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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산방(如如山房)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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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5-10-17 15:45

조정 (사)한국문인협회 밴쿠버지부 회원
 나지막한 능선이 방패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희미한 여명(黎明)이 산마루를 비출 때면 안개 속에 숨어있던 금대산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토록 맹렬하던 매미들의 아우성도 짧은 생으로 잦아들고, 애벌레를 물고 날아다니는 박새와 곤줄박이들이 분주히 숲속을 살피고 있다. 올망졸망 매달려 장대비를 맞던 밤송이들도 풋기를 거두고 씨알을 키우는 중이다. 가시 투구 속에서 단단하고 둥글게 몸을 만들어 홀연히 땅으로 떨어질 알밤들이다. 곡식과 과일이 무르익는 백로가 지난 울창한 숲에 뭇 생명들의 가을맞이가 한창이다. 
 
 가까운 거리의 사계절 산을 집안으로 차경(借景)해 바라볼 수 있음은 큰 즐거움이다. 아파트의 폐쇄된 공간에서 산을 마주하는 거실 창은 풍경을 담아내는 큰 액자다. 연둣빛 잎새들이 서로 스미고 어우러져 몽환적인 파스텔화를 그리는 봄부터, 나뭇가지마다 눈꽃을 피워 비경의 수묵화를 그려내는 겨울까지, 살아 숨 쉬는 숲속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가을빛이 도는 산등성이에 눈길을 주다 집은 사는 이의 모습을 담는다는 말을 곰곰 생각한다. 단출한 가구로 넓어진 공간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산을 바라볼 수 있음에 자족하며 단아한 집의 이름을 찾아본다. 집의 이름을 짓는 것은 머무는 공간에 대한 고마움과 삶의 지향을 새기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집은 이제 생존을 위한 기능을 벗어나 신분과 재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지만, 위로와 휴식을 얻는 역할이 우선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먹고 자는 공간이라는 실리성뿐 아니라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여 내일을 설계하는 소중한 공간이기에.  
“소박한 집이 주는 안정감은 굳이 밖으로 나돌며 무엇을 얻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한 건축가의 전지적 관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주변 경관이 편안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자리에 집을 지어 고졸한 뜻을 담은 당호(堂號)를 지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은 신유사옥(1801)으로 유배 길에 올라, 큰형 정약현의 삶을 돌아보며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글을 남겼다. 정약현은 나를 지키는 서재라는 뜻이 담긴 ‘수오재(守吾齋)’에서 학문을 연구하며 단정한 삶을 살아, 환란에 휩쓸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다산은 ‘어떻게 나를 지킬 것인가’하는 스스로의 물음에, 잠시라도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벼슬길에 종속되는 이익과 위세도 폐단이 된다고 깨닫는다.
 
  긴 고심 끝에 집의 이름을 ‘여여산방(如如山房)’으로 지어본다. “여여’란 금강경의 마지막 32분 ‘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에서 "어떤 형상에도 집착하지 않아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뜻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항상 함이 없기에 세상을 보는 내 관점을 고집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의 판단도 잠시 내려놓을 때 존재의 참모습을 보게 되리라.’
 집의 이름을 마음에 두고 앞산을 바라본다. 큰 바위가 묵묵히 산마루를 지키고 있다. 무한한 외로움을 견디는 바위는 존재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며 나를 다독인다. 어젯밤 비로 물이 불어난 시냇가에 몸집이 큰 백로 한 마리가 외발로 서 있다. 언제나 깨어 있기를 화두로 삼은 백로는 물속을 응시한 채 삼매경이다.  
 
 풀 내음 은은한 우전차 한 모금을 넘기니 잠시 우화등선(羽化登仙)이 된 듯 마음이 가볍다.
뎅그렁…, 푸른 허공에 매달린 물고기의 맑은 화음에 귀를 기울인다. 여여함이 나를 지키는 방패임을 아는 아침, 풍경소리가 바람결에 청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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