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 / 캐나다 한국문협 회원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
기어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세 살배기 손주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손잡이가 높았으나 영특한 아이가 까치발로 서서 문을 열었다. 이를 발견한 아내가 바로 뒤쫓아 나갔다. 잠시 후 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주를 안고 나타난 아내의 얼굴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급히 뛰어나가다 다리가 꼬이며 앞으로 넘어졌단다. 아내는 넘어지며 손과 머리가 시멘트 바닥에 거의 동시에 닿는 바람에 머리에 부딪히는 충격을 손바닥이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이마를 짚고 있는 아내의 손을 치우자 밤톨만 한 혹이 보이고 거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혹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고속 카메라로 봄날 피어나는 꽃을 찍듯이, 어린 시절 풍선껌을 입에 넣어 불듯이 눈에 보이게 부풀어 올랐다. 골프공만 하게 부풀어 오르던 혹은 이내 믿을 수 없는 크기인 테니스공만큼 커졌다. 속이 상한 큰 딸아이는 손주를 큰 소리로 꾸짖었고, 영문을 모르는 손주는 엄마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911에 전화하고 남자 친구와 데이트 중이던 막내딸 앤에게 연락을 했다. 막 저녁을 먹으려던 앤은 수저를 집지도 못하고 통역을 위해 포트무디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왔다. 응급실은 대기하는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아내에게는 빨간 색깔의 익스프레스 카드가 있었다. 암 수술 후 병원에서 받은 카드로, 아내같이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진 기저 질환자들에게 발급하는 일종의 급행 카드였다. 아내의 이마에서 테니스공만 한 혹을 확인한 직원은 ‘오마이 갓!’ 하며 재빠르게 수속을 밟아 주었다. 응급조치하고 CT를 찍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수액을 맞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병원에 온 지 서, 너 시간이 지난 자정 이후에야 검사 결과가 나왔다. 담당 의사는 CT상으로 보기에 머리뼈에 이상은 없으나 부기가 심하므로 계속해서 냉찜질을 하라고 했다. 뇌진탕 증세는 현재 없지만, 뇌는 플라스틱 상자 안에 든 두부 같아서 상자를 심하게 흔들거나 떨어뜨리면 상자는 멀쩡하나 속에 있는 두부는 부서지듯이 뇌도 비슷한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 퇴원 후 집에서 요양하다가 속이 메슥거리거나, 구토, 어지럼 등의 증상이 있으면 지체없이 다시 방문하라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마에 큼지막한 붕대를 하고 집에 온 아내에게 손주인 유진이가 야속하지 않냐고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그렇지 않아도 집에 오는 차 속에서 계속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유진이 대신 저를 다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아내는 벌 새나 파도와 같이 제 몸을 치며 손주를 돌보는 듯 보였다.
광고문의: ad@vanchosun.com 기사제보: news@vanchosun.com 웹 문의: web@vanchosun.com
이현재의 다른 기사
(더보기.)
|
|
|