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배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영광 불갑사에 꽃무릇이 핀다
산문을 들어서자
고요한 숲길마다 붉은 물결이 밀려와
발끝에 불빛을 흩뿌린다
마치 하늘까지 닿은 불길처럼
온 산이 사랑의 기도로 타오른다
비 내리는 오후
법당의 기와집은 촉촉히 젖어
묵언의 수행처럼 무거운 고요를 품고
그 앞마당에선 꽃무릇이
빗방울 이마에 이고 서 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빛은
천년을 참아온 눈물 같아
오직 한 사람을 향한 기다림을 적신다
만날 수 없는 그 님을 향해
피고 또 피어나는 상사화
만남을 허락하지 않는 운명일지라도
그리움은 끝내 붉은 꽃으로 살아난다
젖은 꽃잎위로 스치는 바람조차
애틋한 노래가 되어 속삭인다
꽃밭을 헤매던 나비 한 마리
머뭇거리다 이윽고 앉아
그 붉은 향기속에 몸을 파 묻는다
다른 꽃들의 시샘도 까맣게 잊은 듯
잠시 꿈결에 젖어
세상의 시간조차 멈추어 버린다
긴 속눈썹 떨며 우는 듯한 상사화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빛
불갑사 산사의 고요와
종소리마저 감싼 붉은 물결은 말한다
만날 수 없는 인연도
그리움 속에 영원이 되고
다시 피어나는 기다림이야말로
사랑의 가장 빛나는 얼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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