霓舟 민완기 / (사)한국문협 밴쿠버지부 회원
‘아호’를 하나 갖기로 하였다. 오래전부터 큰 숙제처럼 여겨지던 일이었는데, 유독 금년 들어 그 욕망이 간절해져서 시간이 날 때마다 옥편을 들여다보거나, 좋은 호를 가지신 분들, 특별히 문인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곤 하였다.
사실, 십대 홍안 시절 고교 문예반의 단짝 친구 셋이서 장난 삼아 호를 지어 나누어 가진 일이 있다. 글’翰’자 앞에 아침 ’朝’, 지혜 ’智’, 사랑할 ’慈’를 붙여서 각자가 아침 같은 글과, 지혜로운 글과 사랑이 가득한 글을 써보자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사실 속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집합을 걸어서 빳다를 쳐대는 못난 1년 선배들을 글로 ‘조지자’는 치기 어린 울분의 발로이기도 하였다.
나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이가 가족이외에는 더 있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아호’ 공모의 의사를 한번 타진해보았다. 아빠는 볼수록 매력이 있으니까 ‘볼매’는 어떠한지 라는 작은 아들의 상당히 달달한 외교적인 제안에 급 마음이 흐믓하였지만, 아빠는 한번 했던 이야기를 언제나 마치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하고, 또 하고, 매번 새롭게 시작하시니까 ‘사골’선생은 어떠한가 라는 큰 아들의 멘트에는 급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장 하이라이트는 아내의 제안이었다. 당신은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도 알게하기를 좋아하니까 아호로 ‘생색’은 어때요하는 통에 가족 모두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이대로 질 수는 없기에 아내에게는 ‘정색’여사 라는 아호를 반사해서 돌려주었지만…
결국은 자연 현상 중에서 평소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느끼고 좋아하는 무지개를 가지고 호를 한번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살아온 날들 가운데 내게 가장 무지개와 같은 순간들은 언제였는지를 한번 돌아보았다.
캐나다 이민을 선택한 후, 제일 먼저 써서 제출했던 레쥬메가 당시 막 개교한 한 한글학교 교사 응모원서를 위함이었다. 그 학교와의 인연은 사사건건 학사운영을 간섭하는 학교 이사진과의 갈등으로 학교장이 조기 퇴진하는 통에 함께 접게 되었지만, 그 후 프레이저밸리 지역의 한글학교 교사로, 이어서 학교장으로 인생의 황금기인 40대와 50대 초반을 보내면서 생업과 주말 학교 봉사로 그야말로 동분서주했던 시기가 떠올랐다. 당시 학교홈페이지를 제작하면서 대문을 클릭하면 첫 페이지에 어떤 문구를 넣어야 할까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디서나 당당한 리더로 서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 자기 색깔이 분명한 가운데, 주변과도 잘 어울리며 화합하는 마치 하늘의 일곱 빛깔 무지개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함께 무지개를 만들어 나가요’라는 캣치프레이즈를 만든 기억이 새롭다.
사전을 검색해보니, 밝고도 선명한 안쪽의 무지개는 숫무지개 ‘虹’(홍)으로 쓰고, 바깥쪽을 싸고있는 눈에 잘 안 띄는 은은한 무지개를 암무지개 ‘霓’(예)로 사용함을 알게 되었다. 이미 耳順을 훌쩍 넘긴 나이에 ‘虹’을 꿈꾸기는 과욕이다. 그리하여 암무지개 ‘霓’를 골랐다. 그리고 남은 과제는 짝을 맞추어 배필이 되어 줄 글자를 고르는 일이었다. 압축을 하고, 엄선을 해서 어린 아이 ‘兒’, 강 ‘江’, 연못 ‘潭’, 글월 ‘文’ 등을 놓고 몇 달을 고심하던 끝에 마침내 배 ‘舟’자를 선택하게 되었다.
문득,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무지개와 기왓장’이라는 동화가 떠오른다. 일생을 무지개를 손에 쥐고 오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한 사나이가 노년에 늙고 병들어, 깨진 기왓장 두 장을 들고 고향으로 쓸쓸히 돌아온다는 스토리이다. ‘예주’라는 아호를 가지면서 남은 나의 삶의 여정과 항해에는 ‘무지개 언약’이 끝까지 그 배 안에 담겼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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