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25-02-14 16:19

김해영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벌써 ‘블랙 베어 출몰’ 사인이 섰다. 1월 중순에, 것도 하이웨이 진입로라 번잡한 시모어 파크웨이에 곰이 나타났다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쿠거라면 모를까. 첫눈이 오기 전 굴로 들어가 동면하는 곰이 한겨울에 출몰한다는 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먹이를 찾아 인가를 내려왔다는 얘긴데... . 이전까지 그네에게 곰은 오동통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은 짧은 다리로 궁둥이 흔들며 가는, 판다나 테디 베어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였다. 그러나 사인을 본 순간 두 발로 번쩍 서서 앞발로 어퍼컷을 치며 크르릉거리는 포악한 불곰이 떠올랐다. 그네 머릿속에 왱왱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다. 

 하필 쓰레기 수거일이다. 몇 달을 굶은 곰에게는 콤콤한 냄새가 나고 유독 음식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한식이 최고의 미식일 터. 이사 오던 날 밴댕이젓에 홀린 곰이 차고에 들어와 젓갈통을 계곡까지 끌고 내려간 적도 있었지. 나는 듯이 달려가 곰 설거지를 해야 한다. 오렌지 담긴 비닐봉지와 한 칫수 큰 운동화가 그네 걸음을 지척이게 한다. 영감이 딸의 해진 운동화를 끌고 가는 그네를 보았다면 “에고, 이 미련퉁아.” 하고 또 퉁을 주었을 것이다. 절약이 부끄러워지는 자본주의 세태를 탓하며 꿋꿋이 검약을 실천하는 그네지만 오늘만큼은 궁상 떠는 자신이 정말 싫다. 

 지름길인 까페 뒷골목을 간다. 두 집 건너 하나씩 녹색 컨테이너가 쓰러져 있다. 바닥에 질펀하게 쏟아져 나온 음식 쓰레기가 마치 야생동물 사체에서 흘러나온 내장 같다. 역한 냄새가 그네의 불안지수를 최고조로 돋운다. 평생을 냄새 분석가로 살아온 그네에게 악취는 화생방 경보격이다. 세살박이 손주와 아홉살 노견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네의 발뒤꿈치에 통먼지가 부옇게 인다.  

 그네가 사는 바이올렛 가(街)의 쓰레기통들이 삐뚤빼뚤하지만 곳추 서있다. 곰의 순례 노선에서 빗긴 모양이다.  숲에 둘러싸인 집 주변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혹시 영감이 아기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간 것 아니야?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TV에선 폭폭 증기기관차가 증기를 뿜으며 달리고, 손자는 레고 장난감 기차를 굴리며 놀고 있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조는 영감 발치 아래 강아지가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다가 그네를 보고 다시 잠든다. 햐, 영감도 강아지도 똑같이 무신경하구나. 사람이 드는지 나는지, 밖에서 무슨 난리가 나는지도 모르고... . 섭섭함 한편으로 그들의 둔함이 부럽다. 

 후각뿐만 아니라 오감이 다 예민한 그네는 작은 변화에 쉬 적응을 하지 못한다. 사람 대하는 처세술도 능하지 못하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군중이 모여 소란할 만한 곳은 무조건 피한다. 그런 그네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가 남편이다. 그의 손을 잡은 탓에 팔자에 없는 대가족 시집살이와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기, 이역만리 외롭게 살기 등 도전의 연속인 삶을 살아왔다. 그를 만나 예각이 많이 문드러졌다고 여겼는데, 작은 일에 섬찟 놀라는 새가슴 증세는 여전하다.

 “할미, 요거 봐.” 손자가 레고 인형 둘을 장난감 기차에  올린다. “웰컴 온 보드. 시애를, 로스앤젤러스, 샌프란치스코. 뿌앙뿌앙.” “아이구, 할미 멀미 나요. 요래 빨리 달리믄. 사목사목 가자.응?” “알았쪄. 뿌~앙 뿌~앙. 오케이?” 손자의 재롱에 화산재처럼 솟구치던 흑구름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영감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까치발은 든 채 그네의 숨터, 발코니로 나간다. 하늘을 덮을 만큼 키큰 나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있다. 산정에 고깔처럼 얹혀있던 눈이 녹아 흐르는 도랑물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코끝을 스쳐가는, 알싸한 냄새 냄새들... . 그 숲을 향해 큰 숨을 부려놓는다. 심해에서 삶의 잔해를 건져 올리는 해녀가 수면에 올라 터뜨리는 숨비처럼. 가쁘던 숨이 가지런해진다. 평생 그네를 짓누르는 궁상과 남루함, 이민 오면서 생긴 끝없는 불안과 노파심이 솔솔 빠져 나간다. 청설모 한 쌍이 아름드리 참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며 사랑놀이를 하고, 새들이 꽃처럼 붉은 열매를 매단 나뭇가지 사이를 그네 타듯 넘나들고 있다. 

 뻐꾸기 시계가 3시를 알린다. “엉감, 누나 누나.” 손자가 제 누나 하교 시간을 기막히게 알고 시계를 가리키며 영감의 어깨를 흔든다. 그네 하는 짓과 말투 그대로다. “어어, 네 할미하고 가거라.” 다시 돌아눕는 영감에게 “당신이 가요. 오늘 곰 나왔대요.” “곰 나온 게 하루 이틀인가. 여기서는 동물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요. 만물평등.” 게으르게 일어나 손자 손을 잡고 나서는 영감 등에 “애는 두고 가지.” 뒤늦은 잔소리를 얹는다.

 손녀가 돌아올 시간이 훨씬 지났다. 손녀 먹이려고 삶아둔 고구마가 다 식고, 갓 짜둔 오렌지 주스가 뜨뜻해질 무렵 현관벨이 울린다. 유리문으로 내다보니 경찰관이다. 웬 경찰? 영어, 영어가 짧은데... .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을 한다.  “헬로우, 하 아 유? 아임 ~ 노스밴쿠버~~ “ 아는 단어 몇 개가 귓바퀴에 걸린다. 경찰관의 느긋한 품새로 보아 큰일은 아닌 성싶다. 그네 입에서 “아임 파인, 앤드 유?” 60년 대 교과서식 대답이 자판기 누른 듯 톡 튀어나온다. 경찰관 뒤에서 쿡 웃음소리가 날아온다.  “에이, ‘아임 파인 앤드 유’가 뭐냐? 당신 지금 ‘파인’ 아니잖아? 새파랗게 질려서는... .” 영감이 윙크를 하며 손자와 손녀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무렴해진 그네 얼굴이 벌그레진다. “할머니, 노 워리. 베어가 나타나서 폴리스가 우리 라이드 해줬어.” 손녀가 벌벌 떨고있는 그네 손을 꼭 잡아준다. 철없는 손자는 “할미, 나 삐뽀삐뽀 차 탔다.” 방방 뛰며 신나한다. 영감이 돌아서서 전라도 억양이 밴 영어로 경찰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그런 하찮은 영어로 그네를 무시하는 영감에게 눈을 흘겨주고 단풍잎 같은 손자, 손녀 손에 오렌지 주스 잔을 쥐어준다.  

 오늘 하루 살짝 뒤뚱거렸지만 그렇게 ‘평온’으로 마침표를 찍는 줄 알았다.

 그런데... . 아이들을 딸 집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다. 영감이 “고생했네.” 하며 그네 어깨를 지긋이 당겨 안아준다. 숨 가쁜 하루 끝에 오는 나른함 때문이었을까. 하늘가에 걸린 보랏빛 숄이 그네 눈에 들어왔다. “노을이 다 사위어 가네. 붉게 타는 노을은 놓쳤지만 저 보랏빛 노을 같은 노년도 괜찮네요.” “어쭈, 시인 나셨네.” 그네 목소리가 간지러웠던지 짓궂은 영감이 또 핀잔을 준다. 칫, 자기 만나 쪼그랑 박 신세가 되었지. 나도 말랑말랑하던 소녀시절이 있었다우. 평생 입안에 담아둔 속말을 삼키며 그네가 팽 달아났다. “아이고, 그리 달리다 넘어져.” 영감이 쫓아온다. 집이 빤히 보인다. 무서울 것 없다. “곰 나타나면 어쩌려고.” 영감의 웅얼거림을 무시한 채 잰걸음을 놓는다. 

 집 앞 100미터 전, 어둠을 포대기처럼 두른 숲이 출렁거린다. 얼른 강아지를 안아올린다. 얼룽얼룽한 그림자가 옆집 드라이브 웨이에 어슬렁거린다. 뒷머리가 바짝 선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손으로 막았다. 숨소리도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위협을 느끼면 왈왈 짖을 강아지마저 그네 가슴에 머리를 파묻는다. 그것이 그네과 개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다. 콜드 섹을 사이에 두고 그것과 그네가 대치하고 있다. 곰인가? 곰치고는 몸피가 날렵하다. 아기 곰인가. 아기 곰치고는 키가  크다. 근데 색깔이 까맣질 않네. 막 젖 뗀 그리즐리곰?. 그네 머릿속에 동물도감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인간은 너무 공포스러우면 현실감을 잃는다. 얼마나 오랫동안 말뚝처럼 서서 떨었는지 모른다.  “왜 스컹크라도 나타났어? “ 영감이 그네 어깨를 툭 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형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옆집 울을 넘어 숲으로 잠적했는지, 집 뒤뜰로 들어가 웅크리고 있는지, 달달봉사 같은 그네 앞을 유유히 통과해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지... .아니, 저 장난기 가득한 영감이 그네를 놀래키려고 짐승탈을 쓰고 너울너울 춤을 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밤새 어둑시니가 휙휙 날아다니는 악몽에 시달리다 동이 번하게 터올 무렵 겨우 선잠에 들었다. 

 “굿모닝.” 저승꽃 군데군데 핀 얼굴이 그네를 내려다 본다. 고소한 버터 맛 나는 토스트와 헤이즐럿 향 은은한 커피를 앉은 쟁반을 들고 웨이터처럼 대령하고 서있다. “아이고, 눈 뜨자마자 어찌 먹는다우.” 신혼 때를 흉내내는 남편의 애살에 칭찬 대신 앙탈을 부린다. “모란 같던 우리 각시, 할미꽃이 다 됐네.” 진실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때로는 날선 진실이 상대의 마음을 예리하게 벨 수도 있다. 그럼 그렇지. 웬일로 안 하던 모닝 뽀뽀를 하고. 아침부터 장난샘이 터졌네, 터졌어. 그러는 자긴 뭐 아직도 푸른 청년인가. 그네가 발딱 일어났다. 그네의 앙칼진 눈초리를 눈치 챈 영감이 “발코니에 가서 먹을까? 볕도 따숩던데.” 하며 후다닥 달아난다. 

 화장실에 들어가 선머슴 같은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 본다. 그 속에 노년의 어머니가 들어있다. 영감의 말이 맞다. 하지만 오랜 세월 같이 살아온 부부가 서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건 반칙이다. 함께 오른 고산과 함께 타고 넘은 파도를 감안해서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기나긴 투쟁의 시간들을 어찌 견딘단 말인가. 얄짤없이 할 말 다하고 공격에 즉각적인 반격을 가하는 부부 사이엔 틈이 생기기 마련이고, 틈을 메꾸지 못하면 끝내 균열하고 만다. 저 주름 골골이 연민의 꽃이, 저 검버섯 곳곳에 인내의 이끼가 핀 것을... . 속 얕은 영감이 뭘 알겠어. 당당한 속생각과는 다르게 비비 크림을 짜서 이끼 흔적을 덮는다.   

  풋화장을 한 그네가 풋풋해진 마음으로 발코니에 나간다. 눈이 부시다. 어둠을 건너온 햇살이 촘촘한 나무 틈새를 비집고 빛살기둥이 되어 발코니를 비춘다. 새들이 영역 싸움 하느라 지르는 비명과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여느 아침과 다르지 않다. 어젯밤의 기괴한 형체는 기가 허해져 헛것을 본 거라고 애써 무마한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그네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영감이 데워온 토스트와 갓 내린 커피를 말없이 테이블에 놓는다. 영감이 은퇴한 후 유일하게 그네를 위해 하는 이쁜 짓이다. 영감은 그네에게 시킨 고생에 대한 속죄라 하지만 속죄까지는 어림없고, 아무튼 이 브런치 한 상이 그네의 한평생 쌓인 불평의 녹을 한 풀 한 풀 벗겨주고 있기는 하다. 그네가 우아하게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먹자 그제야 영감이 옆자리에 앉아 신문을 집어든다. 아침 산책길에 들고온 모양이다. 노스 쇼어 뉴스 헤드 라인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들어온다. “Who’s The KING? Cougar or Bear.” 대문짝만한 활자가 에밀레 종이 되어 그네 머릿속에 울린다.

 숲이 품어주는 건 그네만이 아닌 모양이다. 최상위 포식자인 쿠거와 곰도 품어주고, 검은 색안경쓴 너구리 가족과 멋진 흑백 제독 모자를 쓴 스컹크도 품어준다. 연녹 새 순만 똑 따먹는 토끼, 유기농 흙 깔아주면 먼저 달겨드는 개미 군단과 꿀을 찾아드는 벌나비, 아침마다 싸움박질하는 까마귀와 참새, 파랑관 쓴 스텔라 제이, 날개가 부서져라 흔드는 벌새들도 숲에 깃든다. 숲은 힘이 강하고 약한 자를 가리지 않고, 이롭고 해로움도 따지지 않는다. 쓸모가 있고 없음을 가늠하지 않고 종(種)이 같고 다름도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모두를 아울러 품는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기력을 다 쓰고 방전된 밧데리 같은 그네 부부까지 안아 충전시켜 준, 품 넉넉한 숲이다.

 과연 이런 숲에 누가 왕일까? 누군가는 먹이사슬 맨 꼭대기에 있는 쿠거나 곰을 손꼽을지 모른다. 다른 누군가는 숲을 쓸어내고 사람이 살 벌집들을 짓는 인간이라 할 수도 있겠다. 또는 인류 이전부터 존재하며 숱한 탈바꿈을 통해 적응해 온 곤충이 영원히 생존할 유일한 종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 살아남는 자, 더불어 살아내는 자가 숲이라는 제국의 왕이 아닐까? 나름 현명한 해답에 이른 그네가 눈앞의 또 다른 왕에게 커피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홍익인간의 개념 2026.10.09 (금)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마음둘 곳이 없을 때는부모님을 생각하세요.  헤어짐과 만남이 서로 갈등을 쌓아 놓을 때는설렜던 기억만 생각하세요.  기분이 우울하거나 감정이 내려앉을 때는깊은 계곡 맑은 물을 찾아보세요.  우리가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터를 잡고 생활하고 있다면  또 그곳의 생활에 충실해하루의 일상이 바쁘게 회전하다가언뜻 어린 시절의 고귀하게 남아있는추억을 생각하고  더할 나위 없이...
송요상
에버그린 하우스는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오래된 요양 병동이다.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노란 벽돌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오십 년이 넘은 낡은 건물은 새로 들어선 병동 맞은 편에 낮게 웅크리고 있다.    요양원이나 장기 요양시설에는 에버그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이 많다. 상록수는 사철 내내 잎이 푸른 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맑은 공기와 생명력이 가득한 상록수 숲의 인상과 달리 요양 병동은 잿빛 하늘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이주령
아파트 9층인 우리 집 거실에서 베란다 쪽 소파에 앉으면 사거리가 보인다. 건너편 아파트와 시내로 나가는 길이 교차되는 길이다. 그 사거리를 바라보며 가끔 무료하게 시간을 보낸다. 신호에 따라 밀려왔다 밀려가고 달리다 멈추고 하는, 하등 신기할 것 없는 차량의 행렬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저렇게 많은 차들은 대관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새벽부터 밤중까지 끊임없이 굴러가는 지친 바퀴들은 언제 어디쯤에서 쉬게 될 것인가. '나는 바퀴를...
최민자
호모 사피엔스 2026.10.08 (목)
우쭐대는 글 들과 퍼즐처럼 늘어놓은 낱말들로 인간이 지성이라 쌓아놓은 성벽 위에서 인간은 다른 생명을 뒤적이며 짐작으로 떠들고 떠들며 이름 부쳐놓고 이름 부쳐놓고 킬킬대는 호모 사피엔스  먼 길 돌고 돌아 여기 인공지능의 지성을 빌어 태초에 생명이 탄생하고 태초의 생명이 헤어진 길 그 헤어진 출발 선에서 다시 만나 모인다면 모든 생명들 한 동아리로 돌아가 그 최초의 언어로 말문의 장벽은 허물리고 그때 굶주린...
조규남
해외에 살면서 부모님이 한국에 계시지 않게 되면, 한국에 갈 일이 점차 줄어든다. 전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겨들었는데, 작년에 어머님마저 돌아가시니 서글픈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당장 한국에 가서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형제자매가 있어도 며칠은 괜찮겠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서로 불편하다. 그래서 묵을 곳을 인터넷을 통해 구했다.    예전에 엄마 집에 머물 때는 모든 것이 익숙해서 몇 년 만에...
박혜정
탈피 2026.10.02 (금)
검은 물속 바위 아래 웅크린가재 한 마리가 몸을 비틀고 있다살아남으려 껴입은 갑옷은 어느새숨을 옥죄는 감옥이 되었다터져 버릴 것 같은 몸을좁은 문틈으로 밀어낸다죽음의 동굴을 빠져나온다무방비하고 말랑한 새 몸가재는 벗어낸 뿌연 몸뚱이와 마주한다나를 지키던 세계를조각조각 씹어 삼켜새로운 갑옷을 만든다다음 죽음까지 또 한 번의 영원을 준비한다유명한 그림 속 붉은 가재를 떠올리다고개를 내젓고는청록의 꼬리를 접었다 펴물살을...
이인숙
꽃의 체온 2026.10.01 (목)
     인사동에 가면 '볼가'라는 찻집이 있다.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실내에 들어서면 창가에 풀꽃들이 도열해서 길손들을 반겨준다. 깜찍하게 예쁜 꽃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살며시 꽃잎을 만져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꺾고 싶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왜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유욕이 발동을 하는 것일까. 꽃 앞에서 해 보는 생각이지만 내가 꽃잎을 만져보는 더 큰 이유는 생화인가 조화인가 알아보기 위해서다....
반숙자
감 2026.10.01 (목)
          1. 감 꽃 샛결바람 따스히 감 꽃이 떨어져요 장독대 물들이고 담장아래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가요   밭일 나간 엄마에게 막내소식 들려주려 바삐 바삐 떠나가다 가지 끝에 결린 바람   맴을 돌다 사분사분 감 꽃만 흩날려요   샛결바람 따스히 떨어진 감 꽃이 내 마음 물들이고 발치 아래 소복소복 눈처럼 쌓여가요   2. 목걸이 실에 꿰어 만든 목걸이 엄마 기다리다 길어진 모가지에 드리우고...
김호정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