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줄리아헤븐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의자에 앉아 조금 전의 내 모습을 되새겨봤다. 요즘 들어 부쩍 피곤하고 고단한 몸이며, 어쩌다 거울 안의 또 다른 나와 마주치면 기억하는 내 모습에 조금씩 느껴지던 변화가 하루하루 다르게 더 빨리 진행하고 있다. 하나둘씩 늘어가는 흰 머리카락은 이마 주변으로 제법 허옇다. 볼록 나온 배를 억지로 쑤셔서 넣은 청바지 입은 태 역시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니다. 눈가의 주름이야 자연의 현상이라 여겨도 웃는 근육마저 굳어버린 듯 웃는 모습 또한 자연스럽지 않다. 하품하듯 입을 벌려 보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크게 떴다 감았다 재빠르게 깜빡여도 보고, 콧구멍 평수도 한번 늘려 보고, 눈썹 끝을 치켜세웠다가 내렸다 하니, 누군가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면 이보다 더 재미있는 무언극이 어디 있으랴. 얼굴과 몸을 세밀하게 흩으며 공략해가다 이번엔 생뚱맞게 서글픔이 몰려온다. 불현듯 예전에 어른들이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시던 말씀과 세월을 소재로 한 노랫말이 떠오르자 핑그르르 투명 구슬 한 알이 뺨을 타고 구른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가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 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료…” 내가 못 느끼고 있었을 뿐 시간은 세월을 만나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중학생 때 들었던 대중가요가 이제야 내 노래가 되어 있다. 마치 내 입에서 나올 날만 기다렸다는 듯이 가사와 가락이 잊히지 않은 채 불린다. 희한하다. 노래도 제 나이를 찾아가는 건가?
예전엔 텔레비전을 보다가 뉴스가 시작되면 채널을 돌리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를 보았다. 무의식에서 나온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만화영화나 귀여운 캐릭터들이 율동과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프로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뉴스는 부모님 연령의 사람들이 보는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뉴스 진행자마저 고루하고 따분하게 느껴지고 특히 아나운서들의 한결같은 목소리 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뉴스가 재미있다. 심지어 여러 방송의 뉴스를 보기까지 한다. 요즘처럼 서머타임이 있는 경우엔 한국보다 16시간(해제 후 17시간) 늦다 보니 이미 한국은 16시간 전에 모두 방영한 것들이라 무리 없이 채널을 골라가며 볼 수 있는 혜택이 있다. 같은 사건과 상황인데도 방송사마다 조금씩 다른 특색을 갖고 전하기 때문에 6개의 뉴스 채널 중 아침이면 3개의 방송사에서 들려주는 뉴스를 시청한다. 요즘은 아나운서들의 음성도 한결 부드럽고 옷차림도 예전과 달리 부자연스럽지 않다. 정자세로 앉아 정면을 쏘아보듯 시작하던 것과 다르게 뉴스 진행자가 걸어 나와 카메라 앵글이 아나운서의 동선을 따라다니기까지 한다. 게다가 진행자에게 금기시했던 안경도 쓰고 나오고, 취향에 맞는 뉴스 채널까지 골라볼 만큼 다양해져 뉴스 방송마저 내가 나이 들길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내가 서서히 늙어가는 동안 세월은 많은 것을 아우르고 있다. 드라마를 선택하는 편향 역시 바뀌었기 때문이다. 화제성을 몰고 오는 유명 배우나 좋아하는 연기자가 나오면 내용과 상관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그런데 지금은 은근히 기준도 까탈스러워졌는지 연기자를 보고 가부(可否)를 정하진 않는다. 그뿐이랴 터무니없이 괴롭히고 비방하는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것도 아웃이고, 유부남 유부녀들의 일탈로 가정이 파탄으로 치닫는 내용 역시 열외이다. 맥락 없이 네가 알아서 이해하며 무작정 보면 안다는 주먹구구식의 예의 없는 드라마도 제외고, 현실에 맞지 않는 설정에 억지로 짜 맞춘 신파극으로 눈물을 유도하는 드라마 역시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래저래 다 치우면 뭘 보지? 할 것 같다. 학창 시절이라면 절대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지 않을, 두드러진 인물도 없고 악역도 없는데도 묘하게 빠져들며 낄낄거리기까지 하는 드라마를 본다. 울 동네 이웃처럼 소소하고 잔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희(喜)와 락(樂)의 감정을 도드라지게 하는 그런 부류의 드라마가 이젠 좋다. 웃긴다. 드라마도 나이가 있나 보다.
눈으로 보는 감정의 변화에 입맛도 끼어든다. 할머니께서 맛있다며 연신 먹어보라고 내밀던 꾸릿꾸릿한 냄새의 떡이 있었다. 못 먹을 것이라도 먹는 양 손사래 치며 입을 틀어막곤 했던 떡이었다. ‘호박고지 설기’라는 이름조차 다소 낯설기까지 한 떡은 늙은 호박이 들어가는 백설기의 일종이다. 그 당시에 늙은 호박을 재료로 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먹으려 들지 않았다. 호박 특유의 냄새도 싫었고 왠지 이름에서 풍기는 느낌이 젊은 나보다는 가끔 오시는 할머니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노란빛의 호박죽이며 호박떡은 제대로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그 떡이 눈에 들어 오면 뭔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냉큼 손이 나간다. 돈까지 치르며 사 먹고 있는 거다. 또 달콤한 호박죽에 매료되어 스스로 호박죽을 끓이기도 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맛도 세월을 타고 있었다. 이처럼 늙어가는 것은 내가 알고 있던 나 자신이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과정인 것 같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난날을 활동사진 펼치듯 펼쳐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과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모습만 비교해봐도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물론 신체적인 변화는 차지하더라도 초등학교 때 가졌던 생각이 고등학생인 나와 분명 달랐고, 행동 또한 다르다. 그 이유는 매일 생각과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미묘한 차이로 바뀌고 있는 것을 잘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가졌던 생각을 지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생각도 세월을 타며 변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나. 내 경우엔 매일 일어나는 작은 생각의 차이가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늙어가는 것을 돕는 것 같다.
생각은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은 행동에 변화를 가져온다. 즐겨보지 않던 뉴스에 흥미를 갖게 되고, 싫어하던 호박떡을 좋아하게 되고 특별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람 냄새 나는 세상 이야기에 마음이 더 닿는 것도 늙어가며 바뀌어 가는 내 모습이다. 육십이 세인 내가 늙어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하면, 뭐라 하실 어르신네들이 있을 테지만….
얼마 전에 열두 살 청소년 연기자가 TV에 나와 인터뷰하는데, “제가 어렸을 때는” “제가 나이가 들면서…”“제가 살다 보니 …이렇게 되더라고요.” 하면서 열두 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2년을 사는 동안 느끼고 깨달으며 바뀌는 열두 살 소년의 삶을, 진행자는 귀엽다는 듯 피식 웃기만 하고 있었다. 자못 진지하게 12년 인생을 이야기하는 소년을 보며 어린아이라고 가벼이 여기고 웃고만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갔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열두 살 소년도 가지고 있었고 느끼는 것도 표현의 차이만 다를 뿐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인생이라는 틀 안에 놓고 보면 늙어가는 것은 동등하다. 그렇지만, 열두 살 소년과 내가 다른 점은 이제부터 내가 늙어가는 것은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해 마태복음 18장 3, 4, 5절의 말씀으로 궁금증을 풀어 주셨다.
인생이란 돌고 돌아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맑고 착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62살의 나. 이틀 전보다 어제가 좀 더 선한 마음으로 지냈고 어제보다 오늘을 조금 더 깨끗한 마음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면, 앞으로 늙어가는 내 모습을 보고 우울하거나 슬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즐겁고 행복할 거니까.
-2022년 8월 26일 불현듯 들어 온 생각하나, 늙는다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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