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한힘 심현섭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한힘 심현섭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가야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 아득하다. 가야는 우리 역사 속에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니 왕국의 흔적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가장 오래 된 한국의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가야의 존재가 없다. 겨우 “삼국유사”에 와서 ‘가락국기’라는 이름으로 가야의 건국설화가 인용되어 기록되고 있다. 그것으로 우리가 가야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기원후 42년에 건국되어 562년에 신라에 망하기까지 엄연히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여섯 나라의 역사가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가야를 말하고 있는 유일한 흔적이 가야고분군과 거기서 나온 유물들이다. 일제 강점기 고대사 연구를 핑계로 일인들에 의해 상당수의 가야 고분이 발굴되어 유물들이 많이 유실되었다. 최근 체계적인 발굴과 유물의 보전처리, 분석을 통해서 가야가 서서히 우리의 역사인식 속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야인들이 남긴 흔적은 지상에서는 모두 사라졌다. 오직 그들이 만들어 올린 고분으로만 말하고 있다. ‘가야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가야’의 7개 고분군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한국에는 가야와 관련된 고분군이 780여 개소 분포하고 있으며, 이 고분군에 축조된 고분의 수는 수십 만기에 달한다. 중앙집권화 된 국가체계를 이루지 않고 공존하였던 가야의 각 정치체는 지역마다 크고 작은 고분군을 조성하였다. 이 고분군들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대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국가유산청>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신라의 왕릉을 보면 경주 대릉원을 비롯해서 주변에 있는 고분이 손으로 헤아릴 정도이다. 백제에서는 이런 형태의 고분을 볼 수 없고 고구려에서는 돌로 쌓아 올린 꽤 큰 규모의 석총을 볼 뿐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가락국기에 의하면 오늘날 수로왕비릉 옆에 있는 구지봉에 하늘로부터 여섯 개의 커다란 알이 내려와 그중의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져 모두 가야 6국을 세웠다고 하였다.
가야는 개국에서부터 멸망할 때까지 한 나라로 통일된 적이 없이 분리되어 존재하였다.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역사 속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서로 경쟁하다 보면 어느 강한 나라가 이웃 나라를 침탈해서 점점 강성해지다가 통일에 이르게 되는 게 일반적인데 가야는 이 점에서 아주 예외적이다.
고령에서부터 합천, 함안, 고성, 창녕, 김해까지 차로 이동하면서 절실하게 느낀 것은 산이 많다는 것이었다. 고산은 아닐지라도 가파른 산들이 첩첩이 늘어서서 농작할 만한 경작지가 협소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중에 가장 넓은 평야를 가진 곳이 김해였고 그래서 김수로왕이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번창할 수 있었다는 지정학적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좁은 면적에 협소한 경작지,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되다시피한 상황 속에서 각자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거대한 봉분을 쌓아 올려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통일 왕국은 아니었지만 쌓아 올린 무덤 양식은 가야라는 이름 아래 거의 대동소이하다고 보여 진다.
가야고분군은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0여 년 전 신청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난해(2023년) 마침내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의 16번째 세계유산이 되었다. 세계인이 모두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유네스코 등재기준
“가야고분군은 연맹이라는 독특한 정치체계를 유지하면서 주변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와 병존하였던 가야의 문명을 실증하는 독보적인 증거로,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한 유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고”고 평가했다.
가야고분은 한결같이 평지가 아닌 얕은 산 위 구릉지대에 줄줄이 늘어져서 조성되었다. 올려다 보이는 위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을 비롯해서 지배세력들이 죽음을 맞으면 장례와 함께 매장을 엄숙하고 장대하게 치렀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만한 봉분을 쌓아 올리려면 엄청난 흙이 필요한데 산 위에서는 붕괴의 위험 때문에 산 아래 평지에서부터 등짐으로 져 날랐으리라 짐작된다. 많은 인원이 소요되는 장기간의 작업이라고 봐야 한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평지에다 무덤을 쓰지 않은 이유는 가뜩이나 좁은 농토에 수많은 무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보여 진다.
지금까지 후대의 무덤들도 멀리 바라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야시대의 거대한 봉분은 비탈진 곳에는 만들 수가 없어 자연 산 위 구릉지대에 생겨났다고 보아 진다.
여러 지역을 탐방하면서 고분군을 처음으로 맞닥뜨릴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때로는 올려다 보이면서 시작되고, 때로는 숲을 지나 벗어나면서 보이고, 때로는 도로에서 비스듬히 보일 때 그것은 단순히 옛사람들을 묻은 무덤이 아니었다.
가야를 품에 안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박물관이자 자연을 닮은 건축물이었다. 공동묘지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지금은 봉분 사이를 밤에도 거닐 수 있도록 조명을 밝히고 있지만 귀신이 나오고 괴성이 들릴 것 같은 그런 무서운 무덤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뭉긋하게 몽실몽실 솟아오른 봉분 사이를 걷는 것은 역사의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그것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귀를 기우리면 옛 이야기가 들려올 것 같은 역사를 품고 있다고 여겨 졌다. 폭염으로 대낮에 충분히 걷지는 못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면서 아쉬운 미련을 남겨 두었다.
가야고분들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다. 어수선하게 늘어선 듯이 보인다. 줄을 맞춘 것도 열을 맞춘 것도 아니다. 무슨 기준으로 무덤 자리를 선정했는지 짐작이 안 간다. 고인돌을 탐방할 때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만일 그 시대의 사람에게 묻는다면 그는 도리어 반문하지 않을까 싶다.
“현충원에 있는 비석들처럼 쭉쭉 열을 맞추어 있기를 원하는 건가요? 무덤을 쓰는 데 왜 구태여 열을 맞추어야 하나요?”
고대의 무덤들은 무덤의 주인을 밝히는 표지석 하나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묻었고 묻혔으며 다음 생에서 이생에서처럼 복되게 살기를 원할 뿐이었을까.
무덤을 쓰고 난 뒤에 묘제를 지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사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무덤의 전방과 후방이 전연 표시나지 않게 조성되었다.
어디를 가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기존의 박물관 이외에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연구하기 위한 왕릉이나 고분박물관이 반드시 있었다. 유물은 발굴된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이러한 노력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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