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겨울에 크는 나무

조정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2-03-21 10:07

조정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꽃을 시샘하는 풍설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헐벗은 나뭇가지들은 눈바람 속에서도 새순을 틔우고, 뿌리들은 더 깊게 땅속으로 내려가 생명의 물을 길어 올린다. 적막한 숲속, 고목 우듬지에서 날아오르던 레이븐 몇 마리가 동굴 밖 기척에 놀란 곰의 단잠을 깨운다. 들숨과 날숨을 고르던 곰의 그루잠 속에, 연어들의 마른 눈물 자국과 홀씨를 띄우지 못한 노란 민들레꽃 무리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새해 들어 곰과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동안거 수행을 하고 있다. 매끼 식탁에 오르는 반찬 가짓수만 조금씩 달라질 뿐,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날들의 반복이다. 
“오늘 살아 있음은 어제 죽은 다른 이가 바라는 부활이며 기적이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
코비드 팬데믹의 그늘에서 인내심을 북돋우는 말들은 무성하지만, 높은 담장 안에 갇힌 채 출구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다. 수감 생활의 어려움은 실천할 수 없는 인식의 확장이라고 말한 무기수의 말을 기억한다. 격리된 날들은 일상의 변화와 속력을 허용하지 않고, 자꾸만 지난날들을 뒤돌아보게 한다. 마치 뒷걸음질 치며 자신이 찍어 놓은 발자국으로 외로움을 달래는 사막의 순례자가 된 듯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나는 나를 벗 삼는다. (吾友我)’고 했다.
“눈 오는 새벽, 비 내리는 저녁에 좋은 벗이 오지 않으니 누구와 얘기를 나눌까? 시험 삼아 내 입으로 글을 읽으니, 듣는 것은 나의 귀였다. 내 팔로 글씨를 쓰니, 감상하는 것은 내 눈이었다. 내가 나를 벗으로 삼았거늘, 다시 무슨 원망이 있으랴!”
(이덕무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중에서)
  책 읽기는 내가 나를 벗 삼는 일의 순서 매김 중에서 첫째로 꼽힌다. 지난겨울, 시공을 거슬러 몇 권의 책을 정독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행간에 담긴 저자의 심오한 사상은 물론, 그들의 삶에서 길어 올린 격조 있는 인품과 정서에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자유롭지 못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요즈음, 코비드 19사태로 주목받는 1947년 출간된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의 소설 <페스트 La Peste>를 읽게 되었다.
 카뮈는 페스트로 봉쇄된 인구 20만의 프랑스령 알제리 오랑 이라는 도시에서, 재앙에 대처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희망과 절망 그리고 전염병이 소멸하기까지, 두려움에 맞서 연대하는 사람들을 소설 <페스트>에 담고 있다.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과 전기, 식량, 생필품 공급이 제한된 도시에서 사람들은, 가족, 친구들과도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극한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된다. 점점 죽음의 공포로 무기력해진 사람들이 도시의 무질서 속으로 내몰릴 때, 성실한 의사 베르나르 리유와 의료 자원 봉사대를 조직하는 장 타루 그리고 취재차 이 도시에 머물며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깨달은 레몽 랑베르…, 이들 모두는 환자들을 돌보며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재발견하는 인물들이다.
카뮈는 죽음 앞에서도 체념하지 않고 인간 조건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부조리한 세상의 진정한 빛이며 반항이라고 조명하고 있다. 그는 리유를 통해 페스트는 질병뿐 아니라 세상의 전쟁과 빈곤, 인간 내면의 선과 악, 무지와 맹목적인 믿음 등, 절대 소멸하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부조리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카뮈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삶의 고통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을 통찰하며, 절망에 맞서는 의지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소설 <페스트>의 표면에 드러난 ‘거부와 부정’의 이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긍정의 힘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전제되어 있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희망도 없다.” 
가난과 질병에 맞서 충실한 삶을 살다 1957년 44세에 <이방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카뮈의 신념이 담긴 말이다.
 
  책은 미로의 동굴 속으로 스며드는 빛처럼, 미처 보지 못한 진실을 내보이며 고통의 뿌리를 이해시킨다. 책을 읽으며 침묵할 때면 내  좁은 인식의 틀을 벗어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정신의 탄력을 유지하기도 한다. 책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깨우침을 주는 스승이 되기도 하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영혼의 친구가 되어 불가해한 삶을 납득시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맹위를 떨치던 코비드 팬데믹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제 길었던 묵언의 안거를 마무리하고 새봄 맞이 만행에 나설 때다. 꿋꿋한 기상으로 눈바람과 마주하던 소나무 잎새에 어느덧 연둣빛 봄이 피어난다. 혹한의 적막한 숲속에서 나이테를 키우는 나무들은, 초록이 물결치는 그 날을 기다린다.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은 겨울 추위 속에서도 살아있음의 기쁨을 안다. 간절한 기다림은 겨울을 견디게 하는 힘이었다.  
  
 
*이덕무의 ‘선귤당농소 蟬橘堂濃笑'는 벗과 책, 자연을 관하며 쓴 미문으로,
‘선귤당이라는 당호의  자기 집에서 실컷 웃어본다.’는 의미이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사랑의 저 편 2025.04.18 (금)
               시인의 방에 알 전등이 꺼지고               구 시대의 유물 같은 나의 시들은               잠이 든다               꽃 한 송이 값도 못되는 내가               꽃이 되어 네 곁에 누워본다               잠 들기엔 너무나 아까운 저기             ...
김영주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비록 비가 잦은 계절이지만, 햇살만 비추면 여지없이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간다. 일할 때는 늘 자동차를 몰고 다녀서 자전거가 눈에 띄지 않았다.  취미나 스포츠를 즐길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은퇴를 하면서 자전거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온 세상이 기지개를 펴고, 살아 숨쉬는 것들이 초록 생명을 뿜어내고 있다. 나무가 새순을 톡톡 밀어내고, 화단에는 녹색 단검들이 솟아나고...
양한석
반가부좌를 틀고 바다와 마주 앉으면 마음 안쪽에도 수평선이 그어진다. 수평 구도가 주는안도감 덕분인가. 흐린 하늘에 부유하는 각다귀 떼 같은 상념들이 수면 아래 잠잠히내려앉는다. 바다빛깔이 순간순간 바뀐다. 이 바닷가 어디쯤에 창 넓은 집 하나 지어 살고싶다는 내 말에 섬에서 태어난 토박이 지인이 웃었다. 바다를 노상 보라볼 필요는없어요. 생각날 때 고개를 넘어 달려가 안겨야 애인이지 같이 살면 마누라가되어버리잖아요. 그럴...
최민자 
젊은 날 최전방 백암산 중턱에서 만난 불에 탄 주목과 구상나무의 그루터기들, 살아 천년죽어서 천 년을 버텨오며 옹골찬 기개로, 선 굵은 삶을 살았던 주목과 구상나무에게서 늘푸름과 꼿꼿함을 배운다. 전쟁의 포연 속에 육신을 불태웠어도, 꿈틀거리며 밀려오는 혹독한 칼바람에도, 자신을이겨내고 그루터기로 살아남은 홀연한 기개, 세상의 어느 누구도 뿌리로 이어지는 강인한삶의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리라. 다시 덕유산 향적봉에서...
이상목
이슬비는 2025.04.11 (금)
봄을 머금은 이슬비는 아기 숨소리보다 조용히세상을 어루만집니다 보드라운 손길로민들레 얼굴을 씻기고가로수 조막손 살며시 펴게 합니다 늦잠 자는 꽃망울가만가만 깨우며서두르지도성내지도 투덜거리지도 않습니다 풍경을 부둥켜안는 이슬비는 괜찮다 괜찮다 다독이시던어머니의 속울음입니다.
임현숙
브레넌의 죽음 2025.04.11 (금)
“아이고 우리 딸이 너무 바빠서 먼지도 못 닦고 다니는구나!”   딸의 차 운전대 위에 하얀 눈처럼 먼지가 쌓여 있었다.   "엄마! 그거 건드리지  마! 아직 브레넌 털이 남아 있어, 그냥 놔둬. 엄마, 플리스."  딸의 목소리는 울음을 삼킨 듯 떨렸다.  브레넌이 떠난 지 벌써 반년도 넘었는데 ...  "아직은 아냐. 좀 더 있다가 닦을게. 지금은 그냥 놔둬."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지난 여름 방학을 며칠 남겨...
김춘희
그대 뒷모습 2025.04.11 (금)
서녘 하늘에 별이 돋는다. 마음이 잔잔해야 보이는 초저녁별, 실눈을 뜨고 별 속에 아는 얼굴이있나 찾아본다.지난겨울에는 눈이 자주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릴 때마다 우리나라 문화계의 큰 별들이 떨어졌다.미당 선생이 떠나시고 얼마 후, 온종일 눈이 내리던 날 정채봉 선생이 눈 나라로 가셨다. 이어 운보선생도 떠나셨다. 그 뒤로는 겨우내 하늘이 낮게 내려앉으면 또 누가 떠나실라 겁이 났다. 이윽고 건너다본 커다란 눈, 그 웃음 뒤에 끝 모를...
반숙자
별(星)의 집 2025.04.11 (금)
산그늘 아래 조가비 같은 오두막 한 채저녁 밥물 끓는 소리 도랑물처럼 흐르고굴뚝 연기 아스라이 어스름을 몰고 오는데박꽃처럼 허리 휜 어머니가정짓간 문턱을 넘나듭니다사립문을 건너온 초저녁 별들이초롱불처럼 처마 끝에 깃을 내리면비탈 밭에서 달빛을 지고 돌아오시는 아버지,실루엣 같이 구부정한 아버지의 뒷모습도달빛처럼 환해집니다아이들 글 읽는 소리마저 아득히 사라지고고요가 홀로 내려앉아 졸고 있는 집,곤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영춘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