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줄리아헤븐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망설임 없이 꽃을 집어 들었다. 큰아들의 선물로 목단 다섯 송이를 집어 드니 제법 풍성하다. 의아해할 아들의 얼굴과 환하게 웃어주며 받아들 아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남자에게 꽃을? 아들의 생일선물로 꽃이라니…? 떨떠름한 주변의 반응이 우습다. 꽃은 내가 사는데, 아들인 남자에게 꽃을 선물한다는 것만으로 주변을 의식해야 하는지… 여자가 남자에게 꽃을 받으면 당연하다 여기고, 여자가 남자에게 꽃을 주려 하면 의아해하거나 남사스럽다고 하니 도대체 이런 편견은 어떤 근거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와 조금만 달라도 특이하다고 단정 짓는 사람은 자신이 되레 개성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엔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을 거다. 나와 다름으로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는 나와 다른 사람들 덕분에 음악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예술 또한 감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듯 그 사람만이 지니는 고유의 감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야말로 편견 없는 좋은 사회 더 나아가 다툼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초석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와 다름은 어쩌면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아주 작은 세상의 문이 나를 향해 열려있는 건 아닌지… . 사실 누구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나와 다르다는 단순한 이유가 편견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은 사고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형평성을 잃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대체로 많다. 그렇게 파생된 편견은 자신의 오만과 자만에 의해 사고의 덫에 놓이게 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본인이 받기도 한다.
마태복음 7장 1, 2절에는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도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으로 무엇보다 자신을 점검하고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격언으로 알려진 ‘너 자신을 알라’는 네가 아닌 일인칭 단수로 ‘나 자신을 알아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타인을 향해 가리키던 둘째 손가락을 구부려 접어진 검지 끝이 나를 향하도록, 남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손가락질하던 그 손끝엔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무튼, 4년 전에도 나는 아들을 위해 꽃을 산 적이 있다. 그때는 12학년의 봄이 시작되던 작은 아들을 위해서였다. 2015년 3월, 작은 아들아이는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성지순례를 통한 문화 유적지와 명화를 둘러보기 위해 크리스천 학교에 다니던 아들아이의 특별활동 부서인 미술부에서 떠난 여행이었다. 열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아들이 돌아오던 날에, 꽃잎이 채 열리지 않은 도도하고 매혹적인 흑장미 다발을 안고 빅토리아 공항에 들어섰다. 꽃을 들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작은 공항은 둘러봐도 나 이외에 꽃을 들고 있는 사람은 없다. 힐끔거리며 스쳐 가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곁눈질과 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민망하고 어색함은 왜인지… ? 요즘도 공항에 꽃을 들고 오는 사람이 있나? 내가 마치 보기 어려운 진풍경의 주역이 된 듯하다. 새어 나온 부끄러움이 품에 안긴 꽃다발로 스며드는지 묵직한 무게감마저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오히려 그들의 모습 또한 내게도 색다른 재미로 다가와서 부끄러움을 거둬들인 자연스러운 미소로 화답하는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이 상황과 모습은 지난 시간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십 년을 빅토리아에서 사는 동안 꽃다발로 인한 민망한 일이 너덧 번 있었기 때문이다. 꽃에 얽힌 즐거운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하나하나 스쳐 가며 그중에 작은아들과의 시간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 본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작은 아들은 그해 빅토리아 페스티벌에서 피아노 부문으로 주니어 파트에서 일등을 했다. 준비해 간 꽃다발을 아들에게 내밀었는데, 머쓱했는지 받기를 주저하며 쑥스러워했다. 예상치 못한 아들의 반응에 당황하기는 나도 매한가지였다. 왜냐하면, 나 또한 아들의 이름이 호명되기 직전까지 내 무릎에 올려진 꽃다발에 쏟아진 수많은 눈동자에 당황했던 참이다. 물론 꽃을 들고 온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처럼 손아귀에 쥐어지지 못할 만큼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 온 사람은 없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한 아들은 꽃다발로 얼굴을 가린 채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뒤로도 아들은 피아노 부문의 두 번의 입상과 바이올린 연주회며 공연장을 자주 드나들어야 했지만, 단 한 차례도 꽃을 준비해 간 적이 없다. 그것은 아들과 나 사이에 암묵적 약속이 성립되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났으니 괜찮지 않을까? 엄마 없이 떠난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공연장이 아니니 괜찮겠지? 꽃다발에 얽힌 우리의 웃지 못할 슬픈 전설이 떠올라서일까? 설렘으로 가득 차오르는 나의 진짜 속마음은 붉어 가는 뺨의 빛깔 때문에 감춰지지 않았다. 아니 두근거리는 떨림에 아들의 반응도 살짝 궁금해진다.
꼭 다문 봉오리에 숨겨진 매혹적인 장미 향이 도발을 감행하며 향긋한 향이 주변에 머물러 가던 그때, 내게만 보이는 빛나는 달덩이가 환하게 떠오른다. 아기를 안은 듯이 꽃다발을 가슴에 품은 다소곳한 엄마의 모습이 인상적이고 예뻤다는 말과 함께 아들아이는 내 예상대로 꽃다발을 쑥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뒤늦게 출구를 빠져나오는 친구들에게 꽃을 높이 쳐들고 작별 인사를 전했다. 아들의 손에 들린 장미 꽃다발을 본 학우들은 일제히 휘파람과 환호로 순식간에 적막하던 공항을 십 대들의 파티장으로 바꾸었다. 그랬다. 나는 이미 남자에게 꽃을 준 적이 있는 여자이다. 그것도 공항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수많은 시선을 받으며.
그래! 꽃을 사자. 작은아들과의 꽃다발의 추억이 흐뭇한 걸 보면, 분명 큰아들도 좋아할 것 같다.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커다랗게 피어난 모란꽃을 받아 들며 큰 아들아이는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모란의 꽃말 중에 ‘왕자의 품격’이라는 말도 있다고 하면 박장대소하겠지? 아들은 서른셋의 나이만큼 쌓아 온 편견을 버리고, 엄마인 여자가 건네는 꽃을 기쁘게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꽃을 건네는 여자와 꽃을 받아 드는 남자. 이렇게 작은 것 하나부터 편견을 버려야겠다. 아들 집에 은은히 퍼져 나갈 꽃향기를 생각하니 벌써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 2019. 큰아들의 생일 선물이 정해지던 행복한 봄날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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