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만남」
선 하신 부르심 따라 길을 나서니
교만했던 나는 낮아져 사람 곁에 서고,
에워싼 세상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한 영혼의 하루를 같이 살아낼 때,
님이 그 삶 한가운데 빛으로 드러난다.
말기 직장암 선고를 받았던 그해 겨울, 나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한창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호흡하고,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며 교수라는 이름으로 왕성하게 살아가던 50대 초반의 나. 그런데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짧은 문장은 내 삶의 모든 일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말기입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날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며, 나는 마치 세상이 나를 비켜 지나가는 듯한 고독 속에 서 있었다. 실망, 두려움, 허무…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러나 결국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울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이었다.
“하나님… 단 2년만 더 살게 해 주십시오. 그 2년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선교지로 가서 영혼을 살리는 일에 제 남은 생을 바치겠습니다.” 왜 하필 2년이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그 기도는 약속이라 기보다 절규였고, 결심이라 기보다 항복에 가까웠다.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절규를 들으셨다. 2년을 구했던 나에게 30년을 더하셨고, 나는 지금 89세의 나이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정년을 마치고 교수직을 내려놓던 날, 나는 오래된 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였다. 그저 한 가지 확신만 있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러 간다.”
그러나 그 약속(約束)은 사실 ‘약속’이라 기보다 ‘역 속(逆束)’에 가까웠다. 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어 되돌려 세우신 묶음이었다. 나는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 무너진 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이제는 나를 따라오라”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비행기표 한 장, 선교지 주소 하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연장이라는 선물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중국의 오지로 들어가던 첫날, 낯선 흙냄새와 먼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것이 맞을까.”
그러나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네가 가진 것은 지식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준 생명이다.” 그 말에 나는 다시 숨을 고르고 작은 교실로 들어갔다. 낡은 책상, 깨진 창문,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던 학생들. 그들의 눈빛은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그들에게 내가 아는 글을 가르치고, 삶을 나누고, 때로는 조용히 손을 잡고 함께 기도했다.
북한 접경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는 더 깊은 어둠과 침묵이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또 다른 영혼들을 만났다. 말없이 배우고, 말없이 견디고, 말없이 희망을 품던 사람들. 그들의 삶은 나에게 선교가 무엇인지 다시 가르쳐 주었다. 선교는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돌아보면, 내가 선교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게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그들에게 보내셨고, 그들을 통해 나를 다시 빚으신 것이었다.
이제 89세의 나는 조용히 방에 앉아 그때 만났던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들은 내 사역의 대상이 아니라, 내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펜을 든다. 그 영혼들을 글로 다시 만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30년의 기적에 다시 한번 감사하기 위해.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났던 그 겨울,
끝이라 믿었던 길 위에서 생명이 다시 나를 불러 세웠다.
바람처럼 스쳐 갈 줄 알았던 2년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눈빛 속에서 30년의 시간으로 피어나
내가 아닌, 나를 살리신 분의 이야기로 다시 쓰였다.
낯선 땅의 먼지와 침묵 속에서
나는 가르치러 간 사람이 아니라 배우러 간 사람이 되었고,
말없이 견디던 이들의 하루가 곧 나의 복음이 되었다.
이제 남은 시간의 끝자락 에서야 비로소 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약속이 아니라 붙들 림이었음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펜을 들어
그날의 얼굴들을 다시 부르며,
살아 있음이 곧 은혜였다고
늦게 배운 고백을 한 줄씩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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