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광고문의
연락처: 604-877-1178

만삭의 여인

반숙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4-10-25 16:03

반숙자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곧 서리가 내릴 세라 청자 빛 하늘을 이고 고구마를 캔다. 배불뚝이 고랑을 타고 앉아 호미 질을 하는 손길이 어느 때보다 넉넉하다. 고구마를 캘 때는 줄기 둘레를 널찍하게 파야 상처를 내지 않는다. 넝쿨이 무성해서 팔 뚝 만 한 수확을 기대했으나 잔챙이 뿐이다. 가뭄이 심했던 올해는 이만한 수확도 고맙기만 하다.
이때 어디선가 툭! 하고 가을이 떨어진다. 보나 마나 알 밤이다. 밤나무 네 그루에 열린 밤 송이가 아람을 벌어 알 밤을 쏟아내고 있다. 그도 시원찮으면 밤 송이 째 떨어진다. 호미를 놓고 밤 송이를 만져본다. 앙상한 가시 속에 꼭지 반대 지점에 열 십자로 거무레한 금이 그어져 있다. 얼핏 보면 산 달이 가까운 임산부의 배를 보는 듯하다. 참 신비하다. 바로 거기가 벌어지면서 알 밤이 나온다. 영락없는 여인의 자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밤나무는 제 새끼들을 잉태하여 성장하도록 거친 밤 송이 속에 부드럽고 안락한 아방궁을 준비해 둔 것이다. 밤 송이는 비록 가시로 중무장을 했을지언정 제 속에 키우는 새끼들에게는 최상의 조건을 마련해 준다. 여름 내 잎 속에 꼭꼭 숨겼다가 햇살이 영글면 못 이기는 척 출산을 하는 밤나무는 엄마다.

  고구마를 캐다가 알 밤을 줍기 시작한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풀숲에, 꽃밭에, 비탈에 떨어진 알 밤을 줍기 위해서는 천하장사도 몸을 구부려 고개를 숙여야 줍는다. 바람이 한바탕 불고 가면 선물이 쏟아진다. 나는 이 밤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퇴비를 주거나 소독을 하거나 심지어는 풀 한 포기 뽑아준 일이 없다. 그럼에도 밤나무는 풍성하게 보시를 한다. 밤을 주어보면 손안에 느끼는 중량감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눈을 감고 조용히 밤나무에게 경배를 한다.
다시 고구마를 캔다. 제법 큰 것은 줄기 밑에 직립해서 요지부동이다. 삼 형제, 사형제가 서로 어깨를 겯고 단합된 모습을 뽐낸다. 이럴 때 손바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먼저 제일 큰 놈을 잡고 흔들어 본다. 말하자면 타진이다. 끄떡도 안 한다. 그러면 고구마가 깔고 앉은 옆구리 흙을 살살 파낸다. 또 흔들어본다. 자칫하다가는 부러져버려 조심스럽다. 이렇게 차례로 캐 놓은 놈을 보면 왜 그리 대견한지, 잘 키운 자식들을 보는 느낌이다. 아마도 우리 자식들도 서로 의지해 험한 세상을 잘 걸어가 달라는 염원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제비 새끼들이 입을 벌리고 엄마 아빠가 물어다 줄 먹이를 기다리 듯 이맘때면 우리 자식들도 고향에서 보내는 택배를 기다릴 텐데, 올해는 모든 게 흉작이라 다섯 상자를 채우려면 진땀 나게 생겼다.
  
  고구마는 겸손한 식물이다. 여름 내 비닐로 씌운 흙 속에서 묵묵히 자양분을 받아 새끼를 키우지 요란을 떨지 않는다. 날이 가물거나 바람이 몰아치거나 줄기 들을 땅에 부복 시키고 제할 일만 한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번듯한 작품을 지상에 올려놓는다. 배고픈 이에게 한 끼의 행복한 식사가 된다. 고구마처럼 겸손하고 후덕한 일생이었으면 좋겠다.
짧은 해가 서산을 넘을 때면 하늘은 온통 석양으로 물든다. 두 골 이랑은 캐 놓은 고구마로 그득하다. 먹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배부르다. 담을 그릇을 가지러 뒤란으로 돌아간다. 거기에는 쇠잔해진 오이 넝쿨이 덕을 의지한 채 말라 있다. 한 백 년 쯤 땅속에 누워 탈골해 버린 모습이다. 무성하게 잎 피우고 열매 맺어 우리 집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었던 채소다. 오이 덕 앞에서 가만히 합장한다. 한 생애를 아낌없이 소진해 버린 어머니를 만난다.

  가을은 결코 혼자 온 게 아니다. 여름이 남기고 간 결과물이다. 가을 깊어가는 나이에 허술하게 보낸 여름을 후회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밤나무 아래서, 고구마 밭에서 경배하는 것은 자연이 알려주는 스승 다움 때문이다. 들녘에 벼 이삭도 산골 다랑어 밭에 수수 이삭도 너붓이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명이 뿌리내리게 해 준 대지에게 햇빛과 비와 바람으로 잘 키워준 위대한 섭리에게, 그리고 고달프게 매달려 가꾸어 준 농부에게 바치는 경배다. 나도 지금 만추가 되어 천지 만물에게 경배하고 싶은 은혜로운 시간 위에 있다. 내일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 모르지만 이 가을 앞에서 만은 아기가 되어 철 없이 뛰어놀고 싶다.
가을에 생식력 있는 것들은 모두 만삭이다. 사과나무는 빨갛게 익은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곧 몸을 풀 기세다. 어디 사과 뿐 이랴, 발 뿌리에 채이는 풀 씨들도 만삭이 되어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촤르르 몸을 푼다. 하여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 아니라 여성의 계절이다. 출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 인지를 몸소 보여주는 모성의 계절이다.
자금 등 뒤로 불어와 채근하는 소슬 바람에 길을 떠나려고 짐을 싸는 사람은 먼저 그대의 어머니에게 머리 숙여 경배하고 집을 나서라.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동쪽의 거리 2026.01.23 (금)
독도가앞서 밝아올 때울릉도의 등줄기인왕산의 오래된 벽봉황산의 그림자남한산성의 돌땅끝마을의 끝내 닿지 않는 손성산일출봉새천년 해안 샛바람길의 비린 새벽정동진. 호미곶사람들은산과 바다도시의 모서리마다각자의 동쪽을 세운다나는이름 하나 들고서 있었다간절곶아주 오래전간절함이 먼저 와우리 사이에 서 있었고말은해보다 늦었다빛이 오기 전 오빠는부르지 않아도 이미동쪽에 있었다가장 얇은 그 새벽나에게 동쪽은한 사람 서있던...
김회자
한글은 계시였다 2026.01.23 (금)
세계가 한국을 바라본다. Kpop의 박동, 드라마의 서사, 영화의 감정, 음식의 향기까지. 그러나 그 모든 ‘K’의 중심에는 조용히 빛나는 한글이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래 살고 나서야 비로소 깊이 깨닫는다. 한글은 단순한 문자도, 기술적 발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정신이 글자의 옷을 입고 세상에 다시 나타난 계시였다.우리 민족의 역사는 단군의 건국 이념에서 시작된다. 홍익인간—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라. 이 네 글자는 한 나라의 뿌리가...
심정석
 제목은 거창하게 대화의 기술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언어학자도 아니고 대화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과 대화하며 느낀 점들을 개인적으로 피력해 보고자 한다.  사람이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것은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인 고민도 털어놓고 싶고 이런저런 상담도 하고 싶지만, 잘 들어주지 않는 사람과는 말을 섞기도 꺼려진다. 남의 말을...
이현재
태풍 2026.01.23 (금)
난 바다 어디쯤외눈박이 눈을 하고달려오는 바람 하나거침없는 생이 부럽다 나 그렇게뜨겁게 산 적이 있었던가그렇게 겁 없이사랑한 적 있었던가 젖은 머리 풀고 질주하는구름기둥 끝에 매달려짧고 굵게 살다 죽는비결 한 수배워야 할까 보다
정금자
갓 지은 흰 쌀밥 같은삼백육십오 개의 이름 없는 하루 해와 달 경계에서 호명을 기다린다 아직 목울대에 후회가 걸려있는데때 묻은 손이다시 하루를 빚는다 덜 굳어 찌그러져도금이 번져 부스러져도 울음이 새지 않도록웃음 한 벌 문설주에 걸어 두고 욕심이 숟가락을 들기 전에먼저 박수를 내밀어야지 하루를 닫으며그래도 괜찮았다고 끄덕이게오늘의 이름 아래'사람' 쪽에 발 디딘다 응달로 찾아드는 얇은...
임현숙
  2025년 한 해 동안 읽은 책을 돌이켜 보니 온라인까지 합해서 모두 37권이다.   나이가 깊어 가니 읽는 속도도 느려지고, 읽으며 독해력이 떨어지니 자연 반복해서 읽게 되니 읽고 싶은 책 욕심은 많으면서도 읽는 양은 빈약한 셈이다.   누가 그랬던가, 늙어서 시간 여유가 많아지면 책이나 실컷 읽어야겠다고 하면서 젊어서 책 읽기를 더디게 한다. 나이 먹어서 뭘 하겠다는 것은 참 어리석은 미룸이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해야 할...
한힘 심현섭
  어느 달 밝은 밤이다 해바라기 같은 둥근 달이 담장을 넘어 마당을 지나 툇마루로 올라오더니 방안을 기웃거린다. 방 안엔 한복에 한 뼘이나 되는 긴 수염을 늘어 틀이고 머리에서 눈썹까지 하얀 탈을 뒤집어쓴 칠성 할 배가 신선처럼 앉아 내일 약초 캐러 갈 도구들을 챙기고 있었다. 좋은 약재를 구하면 횡재를 하는 날이지만 헛 빵을 치는 날엔 다리 품만 파는 날이다. 밖에는 밤이 깊어 갈수록 바람소리가 사나워졌다.이때다 어디선가 한참 먼...
안오상
자식의 자식 2026.01.12 (월)
등에서 잠든 너를 내려놓지 않는 건내 어머니 골수를 먹고 자란 기억 때문무릎이 시큰거리다콧등까지 싸해지는 따스한 대물림 어제와 오늘도 혼동하는 너에게내일 다시 하자는 약속,울음을 삼키는 너의 눈을 피해주었던 걸 뺏는 건 참으로 곤란하지 동네 애들 다 데려간 피리 부는 아저씨집안 일 다 해도 미움 받는 신데렐라‘왜’냐고 묻는 삼십개월 너에게‘사람‘에 대해 무슨 설명 하리오 잎을 다 떨군 나무에 기댄 너의 숨소리찬 바람...
윤미숙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