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경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커피를 주문할 때 우유를 넣어 부드럽게 마시려면 약간의 공간을 남겨야 한다. 김치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통에 담을 때도 여유가 필요하다. 꽉꽉 눌러 담은 김치는 발효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스 때문에 국물이 흘러 넘쳐 냉장고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채득 하는 데도 여러 번의 실수와 후회를 반복했다.
인생의 기나긴 항로 속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숨 막히는 불안과 근심이 공허를 넘어 존재의 이유까지도 흔든다. 그래서일까? 보험을 드는 기분으로 뭐든 넉넉하게 채우고 싶은 욕구가 발동한다.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들, 수납장과 창고에 쟁여 둔 수많은 물건들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고 정신적 평안을 가져다주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고난에 굴하지 않고 완주할 수 있는 인내로 내면을 채우는 것, 묵은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회복하는 것이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것들을 채울 마음의 여유가 없다.
어쩌다 쓰레기처럼 버리야 할 것들을 쌓아놓고 동동거리며 살게 된 걸까? 걷어내고 비워서 꼭 필요한 것을 담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과 염려로 가득한 마음에는 사랑, 공감, 연대와 같은 아름다운 가치를 담을 자리가 없다. 과감하게 정리하고 쓸어버리고 싶다.
마음의 여백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나는 잘 모른다.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책상부터 정리하고 앉아 컴퓨터를 켠다. 창밖으로 보이는 연둣빛 신록과 새들의 명랑한 지저귐이 새삼스럽게도 행복감에 미소 짓게 한다. 봄볕이 이렇게 찬란하고 따뜻했구나. 나뭇잎이 더 짙어 지기 전에 여린 잎사귀의 신비를 느낄 수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부터 먹고사는 것에 정신이 팔려 삶의 수단이어야 할 물질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가득히 쌓아놓고 살면서도 늘 결핍감에 시달렸던 것일지도. 값없이 주어진 자연의 풍요로움이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한다. 넉넉하고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열쇠는 거창한 것에 있지 않다.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예상치 못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힘은 삶의 여백을 확보함에서 비롯된다. 상쾌한 아침 공기 속에서 잠시 멈춰 선다.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깊이 느끼며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그리고 당부한다.
"Could you leave some room for milk, pl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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