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이제 남은 일은 기다림뿐이다. 그늘진 곳에 놓인 항아리 속 포도주는 지금 숙성 중이다.
와인을 ‘병에 담긴 시(Wine is bottled poetry)’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어느 날 저녁,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하더라/ 나는 알고 있나니 내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
주려면/ 저 불타는 언덕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땀과/ 찌는 듯한 태양이 있어야 하는가를---
(샤를 보들레르)
올가을 14년생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많은 양의 레드 딜리셔스 품종의 포도를 수확할 수 있었다.
농익은 포도를 수확하는 뿌듯함도 잠시, 집 안팎은 날파리들의 집결지가 되어 버렸다. 이웃에게
돌리고 포도 주스도 만들며 날파리 퇴치에 고심하던 끝에 나는 포도주 담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25Kg의 포도알을 떼어내 씻고 가볍게 치대어 설탕과 효모(yeast)를 넣고, 항아리에 담는 일은 고된
작업이었다. 포도의 당분을 알코올로 변화시키는 효모는 포도주가 완성되기까지 일등공신이다. 발효
과정을 거쳐 두 번 걸러진 포도즙은 아로마의 완성도를 높이는 긴 숙성 기간이 필요하다. 시고 단 맛의
포도즙은 긴 동면의 시간을 보내며 우아한 향미의 붉은 포도주로 변신할 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포도 재배는 BC 8000년경 중동 지방에서 시작되어, 레바논 민족의 조상인
페니키아인에 의해 이집트, 그리스, 로마로 퍼져나갔다. 중세 로마에서 포도주는 교회 미사의 성찬
전례와 물을 대신한 대체 음료로 많이 쓰였으며, 그 양조기술은 로마가 지배하던 유럽 전역과 지중해
연안 아프리카로 널리 전파되었다. 19세기 프랑스 생화학자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증식에 의한
발효’와 ‘저온 살균법' 연구는 효모의 배양, 살균, 숙성에 이르는 와인 양조기술을 크게 발전 시켜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며 ‘신의 과일'로 불리는 포도는 우리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 포도 씨와 껍질에는 항암 작용과 면역체계 증진 및 퇴행성 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으며, 발효 과정을 거친 레드 와인에 함유된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이라는 항산화 물질은 심혈관 질환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인의 모순(French Paradox)’이라는 말은 고지방 음식을 많이 먹는 프랑스인들의
식습관에도 불구하고 심장병 발병률이 상대적으로 낮음을 일컫는다. 레드 와인을 식사에 곁들이는
프랑스인들의 식습관에서 의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고 있다.
또한 역사 속 인물들은 마음을 치유하는 와인을 칭송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와인은 슬픈 사람을
기쁘게 하고 참신한 영감을 준다.” ”와인은 나이 들어 만나는 좋은 친구이다. 돈과 시간, 노력, 그 모든
것의 총합보다 더 많은 양과 질의 행복을 선사해 준다.” “와인은 심각한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치가
있다.” “와인 속에 진실이 있다( In Vino Veritas)!”
긴 우기의 겨울날, 포도 수확의 기쁨을 기억하는 두 마음은 붉게 상기될 것이다. 최적의 토양에서
최고의 기술로 빚어 깊은 향과 탄닌의 풍미를 지닌 명품(cult) 와인이 아니어도 충분하다. 눈으로 빛을
보며 잔을 부딪쳐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으며 맛을 본 후 온몸으로 퍼지는 부드러운 감각을 느끼고---
. 두 사람은 포도주를 주관하는 디오니소스의 도움으로 삶에 진솔한 의미를 부여하며, 서로에게
조금씩 관대해질 것이다.
노부부가 살아온 세월은 포도주가 발효되어 숙성되는 과정과 많이 닮았다. 회오리바람이 비켜 간
세월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서로의 관점에 몰입하던 두 사람은 이제 물과 불의 조화로움을
받아들여 갈등을 최소화하게 되었다. 돌담을 쌓듯 켜켜이 쌓아 올린 곰삭은 정은 서로의 빈틈을
채워가며 평온함을 유지한다. 아픔과 기쁨을 함께하며 안팎이 닮아가는 두 사람 가슴에 환한 달 하나
둥실 떠오른다.
우리가 빚은 술에는 소노마 밸리의 자긍심인 ‘프라이드(Pride)' 와인에는 없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텃밭에 포도나무를 심어 가지가 마음껏 자랄 지지대를 만들고, 퇴비를 얹어주며 땀 흘리던 날들이.
강렬한 햇살과 부드러운 흙의 기운, 바람을 타고 온 지니의 마법이 담긴 붉은 포도주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우리 마음의 이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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