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최종수정 : 2025-05-16 15:57

최원현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아차, 또 닫혀버렸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다. 이제 다섯 정거장 뒤에나 오는 차를 타는 수밖에 없다. 이 바쁜 시간에 10분이나 늦어지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푸념하고 투정해봐야 소용없다. 아까 해찰했던 그 잠깐이 죄라면 죄다. 그러게 남의 일에 한 눈 팔 일 없는데 바쁘다면서도 아침부터 뭔 일로 큰 소리 내며 싸울까 궁금해했던 건 무슨 오지랖이었나. 그게 1분은 족히 되었을 게고 덕택에 나는 1초도 안 되는 차이로 차를 놓치고 말았다. 지난주에도 그랬는데 또 그런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는 중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으랴.
  놓친 고기가 가장 크다는 말처럼 내 삶 속에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 여럿 되었을 것 같다. 아내 말을 안 들어 행운의 기회를 놓쳐버린 적도 있었다. 수십 년 전 일이지만 강남 k여고 옆 9평짜리 아파트가 전세 4천5백만 원을 안고 5천만 원이라고 했다. 하니 5백만 원만 보태면 된다며 그걸 사자고 했다. 나는 9평짜리가 오르면 얼마나 오르겠으며 5천만 원이 오르면 또 얼마나 오르겠느냐며 타박을 놓으면서 묵살해 버렸는데 그게 얼마 가지 않아 재건축이 된다 하여 5천만 원이 5억이 되어버렸다. 또 언젠가는 우연히 경매물로 나온 수원의 원룸 건물을 알게 되었는데 부담금 별로 없이 구입할 수 있겠다며 아내가 사자고 했다. 무엇보다 위치는 좋았지만 땅 지분이 적어 불안하게 뾰족이 들어서 있는 사진을 보고 대꾸를 하지 않자 무산되고 말았었다. 한 1년쯤 지나 그쪽을 지나가게 되어 그 일이 생각나 그곳 엘 가보니 그 자리엔 아주 멋진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1층은 편의점이고 2층부턴 원룸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이재에 밝지도 못하지만 그런데 신경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지금 생각하면 못 이기는 척 아내의 말만 들었어도 지금보단 훨씬 낫게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놓쳐버린 것은 분명 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한 곳에서만 40년을 살았다. 그동안 재건축을 해서 다시 입주했고 그런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내가 한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산다고 바보 취급을 할 정도였다. 이걸 팔아서 옮기면 넓은 평수로 갈 수도 있고 두 채를 마련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며 참 많이 나를 주눅 들게 했었다. 한 번만 이동을 해도 큰돈이 떨어진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 복에 무슨 그런 일이 있겠느냐고 꼼짝 않고 있었던 것이 얼마 후엔 오히려 잘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 내가 놓쳤다고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만일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내게 어떤 일이 생겼을 지 알 수 없다. 지난해 그 40년 산 곳을 떠나 남쪽으로 집을 옮겼다. 나이도 들었고 생각도 바뀌어서인지 결정도 비교적 수월했다. 비로소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놓친 것은 내 것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내 것이 아닌 것들이었다. 바보스러울지 몰라도 내 걸음이 맞는 거였다. 남의 보폭에 힘겹게 맞춰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내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도 내 분수에 맞는 일이니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놓치다’는 말은 동사로‘잡거나 쥐고 있던 것을 떨어뜨리거나 빠뜨리다. 얻거나 가졌던 것을 도로 잃다. 목적하였던 것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을 잘못하여 이루지 못하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나 시기를 그냥 보내서 할 일을 하지 못하다. 듣거나 보거나 느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지나쳐 보내다.’(표준국어대사전)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모두 좋은 의미의 말이 아니다. 다 아쉽고 손해 보는 일이다. 하지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놓쳐 버리기보다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 때도 나이가 드니 오는 것 같다. 놓쳐서 안타까운 것보다 놓아버리지 못해 겪는 오해와 원망이 사람을 참 난처하게 만들 때도 있다.
  어린 날 친구들과 연을 날리다가 동네 미루나무에 내 연이 걸려버렸다. 아무리 당기며 애를 써 봐도 결린 연은 풀려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거기서 헤어나고 싶다고 연이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애원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연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줄이 걸려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때 동네 형이 연줄을 끊으라고 했다. 그를 놓아주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줄을 끊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휙 부는가 싶더니 실 끊긴 그 연이 스르르 나뭇가지로 부터 벗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여‘와! 연이 풀렸다’소리지르며 좋아했는데 순간 연은 하늘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다행히 얼마 못 가 아래로 내려오더니 건너편 다복솔 밭에 내려앉았다. 놓치는 것이 아니라 놓아준다는 것은 이렇게 때로 내 것을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도 생각 했었다.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본다. 놓친 것 중 가장 큰 것은 너무 일찍 내 곁을 떠나버린 부모 형제다. 속수무책으로 나만 남겨지게 만든 그들은 나를 참 많이 서럽고 안타깝게 했고 해서 원망스럽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믿었던 사람이 배반을 하거나 내 몫이어야 할 것을 가져가 버려 허망하게 빈손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와서 보니 내가 놓친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나는 늘 얻었고 받고 있었다. 그러니 딱히 손해 본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놓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란 거였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할 것들이었다. 안타까워하거나 아쉬워할 것들이 아니라 제 갈 길을 찾아가게 해 줘야 하는 것이었다.
요즘 들어 유난히 안타까워지는 것들이 많다. 좀 더 공부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가장 크다.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해낸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 인내와 절실함이 그들보다 못했던 거다. 아이들에게도 좀 더 잘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리 못 한 것이 아쉽다. 그렇게 했다면 저들도 조금은 더 좋은 조건에서 더 나은 삶을 살 텐데 하는 후회도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이 만큼이 내 분수라는 생각을 한다. 이에서 더 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닐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마음 편할 수 있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이제 봄이다. 초목들이 저마다의 옷을 입고 있다. 저들이라고 힘든 때가 없었으랴. 그런데 저들은 그런 내색조차 안 한다. 슬그머니 놓아야 할 때는 놓아버렸다. 아니 놓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태연했다. 놓아버렸더니 겨울을 지나 이렇게 봄으로 새 옷을 입게 된다.
  조금 전 상가(喪家)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왔다. 그분의 영정 속 웃는 얼굴처럼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도 놓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가 지켜야 할 의무나 본분, 나 다움, 어쩌면 그걸 놓칠까 봐 겁내는 것 아닐까. 나도 모르게 되어버릴 그런 순간은 아니 와야 할 텐데 창밖에서 떨어지고 있는 낙엽을 하나 둘 세어보던 가을을 보면서는 나도 가을인가 생각을 했었다. 놓아야겠구나 했는데 다시 봄을 맞는 나무들을 보면서 또 다른 소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어느새 칠순을 넘기고 보니 그간 놓친 안타까움보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을 더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좀처럼 욕심을 제어할 수 없으니 무소유란 말은 내 사전엔 없을 것인가. 그렇다면 내 의사에 관계없이 놓치는 것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오늘 놓친 열차도 시간을 계산해 보니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삶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놓치는 것들 속에서도 이어져 가는 것인 게다. 나처럼 앞차를 놓친 사람들인지 차 문이 열리기 바쁘게 뛰어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이젠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고 함께 뛴다. 손에 든 가방을 놓치지 않게 단단히 붙잡고. 



밴쿠버 조선일보가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제공하는 기사의 저작권과 판권은 밴쿠버 조선일보사의 소유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허가없이 전재, 복사, 출판, 인터넷 및 데이터 베이스를 비롯한 각종 정보 서비스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이제 신문도 이메일로 받아 보세요! 매일 업데이트 되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한인 사회의 각종 소식들을 편리하게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신청하세요.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미조(迷鳥) 2025.10.24 (금)
  단영은 유미를 가졌을 때를 떠올렸다. 유미의 태몽은 강렬했다. 조류를 무서워하는 단영에게는 잊힐 수 없는 그럼 꿈이었다. 커다란 기와집 대문 중앙에 서 있던 단영은 무거운 대문이 스르륵 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작은 틈 사이를 비집고 집 안으로 들어선 건 윤기가 흐르는 까만빛의 새였다. 새는 긴 목을 똬리 틀듯 둥글게 말고 마당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까만 깃털 안에서 번뜩이는 까만 눈동자가 단영을 올려다봤다....
고현진
  한 달 여를 아주 심하게 앓았다. 대학병원의 응급실로도 들어가고, 진통제를 먹어보고 주사를 맞아 봐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은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 한 폭을 떠오르게 했다. 기억 속의 그림은 빨강과 검정의 소용돌이였다. 보고만 있어도 극도의 혼돈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이번 내 상황은 세탁기의 탈수 통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 마냥 그 그림 속 휘돌이 속으로 온 몸이 아닌 머리만 빨려...
최원현
비가 내린다부슬부슬 가을비 내린다손끝마다 온통 붉은 물 들이며길 위에 홀로 서 있는가슴 위로 바람이 스친다종일 어깨를 적시는 빗방울하나 둘 떨어진 잎새는말없이 젖은 흙에 스며들고한숨처럼 가슴 두드리던바람은 발 아래 흩어지는데       비가 내린다토독 토독 떨어지는 빗소리마음에 자꾸 물이 드는 건인연이 깊어지는 것일 텐데단풍잎 소리 없이 지는 건깊어지던 우리 인연 다하여그대 떠나가는 것일 텐데우수수 이별의 시간...
강은소
메주가 뜰 때 2025.10.17 (금)
둥글게 사린 몸을삶고 찧고 매달아천형(天刑)의 조화(造化)에도해 달 맞기 몇 삭(朔)인가메말라벙근 틈새로고향(故鄕) 맛이 배어간다뒷손 없는 푸대접에너절하게 달아 말려겉으론 데데해도금이 간 깊이마다베옷의먹성(性)을 담는토속(土俗)냄새 익어간다
문현주
 나지막한 능선이 방패처럼 집을 감싸고 있다. 희미한 여명(黎明)이 산마루를 비출 때면 안개 속에 숨어있던 금대산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토록 맹렬하던 매미들의 아우성도 짧은 생으로 잦아들고, 애벌레를 물고 날아다니는 박새와 곤줄박이들이 분주히 숲속을 살피고 있다. 올망졸망 매달려 장대비를 맞던 밤송이들도 풋기를 거두고 씨알을 키우는 중이다. 가시 투구 속에서 단단하고 둥글게 몸을 만들어 홀연히 땅으로 떨어질...
조정
밴쿠버 러너 폴 2025.10.17 (금)
   ‘런데이 (Runday)’ 모바일 앱을 실행 시킨 후 운동화 신발끈을 단단히 묶고, 집을 나선다.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달리기 시작한다. 내게 익숙한 동네이지만 차로 지나다닐 때와는 다른 풍경처럼 느껴진다. 내 얼굴을 가르며 스치는 바람도 상쾌하고, 기분이 좋게 만든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집을 지나거나, 운좋게 멋진 노을 빛 하늘을 보거나, 둥근 보름달을 보면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핸드폰 카메라에 풍경을 담아내기도...
정재욱
가을 철암역 2025.10.17 (금)
오후 세 시의 그 꼭지점에서햇살이 길게 모로 누우면철길 저 너머에서 세 시를 알리는 기차는푸우-푹-푸우-푹 흰 연기를 토하며 달려오고 열세 살 그 소녀는누군가를 기다리듯, 먼 이방의 한쪽 문을 그리워하듯산비탈 조그만 쪽문을 향해 아슬히 눈 멈추곤 했는데 어느 날 도시락을 싸 들고 우리들 창자보다 긴 터널로 떠난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공복인 듯 탄 가루 먹은 하늘은 검은 연기로 쏟아지는데전설처럼 탄 가루 푹푹 쏟아져...
이영춘
절망 찾기 2025.10.10 (금)
깊숙한 절망을 가벼운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몸속 어딘가에 있을 절망을 한번 찾아보자 울컥하며 자주 발생하는 것이 기관지에 숨었을 거 같기도 하고 오래됀 위장병 모양 음흉하니 소장에 자리 잡은 거 같기도 하고 미열처럼 뜨뜻미지근 하면서 오래가는 것이 이마빡에 박혀 있는듯하고 혹시 그렇다면 수술을 해 봐야지 누가 아나 우뇌와 좌뇌 사이에 엿같이 철썩 붙어있는 그놈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 그런데 오래 살아서 큰...
박락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집도의는 캐나다에서도 이름 있는 Doctor라 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니 남자가 7사람 여자 두 사람이 있다. 수술은 집도의와 보조의가 하겠지만 의대생들이 견학하는 걸 허락했던 것이다.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 된듯하다. 수술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방광에 호스를 꽂아 소변을 받아내고 양팔 혈관에 주사바늘을 고정시켜 줄이 달려있다코로 호수를 따라 식사대용 영양제가 들어간다. 또 수술한 부위에도 호스를 넣어...
박병준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암이 자리 잡은 곳, 그 위치가 어디인가. 그게 중요하다.폐라면 힘 든다. 췌장이라면 수술이 어렵다. 급성으로 여러 군데 전이가 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이 위험하다.내게 온 곳은 목이다. 후두암이라고도 한다. 그 자리는 어떤 곳인가?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부분이다. 거기는 기도(Air way)와 식도가 만나는 곳인데 코와 입을 통해서 공기가 들어오고 또 입에서 식도로 넘어오는 음식이 지난다.또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가...
늘산 박병준
늘산 본인이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퇴원을 하면서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암에서 예방될 수 있는 일에 다소나마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시작합니다.암의 발견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다.나는 우연적이라 생각하며 그나마 일찍 발견하였다는데 다행이라 생각한다.산에서 사람을...
늘산 박병준
다음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