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15-04-25 09:24

한국문인협회 캐나다 밴쿠버 지부 회원작/수필
며칠 만에 나온 산책길은 봄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다.
길가의 벚나무들도 붉은색으로 온몸을 휘감고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이 싱그럽다.
나비의 날개를 닮은 듯 날렵한 꽃잎들을 겹겹이 품고 환한 미소를 지을 듯한 목련도 봄 내음을 물씬 풍기고 있다.
비가 온 다음 날이라 온통 습기를 머금은 길 위로 지렁이들이 줄지어 기어 나와 자칫하면 밟을 것 같아서 신경이 무척 쓰였지만, 공기는 달고 온몸이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
길은 집 앞에서 시작해서 몇 동네를 지나면 작은 호수에 다다른다.
호수엔 청둥오리가 있고 몸집이 큰 거위도 있다.
오늘은 그들이 한 무리씩 줄지어 다닌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인데 길 위로 기어 나온 지렁이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오랜만에 포식을 한 그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땅에다 머리를 박고 열심히 먹고 있다.
그중의 한 마리가 위험을 느꼈는지 날개를 펴자 나머지도 한순간에 날아오른다.
 
그 옆엔 초등학교가 있는데 아이들 하교 시간이 되면 여기저기서 엄마, 할머니들이 마중을 나온다.
호숫가는 금방 왁자지껄하면서 아이들의 천국이 된다.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 깔깔대면서 웃는 소리 조용하던 동네가 금방 활기에 찬 아이들의 장터가 된다.
옆에 있는 놀이터도 금방 아이들로 가득하고 한동안 부산하게 돌아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호숫가는 원래의 모습을 찾고 아이들도 하나둘 엄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조용한 산책길로 변한다.
 
이 길을 가끔 혼자서 걷곤 한다.
우울하거나 답답할 때 그리고 뭔가 그리울 때 이길을 가면 아이들 웃음소리 떠드는 소리에 나는 금방 행복해진다.
하나같이 해맑고 순진한 그 얼굴에서 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지고 마주 보면서 웃는 그모습에서 천사의 모습을 보는듯하다.
가끔은 수줍어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아이는 손을 흔들어 주면서 같이 웃어준다.
그들 중에서 부끄러워서 얼굴이 발개지면서 엄마 품으로 파고드는 그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아이들과 산책하는 젊은 엄마들 강아지와 같이 나온 사람들 여러 사람과 만남이 나의 무료한 일상을 흔들어놓는다.
사람들과 같이 어울린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지 그저 마주 웃으면서 손만 흔들어도 좋은 그런 날 들이다.
햇빛이 좋은 날 아이들은 잔디밭에서 뒹굴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또 여자아이들은 인형놀이, 소꿉장난, 봄은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맴돌고 있다.
 
어느 날 호수에는 아이들의 달리기가 한창이었다.
여자 선생님 2명이 3.4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들과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호수를 몇 바퀴 도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날씬한 여 선생님은 선두 그룹의 아이들과 학교로 먼저 들어가고
뒤처진 아이들은 젊은 여 선생님의 격려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고 힘내라고 외치면서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처진 아이들은 4.5명 정도였는데 대부분 좀 뚱뚱하고 지쳐 보였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중에 한 소녀가 눈에서 뛰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해 보였고 뛰는 게 아니라 걷는 수준이다.
살도 찌지 않았고 푸른 눈을 가진 아주 예쁜 소녀였다.
순간 나는 지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달리기는 언제나 꼴찌, 운동은 무지 싫어하든 내 유년이 떠오르면서 그 소녀가 안쓰러워졌다.
힘내라는 뜻으로 웃으면서 손을 들고 눈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 아니 아주 째려보듯이 쳐다보면서 대꾸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힘들게 뛰고 있는데 아는 체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이방인의 관심이 무척 불편 했던가 보다.
그게 아닌데 하면서 당황했지만 뭐라고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 아이는 원망스러운 눈빛을 남긴 채 멀어져갔다.
미안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한동안 사라져간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오해를 하게 되면서 어색하게 멀어져간 사람들이 가끔은 있다.
그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오해를 가져왔는지 모르지만, 서로의 속내도 모른 채 멀어져간 내 주위의 사람들이 있다.
내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난날을 조금씩 끄집어내어서 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면 참 희한하게도 아주 오래된 일인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오해를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으로 미안했다고 그리고 진정으로 사과한다고 말한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을지라도 내 마음은 벌써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진다.
이국의 소녀에게 준 상처가 활짝 핀 봄날의 꽃이 되어 그녀의 가슴에 향기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마지막 정류장 2025.10.31 (금)
해 저문 골목 어귀어느 사람의 하루가 천천히 닫힌다 생(生)을 실은 버스 한 대낯선 정류장에 멈추고모래시계의 마지막 알갱이를 따라앞좌석의 누군가가문 쪽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여직흘러내리는 시간을 바라보며가라앉은 시간의 틈을 더듬어 본다 오래된 햇살 같은 이름 하나젖은 이불 깃에 스며든바람의 온도 창밖의 어둠 속으로사람들은 하나둘 그림자를 거두고나는 묵묵히 남은 모래알을 세고 있다 어쩌면 이 기다림은빛...
임현숙
기억의 집 2025.10.31 (금)
  가을빛 향연에 이끌려 길을 나선다.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단풍나무 숲을 지나 산책길 끝의 공원묘지로 향한다. 캐나다의 공원묘지는 삶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에도 낯설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뭇가지 사이로 드리운 햇살과 잘 가꿔진 잔디와 꽃들 사이를 거닐며, 죽음 또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이 자연스레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툭’ 하고 단풍잎 하나가 어깨 위로 떨어진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민정희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지만, 아이도 많고 큰 개도 키우다 보니, 우리 집은 항상 물건이 넘친다. 희한하게도 분명 자주자주 비워내고 있지만, 어느새 비워둔 그 자리에 또 다른 물건이 쌓여 있고, 채워 지고의 반복이다. 아마 나도 모르게 비우지 못하고 물건들을 붙잡고 있는 성향을 가졌을 지 모르겠다. 마침 이를 깨닫게 된 경험을 얼마 전 하게 되었다.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전의...
윤의정
나무와 나무 틈새 바위와 바위 틈새눈보라 살을 비벼 맞는 통한의 세모빙하도 꽃을 피운다 틈새를 메워가며 저문 노을의 궤적 가득 찬 산 허리에꼬장한 바람들이 뒤집는 산촌 풍경*삭(朔)지나 걸어 나오는 대비조차 멋진 달 로키는 돌아누워 내면의 싸움터에든든한 후원자로 교만을 경고한다무성한 내 안뜰 악습 온기 없이 싸늘한 이 겨울 민 낮 들어 땟국을 벗고 싶다로키여 수세 몰려 경(景)을 포기하지 마라白樺皮 흰 속살마저 틈새를 메워...
이상목
미조(迷鳥) 2025.10.24 (금)
  단영은 유미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유미의 태몽은 강렬했다. 조류를 무서워하는 단영에게는 잊힐 수 없는 그럼 꿈이었다. 커다란 기와집 대문 중앙에 서 있던 단영은 무거운 대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선 건 윤기가 흐르는 까만빛의 새였다. 새는 긴 목을 똬리 틀듯 둥글게 말고 마당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까만 깃털 안에서 번뜩이는 까만 눈동자가 단영을 올려다봤다....
고현진
  한 달 여를 아주 심하게 앓았다. 대학병원의 응급실로도 들어가고, 진통제를 먹어보고 주사를 맞아 봐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은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 한 폭을 떠오르게 했다. 기억 속의 그림은 빨강과 검정의 소용돌이였다. 보고만 있어도 극도의 혼돈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이번 내 상황은 세탁기의 탈수 통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 마냥 그 그림 속 휘돌이 속으로 온 몸이 아닌 머리만 빨려...
최원현
비가 내린다부슬부슬 가을비 내린다손끝마다 온통 붉은 물 들이며길 위에 홀로 서 있는가슴 위로 바람이 스친다종일 어깨를 적시는 빗방울하나 둘 떨어진 잎새는말없이 젖은 흙에 스며들고한숨처럼 가슴 두드리던바람은 발 아래 흩어지는데       비가 내린다토독 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마음에 자꾸 물이 드는 건인연이 깊어지는 것일 텐데단풍잎 소리 없이 지는 건깊어지던 우리 인연 다하여그대 떠나가는 것일 텐데우수수 이별의 시간...
강은소
메주가 뜰 때 2025.10.17 (금)
둥글게 사린 몸을삶고 찧고 매달아천형(天刑)의 조화(造化)에도해 달 맞기 몇 삭(朔)인가메말라벙근 틈새로고향(故鄕) 맛이 배어간다뒷손 없는 푸대접에너절하게 달아 말려겉으론 데데해도금이 간 깊이마다베옷의먹성(性)을 담는토속(土俗)냄새 익어간다
문현주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