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심현숙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최종수정 : 2025-05-30 16:32

심현숙 (사) 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오늘도 워커를 짚고 길을 나선다. 2년 전 교통사고로 손상된 몸을 재활하려고 헬스장(gym)이나 피트니스 센터에 가기 위해서이다.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버스를 이용한다.
 “Please lower the lift." 나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입버릇처럼 운전기사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어느 때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도와주겠다며 장애인 좌석으로 다가와 서 있는 승객도 있다. 버스가 정차하면 그 사람은 내 워커를 들고 먼저 하차한다. 그리고 자기 옆으로 워커를 내려놓는 다음, 한 쪽 팔을 접어 내 앞으로 쭉 내민다. 마치 영화에서나 봄 직한 장면이다. 자기의 팔을 잡고 내려오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모르는 남자의 팔을 잡고 버스에서 내리려니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나는 진심으로 고마워서 "Thank you very much."라고 인사를 했다. 그는 불편한 사람을 돕는 일이 당연하다는 듯 "You're welcome."하고서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는 희끄무레한 청바지에 운동화, 그리고 허름한 베이지색의 봄 잠바 차림이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캐내디언이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자신이 서글프기보다는 왠지 가슴이 훈훈해졌다.
 몇 달이 지난 후 같은 도움을 또 받게 되었다. 그는 하얀 터번을 쓴 아들 또래의 아주 잘 생기고 키 큰 젊은이였다. 버스를 탔는데 엘리베이터처럼 오르내리는 램프가 차 뒤쪽에 붙어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기 위해서는 운전기사가 차 밖으로 내려와야 했다. 번거로울뿐더러 시간도 지체된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옆자리 승객에게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도와주겠다며 워커를 들고 일어섰다. 그의 하얀 옷에 뭐라도 묻을까 봐 신경이 좀 쓰이긴 했다. 그 역시 미소 띤 밝은 얼굴로 내게 팔을 내밀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자”Good luck"하며 등을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나는 한참 동안 사람들 속에 섞여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잘 보내라’고 말하지 못했던 걸 후회했다.
  7년 전 공원에서 남을 돕다가 무릎을 다친 적은 있어도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줄은 생각 못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고등학생들까지도 비실비실 리프트를 내려오는 내게 손을 내민다.
 
 지난여름, 뇌출혈 이후 앰뷸런스를 탈 뻔한 사고가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 버스 타는 연습을 할 때이다. 처음에는 작업 치료사(Occupational Therapist)와 함께 워커를 짚고 코키트람 센터에 가는 훈련이었다. 그날은 세 번째 시간, 집에서 혼자 출발하여 센터 안의 지정 장소까지 가야 한다. 그곳에서 작업 치료사를 만나 두뇌 운동에 도움이 되는 게임을 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수업이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호등에 11이란 숫자가 뜨자마자 워커를 차도로 내렸다. 그 순간 바퀴가 턱에 걸렸다. 신호가 끊기기 전 빨리 건너가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발이 먼저 나간 것이다. 워커와 나는 차도에 내동댕이쳐졌다. 얼마나 세게 엎어졌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에 건 라이프 라인(생명줄)에서는 “미세스 정, 미세스 정, 무슨 일 있으세요?” 하며 앰뷸런스가 출동해야 하는지 묻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할 수도, 버튼을 눌러 취소할 수도 없었다. 길바닥에 온몸이 일자로 뻗어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당신을 돕고 싶은데 당신 몸을 잡아도 되나요?” “예” 아마 내 대답은 그분에게 들릴락 말락 했을 것이다. 그분은 나를 겨우 일으켜 세워 워커에 앉혔다. 90세가 가까워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는 조금 전 나와 다른 쪽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계신 분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태워주면서도 안심이 안 되는지 지켜보고 서 있었다. “It's okay. You can do it."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마치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표정으로 위로해 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루는 지인과 라파지 레이크를 산책하는 도중, 앞서가는 한 청년이 있었다. 가족들과 걷고 있는 그는 한쪽 다리를 끌면서 뒤뚱거렸지만 뒤쳐지지 않았다. 전 같으면 측은히 보였을 그가 왠지 당당하게 보였다.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도 워커도 안 짚고 워킹 스틱도 안 짚고 대단하네요.” 정말 장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인에게 말했다. ‘괜찮아. 다리를 끌면 어때, 너는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줬던 말을 되뇌고 있었다.
 또 한 번은 긴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서 있는데, 뒤를 돌아보니 10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워커를 옆으로 밀고 길을 내줬다. 그리고 차도 쪽에서 그 학생을 보호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케어기버들이 내게 보였던 것을 나도 하고 있었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얼마 전, 버스를 탔는데 20세 정도 보이는 청년이 버스에 올랐다. “나 돈 없어요.” 하자 운전기사는 내리라고 했다. 그러자 “Call the police"하고서 획 뒷좌석으로 가 앉아버렸다. 지갑에서 2불짜리 동전 두 개가 잡혔다. 뒷자리를 돌아보며 들어 보였더니 고맙다며 괜찮다고 했다. 전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일들이 내 일처럼 눈에 들어오곤 한다.
 
 막상 몸이 불편하고 보니 예상하지 못한 타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또한 정상인일 때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되는 이점도 있다. ‘세상은 아름답고 살만한 곳이다’는 걸 예전엔 깊이 생각 못  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괜찮아" 또는 "행운을 빌어요"라고 말한다. 이 두 마디는 정말 나를 위로해 주고 눈물 나게 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말, 용기와 격려의 말이다. ‘별거 아닌 이 말들이 사람을 살릴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사람들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고, 나아가서는 인류애를 배운다. 그들은 내 삶의 스승이고 조력자이다. 그리고 이웃이 되었다.
 신은 내게 어려움을 통하여 인간의 진실된 사랑을 알게 하시고, 더 큰 산을 넘을 힘을 주신다. 모든 것이 감사하고 충만하다.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모래성 2025.05.30 (금)
아무도 없는 바닷가홀로 선 모래성바람이 지우고파도가 무너뜨려다시 해변의 모래가 되겠지 쉼 없이 움직이는 개미가한 톨 한 톨 쌓아 올린 모래성그 긴 시간과 땀방울들은그들의 삶의 기억으로 남겠지 흔적도 없이흙이 되어 버린바벨의 탑처럼우주로 심해로 뻗어가는 야망도모래성이 되겠지 그래도 지금을 사는개미들은 부지런히모래성을 지어야지그들의 삶을 위해
송무석
 오늘도 워커를 짚고 길을 나선다. 2년 전 교통사고로 손상된 몸을 재활하려고 헬스장(gym)이나 피트니스 센터에 가기 위해서이다. 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버스를 이용한다. “Please lower the lift." 나는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입버릇처럼 운전기사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어느 때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도와주겠다며 장애인 좌석으로 다가와 서 있는 승객도 있다. 버스가 정차하면 그 사람은 내 워커를 들고 먼저 하차한다. 그리고 자기 옆으로...
심현숙
   커피를 주문할 때 우유를 넣어 부드럽게 마시려면 약간의 공간을 남겨야 한다. 김치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통에 담을 때도 여유가 필요하다. 꽉꽉 눌러 담은 김치는 발효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가스 때문에 국물이 흘러 넘쳐 냉장고를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채득 하는 데도 여러 번의 실수와 후회를 반복했다.  인생의 기나긴 항로 속에서 갈 곳을 잃고 헤맬 때가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숨 막히는...
권은경
위로 2025.05.30 (금)
     복은 빌 수 있어도     몸이 견뎌야 하는 일은     심산 절간에 간다 한들     빌어서 될 일이 아니더군     하늘 문 두드려     그 꽃밭 언저리에 앉았어도     몸이 해 할 몫은     몸으로 견뎌 헤쳐가는 것      생멸의 시간을 함께 숨쉬는     몸과 마음의 인연은     멀고도 길고도 무거운     2인3각 억겁의...
조규남
오월이 오면 2025.05.23 (금)
 어머니를 기리는 오월이면하늘에 어머니가 바람으로 다녀가십니다꽃을 피우는 따스한 손길로내 이마를 쓰다듬으며수고했다 장하다 다독이십니다훅 코끝에 감겨오는 살냄새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벼댑니다어머니는 봄처럼 푸른 꿈을 낳으시고산처럼 든든해라 강처럼 푸르러라세상에 이로운 이름으로 기르셨습니다가슴에 카네이션 달아드리던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꽃 대신 어머니를 꼬옥 끌어안아 드릴 텐데'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귀청을...
임현숙
  "언니!"  한국에 있는 동생의 한마디 문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언니, 엄마가 숨쉬기를 힘들어 하세요!"   페이스톡을 연결해 엄마의 상태를 보았다. 숨결이 얼마 남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엄마 귀에 전화기를 대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사랑해요." 를 수없이 고백하며. 그동안 엄마 기억에 섭섭하고, 잘못한 것 다 용서해주시라고... 멀리 있다는 핑계로 딸 노릇 제대로...
박명숙
한마디 말 2025.05.23 (금)
  “땡스 어 라떼. (Thanks - A - Latte! )“   내가 주문한 음료가 담긴 컵 앞면에 직접 펜으로 쓴 문구와 아래에는 스마일 이모티콘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아주 새롭고,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이게 뭐지?’ 하면서 처음에 이것이 무슨 뜻일까, 어떤 특별한 의미가 담긴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고맙다 (Thanks a lot)’ 는 말을 라떼음료에 빗대어 유머적으로 표현한 말 같기도 하고, 내가 라떼 음료를 시켜서 감사하다는 말...
정재욱
텃밭의 하루 2025.05.23 (금)
봄날 씨를 뿌린다흙을 덮고 일어서는데둥글고 붉은 씨알이금세 흙을 떨치고 나와쪼그리고 앉아 본다 어디서 나타났을까      크고 튼실한 알곡 한 톨힘을 다해 턱에 올려 물고반짝이는 까만 등허리로길을 여는 개미 한 마리 기다릴 새도 없이싹틀 기회를 놓쳐버린안타까운 마음 가득 담아독한 심술 부려보지만떨어낸 알곡 다시 부둥켜막힌 길 돌아가는 개미 집으로 가는 길목군살 없는 그 허리 위로솟아올라 굽은 잔등이에저녁...
강은소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