잉태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눈이 엄청 내린 한 겨울 캐나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눈 폭풍을 헤치고 동쪽 소도시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일주일에 삼일씩 그 도시에 머물며 비상 상황을 메꾸어 주고 있었다. 양로원 앞으로는 속이 시원해 지도록 맑은 물이 힘차게 흐르고 우거진 나무숲은 마치 공원 안에 있는 듯 초록초록한 상큼함이 한겨울을 잊게 해 주었다. 고개를 들어 산을 올려다보면 도토리 꼭지처럼 두꺼운 눈을 늘 얹고 있는 산이 이 동네를 감싸고 있다.
몇 달 동안 만족스럽지 못한 환경에 계셨던 노인들은 아주 기대에 차서 환영해 주셨다. 늘 최선을 다 하지만 나는 더욱 이분들께 실망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한 끼 한 끼마다 정성을 다했고 개인마다 싫어하는 음식과 좋아하는 음식의 조절을 하며 조금씩 친숙한 관계가 익어 가고 있었다. 여전히 눈은 내린 곳에 덮어 내리고 또 내리며 문밖에는 걷기조차 힘든 눈 천국에 푹 파묻혀 갔다.
이분들께 지금 즐거움이라고는 맛 있는 음식을 드시는 기쁨과 그 안에 같이 머무는 친구분들과의 대화, 오락이나 음악 뿐이 아닐까 하였다.
일주일이 지나고부터 나는 그냥 chef 가 아닌 그분들의 딸이 되어 가는 듯하였다. 잠시 다이닝 룸에 나가면 나에게 지난 날을 길게 이야기 해 주셨다. 잘 치지는 못 하지만 식사 후에는 피아노를 치며 한두 분과 어울려 노래를 하다 보면 어느새 나를 둥그렇게 둘러싼 노인분들을 보게 된다. 어느 분은 노래를 연주하는 내가 너무 신기하다고 하셨다. 직접 연주하는 이 서툰 연주가 유튜브 전문 음악보다 너무 좋다고 하셨다.
나의 의무로 하는 일에 과한 칭찬을 듣고, 쉬는 시간에 잠시 노인들을 위해 한 피아노 연주에 과분한 사랑을 받는 것에 메마른 내 심장은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었다. 올해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정신적 생존을 위해 하루도 비우지 않고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이 곳 출장도 살기 위해 눈밭을 헤치고 가슴을 졸이며 달려 오지 않았던가 !
어느 노인은 나를 찾아와 주머니에서 주물럭주물럭 봉지 하나를 내미셨다. 이 눈 속에 어떻게 이걸 사 오셨냐 하니 일 킬로미터를 넘는 거리를 휠체어를 운전하여 사 오셨다고 한다. 이것 밖에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시며 수줍어하셨다. 그 치즈 한 봉지는 그 분 체온으로 따뜻하였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던 내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깊은 슬픔에 빠져 살 희망이 없어 보이던 황망한 내 앞에 나를 살리는 사랑편지들이 여전히 쌓여 가고 나는 또 편지를 기다리며 산다. 힘없고 노쇠하였다고 정말 힘이 없으랴 ?
아직 육체 팔팔한 내게, 하지만 희망 없는 정신적 중환자에게 삶의 의지를 갖게 하셨다. 내 사정을 아시는 것도 아니지만 늘 고마움을 담아 내밀어 주시는 사랑 편지는 의사의 물리적 처방과 함께 내게 일어나도록 용기를 주셨다. 지금 고인이 되신 문인 시인님께서 “건강을 잃으면 반을 잃지만, 용기를 잃으면 모두를 잃는다.” 라고 하셨었다. 미안하다고 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 사랑한다고 감싸 주는 것, 그 세 가지를 못 하고 안타깝게 떠나보낸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는 언제나 전할 수 있으랴!
이런 부족한 사람이 받는 이 넘치는 사랑은 내게 남은 시간 동안 실천하고 살라는 암시인 것 같다.
그래! 눈물을 멈추고 사랑의 편지를 아주 많이 쓰면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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