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어둠속의 작은 불빛

박광일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7-25 17:12

박광일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여행은 언제나 기대와 설렘, 낯섦과 불안이 함께하는 여정이다. 페루의 쿠스코에서 한국에서 오는 일행을 만나기 위해 하루 먼저 출발한 나는, 여유롭게 호텔에 체크인하고 시내를 둘러보며 그들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행은 종종 아무런 예고 없이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밴쿠버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지연되며 계획은 엇나가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리마로 가는 연결편을 놓칠 위기에, 탑승 안내 직원은 일정을 변경해 주며 LA에서 하룻밤을 보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수화물은 LA에서 찾아 다시 부치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LA 수화물 창구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짐은 나오지 않았다. 한 직원은 그것이 이미 리마행 LATAM 항공편으로 넘어갔다며 제3터미널로 가보라 했다. 그러나 그날의 LATAM 항공편은 이미 모두 떠난 뒤였고, 체크인 창구도 텅 비어 있었다. 돌아간 제자리에도 사람은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에서야 짐을 찾을 수 있었다.
다시 리마를 거쳐 쿠스코로 향하는 길. 이번엔 매니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짐이 쿠스코까지 가도록 해달라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쿠스코 공항의 컨베이어 벨트는 나의 짐을 끝내 내놓지 않았다.
  영어를 못하는 공항 직원과 번역기를 통해 간신히 대화했다. 전화로 여기저기 확인하던 그는 결국 말했다. “가방은 리마에 있습니다.” 허탈한 마음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짐은 숙소로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 공항을 나섰다.
새벽 1시. 공항 앞 풍경은 고요함과 불안이 뒤섞인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 많던 사람도, 택시도 보이지 않았고 조명은 사물의 윤곽만 겨우 드러낼 정도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도시, 공항 외부에선 와이파이도 닿지 않아 번역기마저 무용지물이었다.
공항 경비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택시를 타야 한다는 말조차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몇 번이고 손짓발짓을 반복했다. 다행히 그는 상황을 이해했고, 마침내 택시를 불러주었으며 공항 출입 철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공항 밖에 도착한 택시는 목적지까지 15달러를 요구했다. 나중에 보니 그 요금은 통상 요금의 세 배였다. 호텔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 택시 기사가 차에서 내려 함께 벨을 눌러주고 문을 두드려 주었다.
그 순간, 지나가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공항 직원이며 호텔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그의 휴대전화로 호텔에 전화를 걸었고, 호텔 문이 열렸다. 호텔은 유럽의 집단주택처럼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어 출입문을 닫으면 외부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호텔직원이 방이 없다고 하자 그는 떠났고,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에야 택시는 조용히 떠났다. 나는 호텔 출입문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광장은 대낮처럼 밝고 경찰들이 있었지만, 골목길은 어둡고 사람의 그림자만 아득했다.
그 순간에는 무섭지 않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찔했다. 낯선 땅, 낯선 언어, 고요한 새벽. 호텔은 닫혀 있었고, 공항 직원이라던 남자의 정체도 의심스러웠다. 진짜 공항 직원이었다면 새벽에 방을 찾아 헤맬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택시 기사가 나를 홀로 두고 떠났다면,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어떤 일을 겪었을지 알 수 없다. 그는 바가지요금을 받았지만, 내게는 안전을 지켜준 ‘작은 불빛’이었다.
  그날 밤, 내가 지급한 것은 단순한 교통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이의 책임감이자 배려였다. 언어보다 깊고, 돈보다 값진 것이었다. 나는 이방의 도시에서, 바가지를 쓴 것이 아니라, 나를 끝까지 지켜준 한 사람을 만났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언니, 그냥 마트 가서 사 오면 되지. 요즘 누가 집에서 송편을 빚어요.”   추석을 앞두고 함께 송편을 만들자고 권했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송편을 사러 마트에 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요즘은 그렇구나…’ 변화하는 명절 풍속을 따라갈 준비가 안 된 나는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세상은 이미 변해버렸는데, 내 손만 예전의 추석을 붙잡고 있다.   결혼 후에는 차례를 지내지도, 대가족이 모이지도 않지만...
김아녜스
커피 데울 결심 2026.09.25 (금)
아내가 내려준 커피가책상 위에서 식고 있다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전화 한 통 받고스마트폰 화면 하나 넘기는 사이나의 하루도 조금씩 식었다전자레인지에 넣고30초 누른다사람 사이이만큼 여백은 어떨까뜨겁게 사랑하자는 말 대신식은 마음 조금 데워 보는 것오늘도30초만큼은 남겨 둔다데울 결심 있는 한우리, 아직 식지 않았다.
김경래
                                                                                                                                             ...
박광일
고구마 넝쿨 2026.09.23 (수)
볼품없던 고구마 하나가 물병속에 자리잡고 앉아여린 줄기를 내밀더니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때,아들이 둘째아이 소식을 전한다  유리창 넘어 햇살을 받아붉은빛을 띤 잎사귀들이자기들도 들었는지 덩달아 손을 흔든다  한 줄기에서 또 한 줄기 새순 하나 늦잠을 자면먼저 난 잎들이 간지럼을 태우듯그 곁을 더듬어 올라간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바람에 한꺼번에 흔들렸다가  서로 몸을...
유우영
말씀이 어눌한 자 2026.09.18 (금)
출석하는 교회의 금요 예배 시간을 통해 EM청년부 담당 목사님으로부터 인상 깊은 주제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출애굽기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가 내놓은 답은 인간적인 주저함 그 자체였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어눌한 자니이다.” 한 민족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로...
민완기
거울 2026.09.18 (금)
참 못생겼다참 많이 늙었다넌 잘났냐넌 젊으냐웃다가       울다가       싸우다가   또 웃다가  오늘도 두 영감이 함께황혼길 간다늙었다 못생겼다서로서로 놀리며마주보고 웃으며한평생둘도 없는길벗이 되어 
임윤빈
펴둔 채 2026.09.17 (목)
정원의 테이블은 봄에 폈다. 여름 내내 펴져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펴져 있다. 한 번도 앉지 않았다.의자는 봄에 서로를 마주 보게 돌려두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라도 나눌 것처럼, 둘을 바짝 당겨 붙여 두었다. 여름내 그 자세 그대로, 아무도 앉지 않은 두 의자가 서로를 마주 본 채 비어 있었다.의자 위로 먼지가 앉았다. 먼지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앉는 법이 없어서, 바람이 몇 번이고 지나가고 볕이 몇 번이고 들었다 물러간 뒤에야 겨우 얇은 막을...
윤의정
즈라촉 2026.09.17 (목)
당신은 나를 본다나는 당신을 본다가벼이가만히 즈려보는촉촉한 마음그 속에 비친 나빛난다​카니나마치 작은 소녀인 양​어두운 밤반짝이는 당신검은 밀도를 밀어내며 별빛을 두른다한 줄기 빛을 건넨다나는 그 눈동자 속작은 아이​꼬레마치 별을 삼킨 아이인 양​당신의 눈그 깊이 내가 스며 있나니​*즈라촉​*즈라촉(러시아어 зрачок)는 ‘눈동자’를 가리키거나눈동자와 관련된 여러 시대의 언어의 표현이다.
하태린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