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2016년 2월 12일, 나는 에어 캐나다의 서울행 비행기에 있었다. 어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급하게 자리를 하나 구해서 다음날 출발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급한 대로 나에게 벌을 내리고 싶었다. 밤을 헤치고 달려서 도착한 오랜만의 인천 공항은 익숙하지 않았다. 익숙한 한국어로 물어물어 공항을 빠져나왔다. 연락받고 공항까지 마중 나온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생각과 달리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앞일을 가늠하며 우리는 시나리오를 짜고 계획을 세우지만, 세상은 내 예측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어디서 들었는지 속속 도착한 초등학교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며 함께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렇게 세상은 예측에도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다음 날 오전 어머니 염을 하는 시간이라 누님들 매형들과 함께 염실로 내려갔다. 유리창 밖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육신을 보는 것이다. 가족 대표로 한 명의 도움을 요청받았다. 누군가 염실 안에서 염을 하는 동안 누워계시는 어머니 머리를 움직이지 않게 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아들과 딸 이라는 구분. 한국 문화의 곳곳에서 도도하게 살아있는 성리학의 그림자는 나를 다시 호출하였다. 그 순간이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삶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과 거기서 파생된 혼란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선택한다. 내가 내린 선택들이 지금 나의 현재이다. 결과가 뻔했던 선택들도 각자 살아온 맥락과 다른 상황을 고려해 비춰보면 그 선택의 무게는 제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인간도 생물학적인 면에서는 동물의 한 종류이니 무리에 짓고 사회를 만들고 함께 살기 위해서 합의된 기준으로 욕망을 통제해 왔다. 그래서 해야 할 일과 안 되는 일들의 경계가 나뉘고 도덕과 제도가 만들어져 이는 세대를 건너 미래세대의 욕망을 통제한다. 그 무리의 경계 안에서 도덕과 윤리의 문화는 정교해지며 문명을 쌓아 올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경계와 문명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다. 어떤 화려했던 문명도 역사적인 흥망성쇠가 있다. 한 개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체면과 지금까지 쌓아온 평판과 성취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추락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그 순간이 그랬다. 2008년 아들 둘이 초등학생일 때 캐나다 이민을 오게 되었다. 2000년 초부터 2번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다. 그것이 간질 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몰래 이민을 준비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혼란했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한 친구가 퀴즈를 냈다. 아마 어두운 분위기를 환기하고 이야기를 빗대어 나를 위로하고 싶었으리라.
"야, 너희들 만약에 말이야 길을 걷다가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강물에 빠졌어. 그 상황에서 여건상 딱 한 명만 구할 수 있다면 둘 중에서 누구를 구할래? 너희들 그거, 아니? 현명한 사람은 아내를 구한다더라. 마음 아픈 선택이지만 왜냐하면 엄마는 과거이고 아내는 미래를 상징하는 거니까.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선택하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하네."
자신도 한 어머니로서 결심을 품은 이야기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 들으라고 한 말인 것을. 본인도 한 아들의 엄마이기도 하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살고 있으리라. 하지만 현실의 삶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렇게 이거 아니면 저거로 명쾌하게 선택할 수 있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쉬울까? 그렇게 무 자르듯이 살기 힘든 것이 피부로 접하는 일상이고 현실이다. 그때 나는 이런 대답을 속으로 하였다. 나라면 강물로 뛰어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둘 중 누구 하나를 살려내도 그 미래는 어차피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니까. 그러니 그런 상황. 수영을 못하면 물가에 가까이 가지 말자. 그런 상황에 부닥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 비현실적인 선택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과거나 미래는 어느 하나 택일의 선택 문제가 아니다. 과거 미래는 현재를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상생한다. 미래는 현재의 활력과 결속되어 밝아 보이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 지금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하여 미래가 밝다면 희망이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이다. 미래가 어두워 보이면 지금이 어두운 것이다. 지금 터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응원이 필요하고 처한 상황을 잘 견뎌야 할 시기인 것이다.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선택하려는 욕망으로 충만하다. 내가 할 수 없는 잘못된 선택들. 해서는 안 되는 선택들. 그리고 남들이 잘 못 선택한 책임을 수습해야 해야 하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지능보다는 욕망에 가까운 것이 선택이라는 행위이고 그 결과를 나의 기대에 맞추는 건 훨씬 더 복잡하다. 심사숙고한 이성이 감정에 휘둘리기 십상이고 세상은 헛똑똑이들로 넘쳐난다. 미래는 다른 많은 욕망과 그에 따라 파생된 선택들로 맞물려 있다. 그러니 타인들의 선택으로 처한 지금 나의 상황을 잘 깨닫는 게 오히려 더 현명한 처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나만의 인식인 강철 감옥을 벗어나는 계기가 타인의 방문. 만남이다. 타인은 나를 노크하고 졸린 나를 깨워주는 반가운 손님과 같다. 타인의 방문. 대화와 소통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혼란한 시대에 언어능력과 교양이란 시민의식의 성숙함이 기다려진다. 성장의 욕망이란 다른 이름인 평생의 공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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