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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부터 밴쿠버까지, 영화제가 주목하는 영화 ‘로맨스 조’ 이광국 감독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12-10-05 10:24

“사심 없이 즐길 수 있는 ‘재미’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묻다”

영화 ‘장밋빛 인생’과 ‘정글 스토리’-가수 윤도현의 팔팔했던 시절을 엿볼 수 있다-를 연출했던 김홍준 감독은 오래 전 한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털어놓았다.

“영화 감독의 꿈은, 뭐 그리 특별한 건 없습니다.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걸로 행복이죠.”

극장 앞으로 1000만 관객을 호출해 보겠다거나 아니면 칸이나 베니스 영화제의 레드카펫 위를 쿵쾅거리며 걸어보겠다는 꿈은 김홍준 감독의 하소연(?) 속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감독의 좁쌀만한 배포에 냉기 어린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영화 현장을 살짝 들여다 보면 직업으로서의 감독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은 한국에도, 캐나다에도, 미국에도 대충은 다 통하는 얘기다. 때문에 영화로 돈을 만들지 못한다면 다음 작품을 연출하기가 어려워진다. 산업이라는 관점에서 감독에겐 투자자를 만족시켜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슬며시-완전히는 절대 불가능하니까- 외면하는 고집스런 감독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베니스영화제를 매료시킨 김기덕 감독과 홍상수 감독이다. 영화 ‘로맨스 조’를 들고 밴쿠버 국제영화제를 찾아 온 이광국 감독에게도 작가만이 풍길 수 있는 기운이 느껴졌다.


<▲ 밴쿠버 국제 영화제를 찾은 이광국 감독 / 사진=최성호 기자 sh@vanchosun.com >

내게 제일 잘 어울리는 ‘옷’ 찾는 것이 가장 중요
영화 ‘로맨스 조’에 대한 소문은 극장가보다는 몇몇 영화제에서 먼저 시작됐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세계 최대 규모의 독립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지금은 밴쿠버 국제영화제가 ‘로맨스 조’를 대접 중이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경력만 생각한다면 꽤 화려한 반응이다. ‘로맨스 조’는 이광국 감독의 첫번째 장편이다.

“이번 영화를 내놓기 전까지 홍상수 감독과 오랜 시간 함께 일했어요. 처음에는 연출부로 들어갔다가 ‘해변의 여인’ ‘하하하’ 등에서는 조감독을 맡았습니다.”

영화 인생에서 홍상수와 같은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행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가’의 둥지를 떠난 이들에게는 수업료가 마치 부채처럼 남아 있다. 스승과는 다른 톤으로, 다시 말해 신선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수업료다.

일면 당연해 보이지만 ‘로맨스 조’를 대하면서 관객들-물론 평론가를 포함해서-은 홍상수의 지문을 찾는 데 열심이었다. 그 지문을 하나, 하나 체취할 때마다 ‘홍상수가 사람 하나는 잘 키웠군’ 하는 식의 목소리가 들렸을 지 모른다. 자기 이름을 단 작품에서 다른 사람의 흔적이 관심받고 있는 상황은 불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건 제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관객들이 선입견을 갖고 제 작품을 대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영화가 나온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해요.”

자기의 색깔을 명확하게 보일 필요는 있다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홍상수 감독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 그에겐 무의미한 일인 듯 보인다.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집중이 더 중요하겠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럴싸한 옷을 입고 있다고 쳐요. 하지만 그 옷 자체가 아무리 멋져도 내 키, 내 허리 사이즈에 맞지 않는다면 거추장스럽기만 할 거에요. 멋있어 보이는 것보다는 내 몸에 꼭 맞는 옷을 찾는 게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석하지 말고 영화가 주는 ‘인상’을 즐겨야
대부분의 영화들은 스토리상의 규칙, 그러니까 문법을 지니고 있다. 악당은 죽어야 되는 시점에서 죽을 수밖에 없고, 사랑하는 남녀는 어떤 오해 때문에 헤어지더라도 영화가 끝나기 전에는 반드시 다시 만나 애정을 꽃피운다. 그럴 수 없다면 혼자 남은 남자 혹은 여자 주인공이 상실감에 펑펑 우는 장면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 현실 감각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스크린상의 모든 장면들이 유치한 우연으로밖에 비춰지지 않겠지만, 관객들은 이를 필연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규칙 등에 반기를 들면 영화는 순식간에 불친절해진다. 일상적인 언어로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순간 ‘어려운 영화’로 분류되기 십상이다. 이광국 감독은 불친절한 쪽을 택한 모양이다. 영화 제목에는 분명 ‘로맨스’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데,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바라는 로맨택한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맥 라이언을 기대했던 관객 입장에선 ‘에구머니!’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법 하다. 

 


<▲ 영화 '로맨스 조'의 거의 맨 마지막 장면. 소년과 이 남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객들마다 제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 사진=VIFF >



“영화를 만들기 전, ‘나에게 맞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놓고 한참 고민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내 얘기를 좋아해 주겠지, 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았다. 영화에는 여러 화자가 등장하고, 저마나 다른 버전으로 편집된 기억을 회고한다. 그 얘기는 영화의 핵심 인물인 ‘로맨스 조’에 관한 것이다. 관객들은 마치 퍼즐을 맞추듯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쫓아가야 하는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스크린 대신 팝콘이나 콜라에 잠시 한눈 팔다 보면 퍼즐 맞추기는 애당초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더욱 불편한 진실이 하나 더 있다. 신경을 집중해 억지로 퍼즐을 맞춘다고 해도 완성된 그림이 전혀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쉽게 얘기해서 솔직한 관객들은 이렇게 투덜거릴지 모른다.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가 도대체 뭐야?”

감독의 해명은 이랬다.

“한 방향으로만 읽히는 것보다 다양한 얘기가 나올 수 있는 영화가 더 재밌지 않나요? 기존의 틀에서만 영화를 대하니까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의 명확한 주제를 찾으려고 애쓰지요. 애초에 정리될 수 없는 것들도 정리하려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어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정리된 것보다는 작품에서 받게 되는 인상 같은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기존 틀로는 이해하기 좀 어려운 ‘불편한’ 영화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분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영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제가 볼 때는 더 재밌는 영화 감상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런 거죠. 그림을 볼 때 보통 사람들은 화가가 어떤 붓을, 어떤 물감을 사용했는지 관심을 갖지 않잖아요. 그냥 그림 자체가 주는 인상에 더욱 집중하죠. 영화도 그런 식으로 즐기는 것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깔깔거리며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는데도, 감독은 인터뷰 도중 ‘재미’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들먹거렸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감독이 생각하는 그 재미라는 게 무엇인지.

“여섯 살 짜리 아이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걸 느껴요. 그 아이는 누군가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에요. 스스로 즐기기 위한 거죠. 이처럼 사심 하나 없이 뭔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게 바로 재미라고 생각해요.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걱정거리거리가 사라지고 재미 또한 커지지 않겠어요."

이광국 감독에게 있어 재미는 당연히 영화이고 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 재미를 꾸준히 지킨다면, 언젠가 ‘작가 리스트’에서 그의 이름을 찾게 될 날이 올 지 모른다.
문용준 기자 myj@v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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