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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가 건넨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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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 : 2020-03-16 16:20

조정 / 한국문협 캐나다 밴쿠버지부 회원


  “게으름은 실용주의에 떠밀려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 회복에 꼭 필요한 여유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 길을 떠난다.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리는 혼돈의 세상에서 메마른 가슴을 적실 마중물이 필요하다. 방향감을 유지하며 하늘을 나는 새처럼 삶의 지도 위에서 내 위치를 살펴야 할 때다. 잠시 달리던 길 위에서 숨을 돌리고 방향을 살핀 후 뛰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밴쿠버에서 비행기로 4시간 30분, 멕시코 중서부 태평양 연안의 마사틀란(Mazatlan)은 21Km에 이르는 긴 해변을 자랑한다. 인구 50여 만의 이 도시는 19세기 독일 이주민들에 의해 은광 개발 장비를 수입하던 항구로, 도심(Old Mazatlan)의 퇴락한 유럽풍 건물들이 그때의 번영을 짐작게 한다. 1월 중 최고 섭씨 25도의 온화한 날씨는 지루한 겨울잠을 자던 북미 사람들에게 앞당겨 여름을 살게 한다.

긴 우기의 겨울에서 탈출한 나는 갈대 지붕 밑에 앉아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서 밀려오는 파도는 지칠 줄 모르고 바닷가를 향하다 흰 포말이 되어 자취를 감춘다. 모래톱 위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쫓고 쫓기는 젊은이들, 모래성 쌓기에 진지한 아이들, 먼 훗날 그들도 그때가 참 행복했었다고 말하겠지!

머리에 20여 개의 모자를 겹쳐 쓴 사람, 선글래스를 나무 판에 촘촘히 꽂아 들고 다니는 사람, 태투가 그려진 스크랩 북을 흔들어 보이는 사람, 솜사탕과 음료수가 담긴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사람---, 햇볕에 그을린 작은 체구의 멕시칸들은 온종일 ‘올모스트 프리’를 외치며 모래사장을 걷고 또 걷는다. 생존을 위한 그들의 고단한 외침은 일광욕을 즐기는 관광객들과 대비되는 곤혹스러운 풍경이다. 나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두 살 된 딸을 데리고 티셔츠를 파는 젊은 부부에게 다가갔다. 티셔츠에는 멕시코인들의 사랑을 받는 짙은 눈썹의 프리다 칼로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멀리서 고달파 보이던 모습과는 달리, 그들의 온몸엔 노동으로 단련된 강인함이 배어 있다. 처음 부른 값으로 흥정을 마무리하는 그들은 이미 세상살이의 거센 풍파에 단단히 뿌리내린 듯해 보인다. 처음 낯가림을 하던 아이는 티셔츠 몇 장을 사고파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활짝 웃고 있다. 해맑게 웃는 아이의 그을린 얼굴이 더없이 건강하다. 자기중심을 지키며 웃음으로 소통하는 두 사람은 그들의 소박한 정서에 나를 동화시키고 있었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신체적 장애와 이루지 못한 사랑의 고통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20세기 초현실주의 멕시코 화가다. 1954년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녀는 가혹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열정적인 창작 활동을 했다. 그녀의 작품 <부서진 기둥>에는 온몸에 못이 박혀 처절한 고통 속에 서 있지만, 생명의 의지를 담은 한 여인의 강렬한 눈빛이 있다. 고독을 생명의 에너지로 확장시킨 그녀는 불안, 고통,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그녀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이루어냈다. 새로 산 티셔츠의 프리다가 내게 묵직한 화두를 던져 주고 있다.

해변 저쪽에서 바다를 등진 10여 명의 반다(Banda) 악대가 열정적인 음악을 연주한다. 오직 두 연인을 관객으로 앞에 둔 젊은이들이 그들의 기량을 마음껏 뽐낸다. 시나놀라(Sinaloa)지역을 중심으로 멕시코 중서부에서 연주되는 반다는 마치 군악대의 연주처럼 웅장하고 경쾌하다. 젊은이들은 트롬본, 트럼펫, 클라리넷, 튜바와 베스 드럼, 팀바레스에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아 연주한다. 두 사람의 관객은 어깨를 기대고 연주를 감상하며 끝없는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있다.  

발등에 내려앉는 햇살과 화사한 부겐빌레아(Bougainvillea), 어스름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는 펠리컨 무리, 반다(Banda)의 연주에 화답하는 저녁노을, 바다 끝에 걸린 희미한 초승달, 외로운 밤하늘의 등대 시리우스, 마가리타에 곁들인 파도 소리---, 아름다운 풍경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마법의 순간, 포근한 우주에 안겨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이 소중한 순간은 언젠가 찾아올 눈물과 고통의 쓸쓸함을 다독여 보다 더 세상을 이해하게 할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져라. 열심히 일해야 하는 목적 달성 주의에서 잠시 멈추어 나를 성찰하며 선한 본성에 눈떠야 한다. 소유와 증식을 향해 가는 한 평화는 없다. 여가를 통해 충전된 에너지는 불안한 내일을 보다 주체적으로 살게 할 것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저자 버트런드 러셀은 복잡한 사고체계의 현대인들에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라고 말한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여유로움은 내 생각의 틀을 깨는 내적 사유와 충만한 감성을 안겨준다. 행복해지기 위한 게으름은 자신의 상처를 돌보며 평범한 일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치유법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 침묵하며 나는 지난날의 아쉬움과 다가올 날의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고요한 내면의 나와 만날 때, 나를 실망시킨 것들이 나를 분발시키며 갈등과 번뇌는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이제 먼 길을 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으니 그저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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