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누군가의 철없는 행동에 자꾸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 정도는 눈치껏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불평을 멈추고 행동해라', '예의를 갖추고 어른스럽게 굴라'며 나는 주위 사람들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못마땅해 한다. 십 대가 된 아이들에게, 혹은 서툰 신입 교사들을 향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의 비난과 질책을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나도 완벽한 어른이 되지 못한, 여전히 서툴고 모순된 존재라는 사실에 종종 가슴이 뜨끔하다. 혹여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나잇값 못 하는 사람'으로 비칠까 뒷모습을 점검하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지금 나잇값을 하며 살고 있니?"
마흔을 넘기고 쉰의 문턱에 들어서면,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어른의 여유'를 요구한다. 젊은 시절의 나는 오십 대가 되면 바다 같은 포용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웬만한 실수는 허허 웃어넘길 줄 아는 그런 근사한 중년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전히 작은 일에 서운함을 느끼고, 때로는 고집스럽게 내 의견을 피력하며, 이십 대의 나보다 더 편협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나잇값을 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건만, 돌아보면 여전히 나는 그 숙제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만 같다.
돌이켜보면 시대마다 '나잇값'의 정의는 달랐다. 이십 대에는 경제적 독립을 통해 한 개인으로 온전히 서는 것이 나잇값이었고, 삼십 대에는 가정을 꾸리고 내 선택에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숙제였다. 사십 대에는 내가 이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얼마나 유능한지를 증명해야 하는 치열한 시간이었다. 이 모든 과정이 '나이가 들어가는 속도에 맞춰 인격도 정비례하며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던 것 같다. 오십을 바라보며 나는 지나온 세월만큼 지혜롭고 너그러운 성숙을 기대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쌓인 실패의 경험과 상처 때문일까. 오히려 내 것을 내려놓고 타인을 포용하는 일이 더 어렵게만 느껴져 깊은 좌절감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온전한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나의 작음과 편협함을 부끄럽게 여기며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지금의 모습, 더 나은 선택을 하려 애쓰는 과정이야 말로 내가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나잇값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떠나는 날까지 조금씩 다듬어가는 '진행형의 숙제'인 셈이다. 그저 어제의 나와 비교했을 때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자고, 비난과 질책이 빗발치는 세상에 따뜻한 미소와 언어를 뿌리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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