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어느새 연분홍 자두꽃을 피워내는 중이다.
달력을 넘긴다. 손때 묻은 기억이 접힌 종이 위에 매달려 어제로 남는다. 지난달의
페이지를 뜯어내 버리면 한 달의 기억이 지워지거나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냥 뒤로
넘겨놓는다. 한 장씩 뒤로 밀려나면서 차곡차곡 쌓여 두터워지는 시간의 흔적. 어제의
두께는 한 달의 나를 품고 한 해의 나를 묵시한다. 여태 억지를 쓰며 새 달력 뒤의 벽에
붙박아 놓았던 지난해 달력을 이제 떠나보낸다. 달력을 떼어내며 그 위에 내려앉은
기억의 한 조각, 스며들다 멀어진 인연을 떠올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스쳐 지나가거나 잠시 머물다 가고, 어떤 사람은 오래 곁을
지킨다. 오래 곁을 지키던 사람도 어느 순간 떠나갈 수 있고, 스쳐 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게 된다. 삶의 길에는
영원한 만남도, 끝없는 헤어짐도 없지 않던가. 믿고 지내던 만남이 돌아설 때는 더 많은
상처를 남기고, 짧은 만남인 줄 알았던 사람이 마음 깊이 남기도 한다. 만남이 끊어졌다고 해서 인연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끊어진 만남이 뜻밖의 재회로 새삼
깊은 인연임을 깨닫고 소중히 가꾸어 나갈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만남을 다 귀한 인연인 양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매 순간
사소한 관계에도 진심을 다하는 마음으로 만남을 이어간다면 누군가 진정한 인연이 되어
곁에 남지 않겠는가. 설령 그 관계가 멀어졌다 해도 언젠가 다시 편안하게 마주할 수
있을 테다. 만나고 헤어지는 엇갈림 속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일상을 따뜻하게 하고 삶에 향기를 북돋워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시간이 흘러도 마음이 향하는 사람, 함께하지 않아도 마음에 오래
남는 이름이 있다면 그 사람이 참 인연이다.
시절 인연이란 말이 있다. 인연에도 계절이 있어 제때가 되어야 관계의 꽃이 피어나고
시절이 다하면 꽃이 지듯 흩어진다는 의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맺어지지 않는 관계,
억지로 붙잡을 수 없는 관계는 때와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맺어지고 성숙한다. 때와
상황이 맞지 않으면 어쩌다 맺어진 만남이라도 관계는 무너지게 된다. 시절 인연은
기다림과 놓아줌 속에서 마음의 자유로움을 배우는 인연이다.
마음이 기억하는 이름 하나. 자두꽃처럼 마음에 피어나는 사람이 있다. 짧은
만남에도 가슴이 뭉클해지던 사람. 연분홍 꽃처럼 여려 보이지만 강단이 있던 사람.
그의 진심 어린 온기는 한동안 고마운 위로가 됐지만 우리 밖의 파도에 휩쓸려 멀어진
사람.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사람. 그는 끊어져 잊혀가는 인연일까, 아니면
제때를 못 만나 맺어지지 못한 시절 인연일까. 우리도 저 꽃처럼 때를 만나면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가슴 깊이 자리한 이름 하나를, 소리 없이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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