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남은 날들의 축복

민정희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3-28 16:15

민정희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할머니가 울고 있다. 하얀 눈밭 속에서. 검은 연기는 하늘로 오르고, 그 밑엔 떠나간 할아버지의 옷들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 김광석의 ‘60대 부부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고 생전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조각조각 스쳐 지나간다.
 
  하루 종일 할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이 망막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유튜브에서 우연히 보게 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영상 때문이었다. 10년 전에 방영된 89세와 98세 노부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강원도 횡성 어느 산골, 6남매의 자녀들은 장성하여 도시로 떠났고 둘만 남은 노부부는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살아간다. 나무를 때서 구들장을 덥히고 개울물에서 빨래하는 열악한 환경이지만, 두 사람은 연인처럼 서로를 아끼고 보듬는다. 둘이 마주 앉아 세월만큼 주름진 손을 만져주는 모습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연민이었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그들의 따뜻한 미소는, 삶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함께 나이 들어가며 쌓아온 정과 추억이야말로 행복의 본질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이들이 독립해 떠난 집은 고요함을 넘어, 적막으로 가득하다. 아이들이 곁에 있을 때는 삶의 초점이 그들에게 맞추어져 있었다. 하루의 일과도, 매일의 식탁도 오롯이 아이들의 시간과 입맛을 위해 존재했다. 나와 남편의 삶은 그 뒷전에 머물렀고, 우리를 위한 순간은 아이들의 웃음 속에 녹아 있었다. 늦은 나이에 자녀를 본 우리는 아이들에 대한 끈을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다. 이제 그 중심은 비워진 채로 남아, 이전에 없던 공허한 여백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아이들이 없는 휑한 집에서 각자의 생활을 하는 우리는, 부부이기보다는 룸메이트에 가깝다. 집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각 방에서 책을 보거나 컴퓨터와 함께하며, 식사 시간에나 겨우 마주 앉아 서로의 얼굴을 본다. 그러나 누가 화장실을 가거나 잠시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어디 갔나 찾아다닌다. 그런 자신들을 보며 우린 피식 웃음 짓곤 한다. 별로 대화가 없어도, 같이 취미를 공유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는 것일까. 어쩌면 공기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데도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너무 달랐다. 취미도 식성도 성격도 어느 하나 맞는 것이 없었고 공감하는 부분도 달랐다. 작은 갈등들이 모여 한때는 불만으로 가득 차기도 했고, 가끔 볼멘 소리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깊이 자리 잡은 성격을 바꾸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더는 서로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지금 이렇게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가는 것은 적당한 포기와 체념으로 다름을 용납했고 그것 또한 익숙하게 되었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우린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에게 길들었는지도 모른다.
 
  두 남녀가 만나 결혼할 때 주례사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해로(偕老)하라는 말을 하곤 한다. 부부가 함께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선물이다. 하지만 해로한다 해도 결국 그 끝은 한 사람이 먼저 떠나고 한 사람이 남겨지는 이별의 시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떠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몫일 지도 모른다. 부모 밑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더 많은 세월을 함께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될 때, 그 상실감과 공허함은 떠난 이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다. 빛바랜 페이지 속에 담긴 순간들을 꺼내어 되새기며 남은 날들을 보내게 되리라.
 
  영상 속 할머니의 모습이 내 뇌리에 머물러 있었던 이유는, 멀리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별이 언제 불현듯 다가올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삶의 유한함을 피부로 느끼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우리 부부의 검었던 머리도 백발이 되어 간다. 한때 나보다 총명했고 길눈도 밝았던 남편은 눈도 귀도 어두워졌고 운전마저도 서툴러졌다. 지금, 서로의 곁에 함께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때인지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미래라는 전제 아래 당연하게 여겨왔던 시간이 실은 잠시 머물다 가는 생(生)이라는 것 또한 자각한다.
 
  아이들을 향해 끝없이 뻗어가던 마음의 더듬이를 안으로 거두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너무 익숙해져 무심했던 서로의 관계에 이제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하리라. 공동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남편의 버킷 리스트를 살펴본다. 사소한 일이라도 같이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실행에 옮기리라 다짐한다. 인생이란 숲 가장자리에 잠시 깃든 새와 같다고 했던가. 아침 햇살 속에 “잘 잤어?” 한마디 건넬 때, 감사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을. 보증 없는 내일보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충만한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별의 준비이자, 남은 날들을 위한 축복 된 시간이 아닐까.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무채색의 여인 2026.05.29 (금)
옷장 문을 열자, 색색의 스카프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꽃무늬부터 원색이 섞인 대담한 무늬가 대부분이다.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색상이다. 스카프는 물론 옷조차도 무늬 없는 단색이나 어두운 계열만 즐겨 입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어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늘 비슷한 색과 스타일이었다. 그런 모습을 일부러 연출하거나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미술 동아리에서 한 동료가 “오늘도 무채색의...
민정희
국수 먹는 날 2026.05.29 (금)
마을 사람들 모여 대 솥 걸고 삶아내는 국수 기뻐서 슬퍼서 지쳐서 맺은 깐부를 평생을 찾아다닌다 이 손 다음 손들이 밀어낸 칼국수 가마솥에 풍덩 담가 빨간 고추가 어른거리는 가을 하늘에 양념장을 한다 구름에 세월 가도 낯설은 이름 칼국수를 시장 골목 끝에서 찾는다 양철 대문에 쓴 이름 ‘칼국숫 집’ 큰 소리로 고향 친구를 부른다 식당 아주머니 항아리 앞치마에 하얀...
반현향
가야금 2026.05.28 (목)
불러야 할 곡이 있어그대 태어났는가 쪽 찐 머리 빗질하듯 줄 고르고떨쳐 앉은 무릎에 기대어현침에 오르내리는 바빠진 손길 들려줄 울음 있어그대 태어났는가 어깨 타고 줄 위에 흐르는 애달픔꺾이는 가락마다 뛰노는 가슴마지막 떨림마저 어느덧 잦아들고  울어야 할 슬픔이 남아 그대 태어났나속 울음 속 울음에 껍데기만 남아버린저어할 노래가 있어 몸으로 울 가얏고
김민관
죽음을 통한 회복 2026.05.28 (목)
                                                                         이명희/캐나다 한국문협 회원서론-한동안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죽음에 눌려 있다가 이유리의 연작소설을 읽고 나니 뭉쳤던 근육이 풀렸다. 죽음은 산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수긍해야 하나라는 책임이 따른다. 죽음의 의미는 경건이지만...
이명희
구피 클럽 2026.05.22 (금)
구피는 물이 담긴 투명한 비닐봉지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비닐봉지를 건네받아 구피들을 조심스레 어항 속으로 쏟아 부었다. 구피의 형형색색을 따라 빛을 내던 비닐봉지가 이내 쪼그라들었다. 손에 묻은 물을 추리닝 바지에 대충 닦고 있는데 아버지가 먹이통을 들고 와 나를 옆으로 밀쳤다. 아버지가 먹이를 뿌리자 구피들은 작은 입으로 먹이를 받아먹었다. 구피가 입을 벌렸다 오므릴 때마다 물방울이 피어올랐다. 이 순간,...
고현진
꽃은 아직 2026.05.21 (목)
함박꽃이 피면 바람결에낯익은 그림자 올 것만 같아아침마다 마당을 서성인다 밤새 비라도 내리면꽃봉오리 빗물에 무거워질까창문을 열었다 닫는다 햇살 깊은 날이면오늘은 끝내 환한 속살 보일까그림자 길어질 때까지골목 끝에 걸린 눈길 하나 꽃은 아직꽃잎을 여미고 있다  함박꽃 봉오리 앞에서심장 소리 먼저 봄을 건너고 마른 입술 사이 침을 삼키듯아껴둔 이름 베어 문다 마중 나간 발소리는 더뎌서몇 번의 봄비를 더...
강은소
불효자의 곡(哭) 2026.05.21 (목)
생명체인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당연한이치이겠지만 태어남은 죽음을 약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세월이흐르면 생명체의 세포는 노화(老化)되고 유한(有限)한 것이기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진리(眞理)는 불변(不變)인가 하는 것도 요즈음 세상에서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세상에 불변이란 것이 있는가 하는 의문도 해보기도 한다. 보름 전 어머니의 부고를 접하고는...
노동근
낡은 이불 2026.05.15 (금)
열 살 남짓한여름 이불을 꺼낸다 몸이 오가던 길이손금처럼 갈라져 있고보라 꽃잎마다누에가 실을 잣는다  몸이 찌푸리면길도 따라 구부러졌고설레어 잠 못 들 때신작로가 등 뒤로 뻗어갔다 밤마다오랜 일기장을 뒤적이듯갈라진 길을 더듬으면 그날들이 올올이 손을 흔든다 어머니가구멍 난 스웨터를버리지 못했던 까닭이 해진 꽃잎에서줄줄 풀려나온다.
임현숙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