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한글에 흠뻑 취해 춤 춘다오."

심정석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7-04 14:44

심정석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호텔 신세를 지곤한다. 강남보다는 강북에 있는 호텔을 선호한다. 강남은 남에 나라에 온 것 같아 낯설다. 그래서 강북에 머문다. 60년대 모습과 정감이 조금은 남아 있어 길 찾기가 편하다. 또 혹시나 내가 남긴 옛 추억하나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해서다. 50년대 후반 주경야독, 신문팔이, 고학시절, 자주 찾던 신문사들이 아직도 현존하는 광화문 근처에 머물고 있다. 석간 신문을 박아내는 우렁찬 윤전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광화문 광장을 천천히 유람한다. “사랑하는 고국이여, 안녕하셨습니까!”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얼굴이다. 대한민국이 작금 겪고 있는 모두를 한데 아울러 읽을 수 있는 심장 고와도 같다. 오늘도 세종은 광화문 그 자리에 계셨다. 세종은 자비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며, 미소로 말씀하신다. “우리말은 중국말과 달라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고, 또 우리의 고유 글자가 없어서 문자생활이 불편하여 새 글자를 만드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 자비스러운 말씀의 소리가 북악에 메아리 쳐 내 귀에 와 닿는다.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든 세종이 오늘도 말씀하신다.

  “너희가 만든 말이 아름답구나. 내가 만든 글자가 살아 있구나. 한글은 기술이 아닌 사랑이었단다. 그것을 기억한 너희가 참 고맙구나.” 한글은 시요, 사랑이다. 그리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축복이란다.” 하신다.

  그런데 나는 산수(傘壽)를 넘겨 이제야 한글의 참 얼굴을 뵙게 되니 어찌 억울 타 아니하겠는가?! 나는 한글이 금해 있던 일제 강점기에 3학년까지 한글 문맹으로 자랐다. 8.15 해방 후에야 한글을 깨쳐 간신히 중학교 입학을 했다. 2개월도 채 못 채우고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후 피난 사리로 3년 반을 무학의 머슴애로 자랐다. 서울 수복 후 주경야독하며 검정 고시 덕으로 간신히 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것도 과학도의 길을 걸어왔다. 간신히 한글을 읽고 쓰는 수준, 한글의 참 맛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대학 재학중 유학의 길이 열려 조국을 떠났다. 처음에는 몇 년 일 줄 알았던 떠남이 육십 년이 훌쩍 흘렀다. 영어권의 문화와 언어 속에서 살아가며, 나도 모르게 모국어와 문자는 잊어 갔다. 이민자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생존과 적응이 우선이었다. 언젠가는 돌아갈 것이라 믿었던 마음도 점차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 라는 체념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한글은 내 일상의 언어가 아닌, ‘기억의 언어 ’로 녹슬어 있었다. 그러던 내가 한글을 다시 붙잡게 된 데는 아주 사소한 계기가 있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외국인 친구가 어느 날 물었다. “한국어는 왜 그렇게 아름답게 들릴까요? 글자는 그림 같고, 소리도 음악 같아요”. 생전 처음 들어본 말이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는 한국어를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해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아니, 실은… 너무 당연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는 무언 가에 이끌리듯 다시 한글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라운 깨달음이 있었다. 어릴 적 당연하게 배우고 썼던 그 글자들이, 알고 보니 얼마나 과학적이고 정교하며, 동시에 미학적으로도 멋있는 문자였는지를! 자음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모음은 천지인(天地人)의 원리를 담아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나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한다. 그리고 이제야 알았다.

  한글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시 마음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 다가와 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옛 친구처럼 말이다. 나는 다시 자음과 모음을 따라 써 내려갔다. ‘ㄱ’의 강직함과 ‘ㅇ’의 넉넉함, ‘ㅏ’의 단호함과 ‘ㅜ’의 온순함… 각 글자가 살아 숨 쉬듯 내 손끝에서 피어났다.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 단어 하나를 써 내려갈 때마다, 내 안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문장으로 피어났다. 한글은 단지 글자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조국의 냄새, 어머니의 말투, 어린 시절 놀던 골목의 소리까지 담겨 있었다.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시도 써보고 싶었다. 오래된 일기를 한글로 다시 정리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문학 동호회를 알게 되었고, 문학인으로 글을 쓰는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 나는 한글로 마음을 쓴다. 영어로는 표현되지 않던 내면의 결을, 한글은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어 좋다. 예전에는 ‘I’m fine.’이라는 말로 덮어두었던 감정도, 한글로는 ‘괜찮은 척했을 뿐 이에요.’라고 솔직히 적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다시 한글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백발의 나이, 내 안의 언어는 다시 젊어졌다. 잊혔던 한글이 다시 내 삶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속에서 내 정체성과 뿌리를 새롭게 만난다. 마치 먼 길을 돌고 돌아 고향집 마루에 다시 편안하게 앉아 있는 기분이다. 한글은 여전히 따뜻했다. 여전히 나를 알아보아 주었다.

  지금 나는 매일 아침, 한 문장이라도 한글로 적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때론 짧은 시 한 편, 때론 그리운 이름 하나.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속삭인다. “한글아, 고마워. 나를 잊지 않아줘서.” 영어로 삶을 지탱하며 한글을 멀리하든 “한글 문맹자”, 88세에 한글의 맛에 푹 취해본다. 꼭 멋있는 글 하나 써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전하께 올리고 싶다. 나는 한글에 흠뻑 취해 춤 춘다고---

《 한글의 무도장 》

닷 소리, 홀소리/자음과 모음이 손잡고/첫 발을 뗀다.
ㄴ 은 조용히 팔을 들고/ㅏ 는 가볍게 허리를 감는다
그렇게 ‘나’ 가 된다.

소리 하나, 뜻 하나/춤추며 피어나는 글자들 /나도 거기서 한 걸음 내딛는다.
부끄러움은 접고/어눌함은 끌어안고/내 안에 한글이
비로소 춤을 추기 시작한다.

피천득 교수님 말처럼/“누에가 토해낸 실크 물/시어들이 나왔으면”
나도 내 마음의 누에가 되고 싶어.

한 글자 한 글자/정성으로 뽑아 낸/내 삶의 실크 물로
내 남은 삶/명주 같이 부드러운 시 한편 짜 보고 싶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자운영 2026.10.30 (금)
논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와 있는 것이 있다 나는 아직 닿지 않았는데 향기가 먼저 나를 지나간다 발목이 잠기고 무릎이 낮아질수록 조금 더 아래에서 다른 공기가 일어나 숨을 들이마시면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 먼저 흔들린다 분홍은 번져 있을 뿐인데 그 위를 계속 건너 다닌다 닿았는지 아닌지 모를 만큼 가볍게 왔다가 머물지 않고 곱다는 말이 떠오르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라질 것 같아서 나는 말 대신 숨을 더 깊이 들이마신다...
조순배
Ⅰ. 서론   AI는 예술, 문화, 학문 등 인간과 밀접해서 그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곳곳에 설치된 키오스크나 큐알 카드 사용은 기본이고, 교육과 학습, 금융과 소비생활, 교통과 이동, 문화. 예술. 창작 등 이제는 인간의 뇌가 AI를 정복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일론 머스크는 예언하기를 ‘AI의 발전 속도가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났고, 현재,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의 기업들이 인공지능에 투자하는...
이명희
박물관 2026.10.30 (금)
성채처럼 무거운 박물관에두터운 침묵이 깔린다 승리의 찬가는 귀를 세워도 끝내 들리지 않는다조명은 과거의 껍질을 벗기고영웅도 패배자도 한 지붕 아래 숨을 죽인 채 서 있다 명줄이 긴 유물들은 끝내 풀리지 못한 채 눈꺼풀을 내리지 못한다 강물처럼 밀려드는 관람객은 서로의 눈도 스치지 못한 채 찰칵, 짧게 짖고 시대의 위를 미끄러진다      
송무석
오래된 LP 레코드판 위에 바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한참 노래를 듣다가 오디오를 껐다. 고요해진 방 안에 여전히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My Way)’ 마지막 소절이 짙은 여운으로 맴돌았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주는 명곡. 오늘도 그 노랫말에 깊은 마음을 얹고 지그시 눈을 감자,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눈가에 맺혀 흘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상에서...
정효봉
가을이여, 와서 2026.10.23 (금)
해바라기 자궁에 황혼이 발아한다   태양을 흠모하던  꽃잎이 황금빛을 떨구면   초록을 잉태한 씨앗을 바람에 건넬 것이다   가을이여, 내게 와서 성실과 희망의 꽃말로 나를 다시 써 다오   소슬바람 한 줄기 오래된 계절의 문을 닫으면   나도 한 잎처럼 가벼워져   훌훌   먼 길을 건너리.  
임현숙
마음속 회색 돌담 2026.10.23 (금)
‘오! 멋지네’   사하라 사막에서 보내온 아우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정지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굽이굽이 펼쳐진 모래 결 위에서 낙타에 올라탄 채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모래바람이 사진 밖으로 불어오는 듯해 농담처럼 대꾸했다. 나도 연말에 적금 타면 낙타를 사겠노라고. 하지만 사진을 덮고 난 뒤에도 시선은 한참이나 허공을 헤맸다. 사실 원하던 것은 낙타가 아니었다. 모래 위를 걷는 ‘시간’을 사고 싶은 마음이 천천히 모래...
김아녜스
팬스타 미라클호(대한민국이 건조한 최초의 크루즈 페리선)가 드디어 지난 4월 13일 부산-오사카 구간을 취항했다. 선박 운항사인 주식회사 팬스타는 일본 오사카로 가는 새로운 뱃길이 탄생하였으며, 고급스러운 객실과 각종 편의시설, 선상에서의 즐거운 이벤트와 차별화된 서비스로 안락하고 품격 있는 크루즈 여행을 즐길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 배의 길이는 170m, 폭 25m 중량 약 2만 2천 톤으로 승객 545명과 화물 20피트 컨테이너 254개를 싣고...
정관일
강가에 앉아 물소리 듣는다물결들이 속살거리는 소리, 셀로판지처럼 물결무늬 반짝이는 소리, 모래톱을 밟고 올라오는 물 알갱이들의 심호흡 토하는 소리, 심호흡에 맞춰 은빛 페달을 밟고 강둑을 달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햇살을 차고 올라오는 물고기 떼의 은빛 아가미 팔딱거리는 소리, 소리의 입술들, 입술의 소리들이 노란 수채화로 뜬다    강가에 앉아 바람 소리 듣는다 나뭇잎들의 숨 쉬는 소리, 숨소리 뒤에 숨어 포르릉 포르릉...
이영춘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