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외출
[이문열 단편소설_이드, 자아, 초자아 분석]
이명희|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줄거리-평범한 직장인 형섭에게 벌어지는 일요일의 역정.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야 할 일요일 아침,
늦잠은 커녕 악몽을 떨치면서 사건이 전개된다. 소망하던 집은 장만했으나 좀도둑을
몇 번 맞은 아내가 집의 담을 쌓길 채근한다. 높은 담장은 형섭의 어린 시절 추억과 소망을 박탈당하는 일이다.
현실에 적응하고 살림 잘하는 아내에게 거절할 명분이 없어 담은 쌓았지만, 형섭의
마음은 내내 언짢다. 거기다 아들을 통제하는 아내의 자식 교육도 못마땅하다. 집 밖을 나돌며 동창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들에게 조차 이방인의 모습을 느끼며 달팽이
같은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본다.
분석-‘커튼을 걷던 그는
당황한 기분으로 손길이 멈추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낯익은 북악이 아닌 쇠창살이 쭈뼛쭈뼛 솟아오른 새 담이었기
때문이다.’ 유년과 소년 시절의 추억을 대신해 줄 낮은 담이
높은 담으로 바뀐 것이 심적으로 힘들다. 홀어머니 손에서 마음껏 뛰어놀지 못한 억울함이 이드에 갇혀 있다. 아들 욱이를 끌고 들어오며 아내가 하는 말, “당신은
애가 대폿집 과부의 아들이나 야채 장수의 딸들과 어울려 진흙탕을 뒹굴며 쌍스런 욕지거리를 떠들어대도 좋다는 거예요?" 아내가 아들의 친구들을 신분으로 차별하는 발언이 못마땅하다.
“여보,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 법이 아니오. 대폿집 과부건, 야채 장수건 그게 어디 사람 탓이오? 애들을 그런 식으로 길러서는 못써요.” 끔찍한
말을 한다는 아내의 표정에 기분이 불쾌하다. 세상의 잣대로 자식을 교육하려는 아내의 자아와 형섭의 초자아가 대립한다.
아내에게 혼나는 아들을 바라보며 좋은 환경에서도 마음껏 놀지 못하는 아들이 안타까워 이드에 젖는다. ‘내겐 유년이 없어… 그 자유분방함과 홀랑 벗은 친구도… 대신 아이들을 위한 어른들의 거짓말 모음이나 부정확한 임화 나부랭이가 널려
있는 공부방과 흔해빠진 화초분으로 걸음마저 조심해 걷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좁은 뜰에 감금된 기억. 그리고
항상 옷에 싸여 있어 햇볕이 모자라는 소위 교양 있는 가정의, 부모의 취미에만 충실한 박제 친구가 있을 뿐이야.’ 자신의 환경을 떨쳐 버리고 싶은 이드의 기억과 자신과 상반된 친구들을 경멸하는
초자아적 비판을 볼 수 있다. 이문열 작가는 임화를 나부랭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림의 복사판’이라는 본뜻보다 월북한
작가 임화를 비하한 다의적 의미로 분석된다. 참고로 작가의 아버지 또한 월북했다. 형섭은 현실적인 아내와 살면서 이상이 사라져,
세속적 삶과 맞바꾼 자신이 조그만 세계에 칩거했다고 생각한다. 초자아적 삶을 갈구했지만 현실 속 가장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형섭은 동창인 작가와 그의 제자들과 술을 나누며 대화의 열을 올린다. ‘젊은이들이라면
우울한 이 하루를 보상해 줄지도 모른다. 따뜻한 영혼의 교류와 함께 잃어버린 과거에로의 통로를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화가 중단되고 어색한 침묵 속에 새롭게 살아나는 불신과 적의, 어떤 경우보다 더 단단한 막으로 그들의 틈입을 거부하고 있었다.’ 형섭의 자아가 젊은이들의 초자아에 걸림돌이 된 경우다.
그들이 말하길 “연금술사는 아무래도 금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과로 유익했더라도 연금술사의
오류와 화학자의 오류는 엄격히 구별돼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런 언어의 연금술사가 너무 많습니다.
땀 흘려 노력하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피 흘려 고뇌하기에는 너무 비겁한.” 형섭은 자신이 그 어떤 날보다 견고한 담 밖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다.
형섭의 자아가 젊은이들의 사고를 뛰어넘지 못했고
젊은이들도 현실의 벽에서 초자아를 실현하지 못해 한탄한다. 몽롱한 취기 속에서 새벽의 악몽이 떠오른다.
감옥에 갇혀 자기를 애절히 부르던 아들 욱이. 내부로 들려오는 목소리로 순간적 혼동을
일으킨다. 이드와 자아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다. 어릴 적 이드에서
자아로 넘어가기까지 자아보다 초자아만 키워버린 기형적 사고가 보인다. '그래, 욱아 너에게는 유년과 친구들, 나에게는 이웃과 자유를, 사람들은 자기의 조그만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담을 쌓지만, 사실은 외부의 더 큰 세계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이란다. 자기를 가두는 짓이며 이웃을 외롭고 슬프게 하는 거란다.’형섭은 들고 온 쑥돌로 힘껏 시멘트 담을 내리쳤다. 아들 욱이가 마음껏 놀지 못하는 것과
자신이 현실의 높다란 담에 갇혀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로 담을 허물었다. 이드적인 삶을 소망하는 자아와 초자아적 삶을 열망하는 자아, 형섭은
양면의 세계를 갈구한다.
1984년대 ‘달팽이의 외출’의 형섭과 2020년대
현대인은 이상을 꿈꾸는 단세포적 가장과 기지를 발휘해야 하는 다세포적 가장으로 구별된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얘기다. 공통점은 둘 다 독야청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보다 시급한
현실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36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장의 삶은 달팽이와 같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이론에서 ‘인간 성격의 구성요소를 이드. 자아. 초자아’라고 했다.
이것은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드, 자아, 초자아는 자신의
환경에 따라 눈높이가 다르다. 세 개의 촛불이 상호작용할 때 건강한 정신세계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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